매혹.
2009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 매혹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

매혹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매혹됐다. 첫 눈에, 한방에, 훅~
가슴은 벌렁벌렁, 자꾸만 그녀에게 파고 들어가고픈 마음은 후끈후끈. 

내 첫 번째 첫사랑 이후,
보자마자 나를 훅~ 가게 만들었던 두 여자가 있었다.
그야말로 매혹 덩어리. 나를 매혹으로 칭칭 동여맨 여자.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고양이의 도도함과 의도적이 아닌 섹시함을 뿜어냈으며,
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 지적수준 또한 간혹 나를 끌어당겼던 그녀.

각기 다른 시간,
두 여자와 술 한 잔을 꺾고 이야길 나누면서, 나는 그렇게 매혹당했다.
아무리 말을 늘어놔봐야 그때 매혹의 순간을 온전하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첫눈에 훅~ 가설랑은 그 도저한 매력에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튜브도 없이.
뻥을 좀 튀겨서, 그네들이 내게 살인을 교사했어도, 나는 꼼짝없이 그 분부를 수행했을 거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라는 생각도 언뜻 했으니까.
내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팜므 파탈이었다면,
아마 나는 소원 하나를 성취한 셈이었겠지.

물론, 그 매혹의 순간은, 앰블런스 차 같았다.
훌쩍 눈 앞에서 싸이렌만 크게 울리고 지나가 버리는.

그녀는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삶을 송두리째 망가지게 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하찮았던 게지.
아무렴, 큰 걸 해야지. 째째하게. 나 같은 피라미를, 송사리를. 쯧.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 중 한 사람을 다시 봤다.
그때처럼 가슴이, 가슴이, 자맥질하지 않았다.
사랑도, 매혹도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긴 하나,
뛰지 않는 가슴에게 말했다. "그때 고장났던 거니?"

글쎄, 모르겠다.
아마, 인생이 두 번 흘러가지 않듯,
어쩌면 매혹도 일생에 한 번이 아닐까. 한 사람에 단 한 번. 인생이 그러하듯.

헤어진 연인에게 다시 손을 뻗치거나,
다시 시작하자는 투의 애원을 건넨 적은 없다.
아팠지만, 헤어짐은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꾸질꾸질, 질척거리는 이별은 싫었다. 좋은 이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헤어졌다가 우연찮게 희한하게 다시 만났던 여자도 있었다.
두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나 머리와 가슴 사이는 멀었다.

나를 매혹이라고 불러주던 여자가 있었다.
글쎄, 내가 그녀를 매혹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지만,
그런 그녀도 나에게 헤어짐을 고했다. 그녀는 나를 다시 잡지 않았다.
그렇다. 매혹이, 차였다. 우와앗.

<렛미인>. 
열  두살 소녀에게 반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롤리타 증후군은 남 얘기라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누가 그녀를 열  두살이라고 보겠나. 이엘리.
훅~ 갔다. 물론 그녀는 뱀파이어다.
그러면 어때. 내 목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올해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 <렛미인>. (지난해 개봉 때 못 보고 특별상영회를 통해 봤거든!)

두 번은 살짝 겁이 난다.
처음 볼 때처럼 매혹당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그랬듯.
이엘리에게 더 이상 마음을 뺏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 목은 이미 그녀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언제나 나는 매혹당할 준비가 돼 있다.
2010년, 나는 다시 매혹 당할 것이다. 그녀에게, 당신에게.
다시 한번,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들어가게 해 줘....

지난 9월4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펼쳐진,
책  출간기념 특별상영회의 현장을 담았던 글. 그러니까, 어떤 매혹의 기록.


본성을 배반하는 순백의 잔혹한 사랑, <렛미인>을 만나다

[독자만남] 이동진과 함께하는 <렛미인> 특별상영회


‘아름답다’보다 더욱 진한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내 목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빨간 내 피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 못했던 ‘열두 살’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열두 살은 케빈(<케빈은 열두 살>)밖이었는데, 이젠 바뀌었다. 케빈 대신 들어선 그 이름은,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가 됐다.


그렇다. <렛미인>. 스웨덴에서 날아온 이상한 뱀파이어 영화.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의 관습에서 떨어진, 아름답고 슬픈 영화. 이 영화,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감식한 이동진 기자는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2살 8개월 9일’이라고 자신의 나이를 못 박는 소년과 ‘한 12살쯤’이라고 살아온 세월을 얼버무리는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시간과 존재의 벽을 넘어선다. 혹은 어린 인간과 여린 뱀파이어의 사랑은 상대의 입술에 핏자국을 남기거나 유리창에 희미한 손자국을 남기며 희미해져 간다.”


<렛미인>, 당신을 매혹시킬 어떤 사랑의 풍경


이 영화, 애초 원작이 있었다. 독일, 영국 등의 유럽 12개국에 번역된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John Ajvide Lindqvists)의 베스트셀러 『Lat Den Ratte Komma In(Let the Right One In)』. 이 제목은,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게 해 줘’라고 허락을 구하는 뱀파이어의 언어를 일컫는다고 한다. 과연, 영화에서 이엘리는 “들어가도 되니?”라며, 초대를 원한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집에 들어가는 것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인간의 초대 없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엘리의 그 하소연은, 우리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오스칼의 머뭇거림으로 이엘리는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스칼은 이내 이엘리를 안아준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장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관습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 자체로 신선하고 우리네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타고난, 이엘리는 소수이며 약자였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상상 속에서만 자신의 복수를 하는 오스칼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연대 혹은 사랑에서 나는 어떤 소수자의 연대를 경험했다면 오버일까.


내 마음을 아스라하게 했던 것은, 쾌락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피를 빨아야만 하는 생계형 뱀파이어, 이엘리의 존재였다. 특히 먹잇감(오스칼)을 앞에 놓고서도 침을 꿀꺽 삼키며, 꾹꾹 자신의 본성을 눌러대는 그 눈빛.


영화는, 뱀파이어의 존재로 인한 공포가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분명히 사랑. 열두 살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사랑은 못내, 그렇게 불쑥 다가온다. 외려 그들은 섹시하기까지 하다. 새벽녘, 창문을 열고 오스칼의 방에 찾아온 이엘리가 오스칼의 뒤에서 안아줄 때, 나는 그만 훅~하고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어떤 성인들의 것보다 섹시하였기에.

      

한편으로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 『렛미인』은 좀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적 각색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불분명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이엘리의 아버지 느낌을 주는 하칸이 그렇고, 이엘리나 오스칼 아버지의 섹슈얼리티 등에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알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된다!)  


지난 4일 서울 이화여대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한국어판 책 출간기념으로 <렛미인>을 다시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이동진과 함께 하는 <렛미인> 특별 상영회’. 처음이건, 아니건, <렛미인>을 보고 훅~ 갔던 사람들이 있었고, ‘내 귀에 캔디’ 이동진 기자(이동진닷컴)와 나눈 대화의 시간. 아직, 보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일단 보고나서 이야기하자. 책이든 영화든. 경고하자면, 훅~ 갈지 모른다. 조심하시라.


이동진 기자에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렛미인>


사진 제공: YES24 hohoazime™ 님


- <렛미인>에 대해, ‘피와 눈물의 연금술’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표현은 짜내서 나오기보다 머리에 떠오르는 경우다. 소설(원작)과 이 영화의 가장 다른 점이 잎을 떨군 겨울의 문장이다. 소설은 시적이라기보다 단아한 산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은 건, 다시 봐도 느끼는 게, 영화의 리듬이 정말 좋다. 좋은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그래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숏과 숏, 신과 신이 모이는 게 연금술 같다. 피와 눈물을 재료 삼아 만든 연금술 같은 영화다.


- 이 영화의 미덕과 문학의 장점은 뭔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서 영역으로 된 것을 읽을까 하다가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어로 된) 책이 나와서 추천사를 썼다. 내용적으로 영화에 수많은 함의가 있겠지만, 사랑 얘기로 봤다. 소설은 사랑 얘기도 많지만 성장소설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화가 특히 좋았던 것은, 동화와 호러를 접목하는 방식이 좋았다. 대개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잘 맞는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도 호러라고 생각하는데, 슬픔 감성이 있잖나. 그림형제 우화 등의 원전을 보면 끔직하다. 동화세계도 따져보면 끔직한 게 많다. 살인, 식인 등의 모티브도 많고.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을 봐도 알 수 있잖나.


어린이 개념이 확립된 것이 200~300년 전, 즉 근대 이전이다. 그때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봤다. 순수하고 악을 가려준다는 관념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호러와 동화는 잘 맞는다. 영화에서도 (오스칼이 이엘리를) 초대해 주지 않자, (이엘리가) 피를 흘리는 장면은 무섭기도 하면서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나. 그런 게 이 영화에서 잘 묘사돼 있다.



- 소설은 어떻게 봤나.


소설은 되게 재밌게 봤다. 기괴한 상상력이 있고, 책을 읽게 만드는 문체의 힘이 있다. 이런 뱀파이어 소설은 없었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영화 속에 나온) 암시적인 표현을 다 알려준다는 점이다. 가령, 오스칼의 아버지가 동성애자인 것이 감은 잡히지만, 정확하게 알려주진 않지만, 소설에서는 이를 알려준다.


감독이 원작의 섹슈얼리티를 잘 발라냈다고 본다. 또 원작에서 중요한 캐릭터가 영화에선 나오질 않는데, 책에서 제일 재밌는 것 중의 하나는 호칸이라는 캐릭터다. 책에서는 선생이고 소년성애애호증 환자다. 공중화장실에서 12살 소년을 사기도 하고. 그런데 이 캐릭터가 선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갈구하는 입체적인 면이 있다.


이엘리도 소설에는 이전 이름이 엘리아스이고 남자임을 알려준다. 영화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나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책은 이야기 고리를 속 시원히 열어주는 측면이 있다. 물론, 90%는 속이 시원하고 10% 정도는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웃음) 어쨌든, 소설은 소설대로 좋고, 영화는 영화대로 좋다. 감독이 각색을 참 잘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에 들어가 있는 이엘리가 모르스 부호를 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기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아주 영화적인 각색이다. 모르스 부호는 스페인어로 PUSS인데, ‘가벼운 키스’라는 뜻이다. 아주 앙큼하다. 조그만 놈들이. (웃음) (이걸 보고 써 먹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그걸 써 먹는 분들은 많을 것 같지 않다. 열 다섯 밑으로 써야지.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쓰면 닭살이다. (웃음)



-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면.


첫째는, 안데르센의 동화인데, 어릴 때 집에 계몽사 전집이 있었다. ‘하이얀 눈의 여왕’이라고. 안데르센 동화가 물론 대부분 유명했지만, 이건 상대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동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순간, 그 동화를 본 느낌이 확 떠올랐다. 내용은 다르다. 동화는 <나니아 연대기>랑 차라리 더 비슷한데, 이상하게 생각이 났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하이얀 눈의 나라에서…’라고 썼는데, 사실 어법이 틀렸지 않나. ‘하이얀’이 아니고 ‘하얀’이 돼야 하는데. 어릴 때, 본 ‘하이얀 눈의 여왕’ 때문에 그렇게 썼다.


둘째, 지금은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릴 때는 무서워했다. 전설의 고향이 특히 무서웠는데, 어느 해 겨울, 초등학교 4~5학년 때인가, 제목이 <설녀>라고 있었다. 귀신인데 사람을 해치고 그랬다. 그렇게 무서웠다. 이걸 보면서 <설녀>가 생각났다.


셋째, 이 영화의 첫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먼지처럼 날리는 눈. 그러다 오스칼이 나오게 되지. 보통 눈 올 때 소리가 나지 않잖나. 김광균의 시, ‘설야’에 보면,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릴 때도 (이 구절이)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눈이 올 때 의태어로 ‘펑펑’이나 ‘펄펄’을 쓰잖나. 이 영화에선 절대 펑펑이 아니고 펄펄이라고 생각했다. 어감 차이 대단히 크고, 펄펄은 왠지 서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눈 내림의 광경이 가장 좋았다. 리뷰의 첫 머리에서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쓴 이유가 그것이다.


- 리뷰를 쓸 때, 한 번 보고 쓰는데, 메모를 하나. 그리고 본인이 쓴 것에 확신을 하나. 


확신은 없다. 다만 영화에서 설득된 내 감정이 있을 뿐이다. 어떤 영화에 매혹당하거나 싫을 때, 곱씹어보는 방식으로 리뷰를 쓴다. 사후에 생각하는 거지. 감정은 리얼하지만, 진실은 확률로만 존재한다. 65%, 87%의 진실은 있어도, 100%의 진실은 없다고 본다.


리뷰를 쓸 때, 일단 메모를 한다. 평생 버릇 같은 거고.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메모를 세게 한다. 화면을 보면서 써서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 볼펜이 다 돼서 긁은 흔적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영화를 대략 5000~8000편을 본 것 같다. 영화도 그 정도 보면 모든 영화의 패턴이나 언어가 보인다. 아주 잘 본 영화는 숏이나 신의 구성도 생각이 나고. 일반인들은 이런 것까지는 기억을 잘 못하지만, 직업적으로 훈련이 돼 있으면 이도 가능하다. 나도 모르는 새, 단련이 된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보고도 리뷰를 쓸 수 있는 것 같다.


사진 제공: YES24 hohoazime™ 님


- 영화를 꽤 많이 봤는데, 10편 중 몇 편 정도나 감동을 받나.


사실 안 좋은 영화가 좋은 영화보다 많다. 직업적 후각도 있는데, 후질 것 같은 감이 들면 핑계를 대고 안 간다. 일부러 일을 만드는 거지. (웃음) 내 별점이 후하다고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그건 별점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안 보기 때문이다.


직업적 매너리즘이 없다고는 얘기 못한다. 그렇지만 영화를 봐서 행복한 경우도 많다. 최근 <걸어도 걸어도>와 같은 영화들. 휴가를 가면 영화를 한 편도 안 본다. 비행기를 타도 기내 영화는 기를 쓰고 보지 않는다. 악착 같이 자거나 책을 본다. (웃음) 휴가 때 영화를 안 봐서 행복하다. 1년에 51주는 영화를 보는데, 한 주만큼은 영화의 신도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웃음)


- 다른 영화에서도 <렛미인>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북구 영화의 성장 영화가 참 좋다.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정복자 펠레> 같은 영화들. 특히 <정복자 펠레>에서 떠날 때의 눈 장면이나 부감이 참 좋다. 북구 영화에서 비 냄새나 나거나 습하고 우울한데, 스코틀랜드나 아이슬랜드 영화도 그렇다. 프레드릭 토드 프레드릭슨 감독(아일랜드)의 영화를 보면 이런 느낌들이 난다.


-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는 책도 냈는데, 스웨덴에도 관심이 있나.


작년까지 4년 간 여행을 갔다. 올해는 제반 여건상 시리즈를 안 하고 있다. 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고 이런저런 사정이 생겼다. 제일 안타까운 게, <렛미인>과 <더 폴>이다. 시리즈를 계속 했다면 꼭 갔을 거다. 11월에 책이 한권 나올 예정인데, 이것도 여행 책이다.


소설가 김중혁 씨가 씨네21에 연재를 하는 게 있는데, <렛미인> 촬영지를 갔다 왔더라.(주. <뱀파이어가 덮쳤던 곳이 여기야?>) 그런데, 그걸 보고 웃었다. 여행을 잘못 한 것이다. 영화는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 거기서 찍지 않았다. 설정 샷만 찍고, 루엘라라고 스웨덴 북쪽에서 찍었다. 소설가 출생지가 블라케베리인데, 영화 배경에 맞는 곳을 찾다보니 루엘라에서 찍은 거다. <카사블랑카>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찍은 것이 아니고, LA에서 찍었다. 극 중 장소를 어디라고 말해놓고 실제 찍는 곳이 다른 것도 비일비재하다. 시리즈를 다시 하게 된다면 루엘라에 꼭 갈 거다.



- 오스칼이 참 착해 보이고, 도덕적인 아이 같은데, 어떻게 흡혈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파워 오브 러브’ 아니겠나. (웃음) 영화를 볼 때, 사랑하는 감정을 이엘리에게 이입했다. 사랑도 처음에는 인간 본성을 따라가잖나. 그런데 다음 단계로 고양될 때는, 본성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이엘 리가 피를 보고 햝아 먹는 것을 보고, 이엘 리가 피를 갈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흡혈귀인데도, 오스칼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본성을 배반하는 것 아니겠나. 영화에 숭고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먹잇감(오스칼)이 있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이엘리도 본성을 배반한 것이다.

 


끝난 뒤,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뱀파이어와 나눈 사랑에 매혹된 밤. 이엘리를 만날 수 있다면, 내 피를 빨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소녀나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장 기차표를 끊을 수도 있고, 가방을 준비할 수도 있다. 열두 살(들)에게 보고 들은 사랑이 꽤나 인상 깊었나보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사랑은 그런 거다. 너에게 들어가고 싶은 것. 그리하여 다시 한번,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들어가게 해 줘...”


[예스24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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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2009 폐막작,

두 편의 단편, <남매의 집>과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감상.

공통점이라면, 주인공을 감싸주고 안아줄 수 있는 존재의 부재.

그들은 어떻게든 '사회적' 고아들이다. 우리의 지금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닿을 수 없는 곳(김재원 감독)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이 펼쳐진다. 엄마와 아들딸로 구성된 가족은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스무 살 진섭이다.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엄마와 다섯 살 동생. 아버지는 없다. 10여 년 전 가족을 버리고(어떤 이유든 있었겠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나갔다. 

새벽 전단지를 돌리는 것부터 주유소 일을 하면서 진섭은 힘겨운 스무 살을 버티고 있다. 그 고단함은 그의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무 살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감, 청춘의 활기라곤 없다. 친구와 시덥잖게 농담따먹기를 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랄까.   

그런 진섭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온다. 병무청을 찾아 생계형 면제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 아픈 엄마의 진단서를 떼오란다. 검진비용만 백만원이 넘는 거금이지만, 어떻게든 떼야만 한다. 병원은 돈 없는 자에게 냉담하고 어떤 사정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환자의 병은 곧 돈으로 치환되는 기제일뿐.

친구에게 돈을 빌려 가까스로 처리하지만, 서류상 남아 있는 아버지가 문제다. 없는 아버지까지 찾아내란다. 서류상으로 처리가 안 된단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없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국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얼떨결에 '없는' 아버지를 죽이라고까지 말하는 병무청의 무심함. 아버지를 찾아나선 진섭 앞에 병든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진섭의 선택은.

왜, 제목이 '닿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국가는 아무 것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는 이제, 그냥 기업이니까. 대통령이 CEO인 세상에 말이다. 묻고 싶다. 비가 오면 피하게 해주는, 감싸고 위로하는 존재는, 그저 힘 없는 개인들의 몫일 뿐이냐. 진섭의 막막한 눈빛이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남매의 집(조성희 감독)

한 눈에 보기에도 가난을 등에 업은 반 지하의 집. 아버지, 어머니도 없다. 남매만 덩그러니 있는 집. 동생은 오빠에게 한복도 자랑하고 싶지만, 오빠는 빨간펜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숙제를 마쳐야 한다. 과연 빨간펜 선생님이 올까 싶지만.

언제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줘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만 남아 있다. 남매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반지하의 집에서만 모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감언이설로 남매를 꼬드긴다. 물만 먹겠다는 조건으로 괴한들은, 들이닥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괴한 외계적 행동들.

‘알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하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소년은 그 기괴한 일들이 꿈같다. 고립에서 오는 인간의식이 어떻게 똬리를 틀고 무한 증식하는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눈에는 고아처럼 내버려진 남매의 무기력함이 약탈자를 맞이한 지금 우리의 모습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고아들의 시절, 부모 없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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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어디든,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잡히지 말고 가주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나는 그렇게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거의 스크린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영병이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인 범죄자였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들처럼, 그네들이 서 있는 이곳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억지로 끼워맞추면, 그것은 스톡홀름신드롬이 아녔을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발적) 인질이었고, 그들에게 호감과 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탈영이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것은 사회적 알레고리였다. 그들이 탈주를 시도한 곳은 군대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그러니, 감정이입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이유는 분명하다. 박민재 상병(진이한)은, 속사정은 군대 간부의 성추행을 견디다 못해, 명분상으론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함이라는. 강재훈 일병(이영훈)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말도 안되는 이유로 상관은 재훈에게 휴가를 보내지 않았다.)  거기에 한 명 더. 소영(소유진). 재훈이 군대 가기 전, 할인점에서 같이 일했던 인연. 자수를 권유하던 그녀는, 어쩐 이유에선지 그들의 탈주를 돕는 공범이 된다. 역시나 스톡홀름신드롬?


그렇게 세 명을 축으로 로드탈주무비는 본격화된다. 그들은 6일 동안 갖가지 위기와 위협, 예기치 않은 살인 등을 거친다. 승용차는 개장수트럭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모터바이크에 몸을 싣는다. 도망자의 불안감이 내부적으로 충돌을 불러오고 갈등도 빚지만, 그들은 어차피 더 이상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존재 아니던가. 이미 경계 밖으로 내몰린 존재의 선택은 두 가지다. 죽느냐, 떠나느냐.

감정은 고조되고, 인질이 된 나는 어느 순간 그들이 탈영이 아닌 탈주를 꾀하고 있다고 동화된다. 그래서 '탈영'이 아닌 '탈주'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아마도 <탈영>이었다면, 나는 그저 군대라는 범주에서만 그들의 행위를 읽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모양새는 군대를 탈출한 이들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 <탈주>는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무자비한 국가와 사회에 내몰린 자들의 이야기다.

 

저항은 딱 그만큼이다. 탈주 성공을 간절하게 바랐건만, 집단적 공포감으로 무장한 국가권력의 처벌은 언제나 냉혹하다. 내일 따윈 없어, 탈주.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감정의 파고. 그 안타까움, 그 애처로움, 그 무력함. 여기만 아니면 된다고 했던, 그들의 마음이 나를 후벼판다. 털썩 주저앉아 울고 싶도록 만든 마지막 장면.

그 결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부 함께 탈주를 시도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임병이 그러지 않았나. "어디에 있든 지옥"이라고. 집으로 가든, 군대에 있든,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로 가기만 하면 달라졌을까. 이 영화, 마음을 참으로 서걱거리게 만든다. 꼭 개봉하라. 개봉촉구!!!

P.S...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무장탈영' 소식이 나면, 나는 그들이 전하는 '이유'에 대해 늘 불신한다.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단순화시킨다.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재단한다. 공포감을 조장하지. 그 이유는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러면 군대가 쓰나. 존립기반이 흔들거리는 걸. 군대? 조까라 마이싱! 참, 소유진 다시 봤다. 서프라이즈~ 영화든, 소유진이든, 예기치 않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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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요일(10일) 저녁부터 달려서,
이제 18일이면 폐막을 앞두고 있는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의 풍경.

 그러면 어떠리.
여전히 서독제는 즐거운 파뤼~

 치고 달리는 거지, 뭐.
다 뎀벼~ 뭐.


개막작이었던 <원 나잇 스탠드>의 포스터를 보면, 아직도 하악하악.
그 잠들 수 없던 격정의 밤이 떠올라, 하악하악.
2009/12/13 - [메종드 쭌/무비일락] - 폭풍간지의 밤, 하악하악
2009/12/13 - [메종드 쭌/무비일락] - 그 원 나잇 스탠드, 짜릿했냐고?



늘 사람들이 모이는 2층의 부스.
치고 달리기 전, 쉬어가는 곳이랄까.

갈 곳 없는 중생들이나, 갈 곳 있는 아해들 모두모두 오시라~


 

이 많은 감독들이라니.
나도 몇몇 분들은 현장에서 뵈었다네~
이 중 누군가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어떤 인연이 됐든.

그날을 기다려요~ 감독님들~
(혹시 출연도 가능할까요? ^^; 행인3이라도..ㅎ)



서독제는 한편으로 만남의 장소.
사람들은 만나고 인사하고 이야길 나눈다.

그래요, 우리 모두 만나면 인사해요~ 방가방가~
물론 가벼운 눈웃음으로도 충분해요~



오늘(17일), 냉동고에 한국을 꾸깃꾸깃 집어 넣은 것 같은 추위.
그럼에도, 매표소 앞 긴 줄이 늘어선 것을 보고 뜨악~
나도 5분을 줄서서 기다린 끝에 표를 받았다.

'추위야, 물럿거라~'고 외치는 서독제?
혹은 추위 따윈 필요없어, 서독제.(서독제2010 카피로 어때효?^^;)

 

영화가 곧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
북적이던 사람들은 어느덧 공간이동을 하고.

아, 서독제의 밤은 이렇게 깊어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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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도 며칠 전, '이리'를 다녀왔다.

정확하게는 '익산'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리'라고 쓴다. 읽을 때는 '익산'이라고 읽을지도 모르겠다. 이리라고 쓰고, 익산이라고 읽는다? 며칠 후, 내가 <이리>를 볼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애초 이 영화는 연작(<중경>과 함께)이라고 진즉에 알고 있었다.지난해 개봉 당시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실행의 부재로 결국 접하지 못했던 터. 두 편 모두.

내가 발 디뎠던 이리는, 단편적인 인상만 말하라면, 죽어있는 소도시 같았다. 신시가지라고 건물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나, 이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울을 동경하는 듯한 그 뉘앙스는 불편했다. 신시가지의 그 볼품없는 간판들이 사람들의 미적 감수성을 해치긴 마찬가지고. 서울을 욕망하는, 획일화되려는 풍경. 이방인이라서 그랬겠지만, 과연 이리(에 삶의 터전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이리> 상영 전, 조영각 서독제 집행위원장이 영화와 감독에 대한 소개를 했다.

모르겠다. <이리>를 보면서 지금 시대의 알레고리 같다고 생각한 것은 왜였을까. 30년 전 이리역 폭발사고를 소재로 했다는 영화. 30년 후 이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도 상처를 치유하진 못했다. 이리역 폭발에 따른 상흔이 30년 후에도 지속되는 건, 아마 3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시대적 징후 때문일지도. 박정희와 이명박. 물론, 그것은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당대의 시대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니까.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뜻이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극 중 태웅(엄태웅)은 한 번도 웃지 않는다. 정신줄을 약간 놓고 사는 누이, 진서(윤진서)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못 받아도, 윤간을 당해도 별다른 저항도 없고 덤덤하다. 물론 그것이 그의 마음까지 대변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태웅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가끔 화를 내고 패대기를 치지만, 그것 뿐이다. 근본적인 치유까지 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끔 진서가 삶의 큰 짐처럼 느껴지는지 죽이고 싶은 충동을 드러낸다.

롱테이크는 길고, 인물들의 감정을 끌고 가야하는 것이, 참으로 무겁다. 신산하기 그지없는 삶의 풍경 앞에 관객인 나는 견뎌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감독이 우리에게 건네는 속삭임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지, 버티고 견딜 것. 내 안의 이명박에게 휘둘리지 말 것. 이명박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이명박을 닮은 우리들에게 건네는 토닥거림.



<중경>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리>에는 <중경>이 필요한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라도. 바다로 갔던, 진서가 서툰 중국어를 읊고 있다. 한 중국어 선생을 향해. 아마도 그것은 연결고리이리라.

익산이 아닌 이리여야 하는 이유.

내가 이리라고 쓰고 싶었던 이유.

당신은 알겠지?


아 참, 김동원 감독님과 한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봐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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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2003년 12월9일.

요즘과 같은 강추위가 강타하던 그날,
혜화동 부근에서 한 사람이 추위에 떨다 숨을 거뒀다.
그야말로, 동사. 누구도 챙기지 않은 혹은 외면한 죽음.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2005년 김동원 감독님(<송환> <상계동 올림픽> 등)께서 국가인권위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다섯개의 시선> 가운데 <종로, 겨울>을 연출하신단 소식과 함께였다.


오늘 모진 추위, 알코올 유혹을 뿌리치고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를 찾았다.
세상엔 알코올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 (음, 인간이 초큼 학실히 달라졌다;;)

영화는 장률 감독님의 <이리>.

그것 자체로도 뿌듯했는데, 상영 직전에 꺄아아아아아아~ 소릴 지를 뻔 했다.

내 앞앞자리에 김동원 감독님이 성큼 앉으시는 것 아닌가!!!!!!!!!!!!!!

역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3년 전 뵀을 때와 함께, '아, 이 즈음이었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그 사람, 고 김원섭 씨.
우리의 무관심으로 차디찬 고국 땅에서 동사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를 본 뒤, 냉큼 김동원 감독님께 꾸벅, 인사했다.^.^
당연히 감독님은 날 기억하지 못했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고,
사진을 부탁드렸다.

언제 다음 작품을, 내년에는 볼 수 있냐는 질문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확답을 못하시던 감독님.
"괜찮습니다. 계속 기다릴 수 있습니다." (-> 내 마음 속)

간단히 감독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바깥 무시무시한 추위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종로통을 거니면서,
6년 전 길바닥에 쓰러져 살을 에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을,
무엇보다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마음 깊이 후벼파는 추위에 더욱 쓰라렸을,
김원섭 씨를 떠올렸다.

흥청망청 종로의 밤은 깊어갔고,
나의 마음에도 밤이 내렸다.
오늘 나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스치듯 지나갔는가.
봉석아, 오늘 너의 아픔을 충분히 위로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외로웠을 김원섭 씨,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김동원 감독님을 만나뵀던 3년 전의 인터뷰를 꺼냈다.


"동북공정엔 흥분하면서 그 땅에 사는 동포엔 왜?..."

2년전 세밑을 앞두고 흥청거리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골목통에서 한 조선족 동포가 동사한 채로 발견됐다. 경찰 지구대 사무실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장소였다.

고(故)김원섭씨. 그 날의 사건을 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법무부의 장기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농성을 해오던 중국동포가 체불 임금을 받으러 나간 뒤 하루만인 9일 새벽 서울 도심 거리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이 중국 동포는 숨지기 전에 112와 119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김씨에게 고국의 품은 차가웠다. '잘 살아보겠다'며 조국을 찾아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김씨에게 고국의 기업은 임금을 체불했다. 정부는 장기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여 김씨를 강제추방 대상에 넣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 속에서 헤매던 그가 십여 차례 이상 119,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돼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불법체류로 체불의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한 재중동포는 차디찬 골목바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죽어갔다. 그는 '동포'였지만 '우리 안의 타자(他者)'였다. 차별과 소외가 내재화한 사회. 그런 엄혹한 현실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어떻게 보면 김원섭씨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한 셈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 이번에는 동사한 조선족의 흔적을 좇았다.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종로, 겨울'을 연출한 우리의 어떤 시선이 조선족 동포를 동사하게 만들었는지, 왜 그는 죽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짧지만 굵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감독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상황들을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게끔 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다음은 29일 서울 신대방동에 위치한 푸른영상에서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  이번 영화의 참여 제안은 언제 받았으며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찍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지난해 8월 인권위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제안을 받고 상계동 철거민(<상계동 올림픽>)이나 비전향장기수(<송환>) 뒷얘기 등 다른 것들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고 김원섭씨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맺혀 있었고 이를 풀고 싶었다.

또 조선족동포를 바라보거나 우리의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에 이 문제를 택했다. 우리는 만주 땅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그 땅에 있는 동포한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이쪽 동포들은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다. 재외동포법에서도 미국과 유럽과 같은 제1세계 동포보다 한국에서의 권리를 차별받고 있다.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 처음 고 김원섭씨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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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물론, 낚시질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낚시질로 끝나질 않았으면 좋겠다. 

즉 어느날, 그것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2009를 유영하고 있는 지금.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들과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나는 나름 그것을 즐기고 있다.  

온전하게 거기에만 에너지를 쏟을 순 없지만.

 

그런 와중에, 씨네21에서 오다기리 조의 인터뷰를 접했다. 

알다시피, 나의 빛나는 완소배우.

 

그는 최근 대학생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는 그런 일환으로 이뤄졌는데,

그는 역시나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 줄 아는 배우다.

 

내 마음을 흔든 그의 발언은 이거다.

"벌써 10년 정도 일하고 있는데 일하다보면 생각할 게 많다.

내 요구뿐만 아니라 이 시대, 사회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느 배우와 다른, 좀더 특별한 포스와 아우라를 갖고 있다.

예술가연 한다거나  스타성을 좀더 발휘한다는 그런 뜻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에게 '사회적(성) 배우'라고 레떼르를 붙이고 싶진 않다.

 

그는, 사회적 발언과 행동에 적극 나서는 조지 클루니와도 또 다르다.  

물론 나는 스타 혹은 배우가,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만질 수 없으나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스타 혹은 배우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니까.

연기 등을 통해서 주는 즐거움도 빠질 순 없겠지.

 

그럼에도, 나는 오다기리 조가 주는 마음의 환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내가 사는 이 땅에도 오다기리 조와 같은 배우(스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우리 사는 이 세계를 염려하는, 시대와 사회가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오다기리는 인터뷰를 통해,

한국영화계의 제안이 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대학생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영화제쪽에서 제안한 결과다. 아마 해당영화제쪽도 큰 기대는 않고 제안한 것이리라.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의 인디영화가 그를 영화에 출연시키거나,

서독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시키는 것은 어떨까. 

물론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나는 '오다기리 조'.

관객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벅찬 일인가.

서독제와 궁합도 잘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떤까.

 

가까우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이뤄진다면,

나는 더덩실 춤이라도 출테오. 

 

그렇게, 오다기리 조를 만나고 싶다.

 

인터뷰 한 대목을  잠시 인용하자면.

- 이번 영화제 참가뿐 아니라 부쩍 한국에서의 활동이 많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 이유는 내가 더 궁금하다. (웃음) 생각해보니 타이밍이 아닐까 싶다. 최근 들어 일본영화계에 비해서 한국영화계가 더 발전했다. 한국은 작품성있는 영화가 꾸준히 생산되는 곳이고, 좋은 감독도 많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세상 모든 아들들의 엄니 …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미시적인 반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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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독제2009의 반가운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필리핀 독립영화 특별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이면서,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지는 나라. 필리핀을 다녀온(주로 신혼여행) 친구들의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필리핀 네그로스섬 농민들이 유기농으로 재배한 공정무역 설탕 '마스코바도'를 종종 접하기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나는 이 미지의 나라산 영화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인디펜던시아>.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나본데, 영화평론가인 허문영의 이야기도 나를 솔깃하게 만들었으니까. (☞ 여기,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다

글쎄, 이 영화 <인디펜던시아>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적 신세계였다. 실험영화도 아닌 것이, 놀라움과 부담감을 한꺼번에 안겨준. 사실 이 영활 어떻게 말해야할지, 아직 모르겠다. 

 

 영화 시작 전, 감독과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감독 라야 마틴은 스물 다섯의 청년이라고 했다. 1984년생.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볼수록 나는 그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가 밟혔다. 기록되지 못한 필리핀 식민역사를 삼부작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젊은 감독. <인디펜던시아>는 그 두 번째 결과물이라는데, 그런 의도도 다소 놀랍지만, 그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메우는 상상력과 영화적 표현은 더욱 놀랍다. 난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 덕분에 필리핀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역사도 알게 됐다. 이후에도 미국과 일본의 우산 아래 식민의 핍박을 받았다는 그 역사.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거대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런 난장판 같은 시대의 한 자락에 위치한 삼대가 숲 속에서 일구는 삶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전부다.

별 다른 대사도 없다. 숲에 버려진 움막을 개조해서 사는 어머니와 아들. 다른 것보다 "서로를 믿을 것"을 강조했을 뿐. 그냥 먹고 자고 살아간다. 미군에게 강간당한 여인이 새 식구가 되고, 어머니가 죽고 아들이 태어나 흘러가는 세월.

시종일관 흑백으로 진행되면서 무성영화와 뉴스 릴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예술작품 같다.  그것은 아름다움이고, 그에 삽입된 숲 속의 효과음도 이에 조응한다. 빛이 만드는 몽타주도 때론 황홀하다. 이것이 나중에는 비극의 전조처럼 느껴지긴 해도.  

아직도 궁금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군에 쫓겨 절벽에 도달한 아이의 옷이 빨간색으로 변한 것은 무엇을 의도했기 때문이었을까. 흑백에서 벗어난 그 붉은 강렬함. 삼대에 걸친 한 가족사를 통해 식민시대를 압축한 스물 다섯 감독의 재능이 놀라울 뿐이다.

이야기에 몰입한다면 심심하기 그지 없겠다. 나도 잠깐 졸았으니까. 과히 당혹스러운 영화다. 라야 마틴은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 영화를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원했다"고 말했단다. 손발이 오그라들고야 말 발언이지만, 허문영 평론가는 영화를 보고 그의 말이 주문처럼 머리에 맴돈다고 했다. 그리고선 이 영화는 순결한 순교의 영화라고 표현을 했다.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갖다 붙일 필요는 없겠다. 영화는 선동이나 선전도 아니니까.  장담하건대, <인디펜던시아>는 극장에 걸리거나 DVD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더 기억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별점을 세 개에 택한 것은, 어쩔 수없는 절충안이었다. 별 다섯과 하나 사이를 오간, 당황스러움의 절충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아직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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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탈출? 아무 것도 아니다 : 멀쩡하게 잘 다니던, 그것도 통념상 버젓한 직장(이라고 쓰고, 감옥이라고 읽는다)을 나오는 것은, 실은 대단한 용기는 아니다. 혹자는 우와~하며 부러움 혹은 놀라움을 표하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것은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를 버리면, 다른 하나를 얻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도 된다. "이른바 ‘안전빵’이라는 공무원 생활을 버리니까 자유를 얻은 대신 가난이 찾아왔어요"라고 말한 ≪깐깐한 독서본능≫저자이자 영세 축산업자 윤미화(파란여우) 씨. 버리고 얻어본 이라면, 윤미화 씨의 말 중에 '자유'와 '가난' 대신 자신에게 적합한 다른 말을 넣으면 되겠다.  

교사였던 지완이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들겠다고 나선 것도 그렇다.  물론, 그렇게 영화판에 뛰어들면 뚝딱 영화가 만들어질줄 알았다는, 현실 모르는 나이브한 생각을 했다지만. 영화판을 대체 뭘로 본 거야. 선생이 저렇게 나이브해도 되는 거야? 라는 짧은 생각도 스쳤지만, 어쨌든.

윤경화 씨의 말을 빌자면, 지완은 '영화'를 얻은 대신 '정신질환'이 찾아온 격이랄까. 정신질환이라고 표현했지만, 액면 그대로의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향한 그의 사투가, 아마 그의 정신을 돌아버리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썼다. 사실 꼭 얻은 것도 아니고, 꼭 찾아온 것도 아니다. 감옥을 탈출했다고 대단하게 볼 것도 없고, 감옥에 붙어있다고 불쌍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대로.

나는 왜 아직도 영화에 출연 못하고 있는가 : <레인보우>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에 가깝다. 즉, 메타영화. 사표를 쓰고 5년이 넘도록 입봉을 못하고 있는 지완을 보자니, 문득 떠오른 나의 한 친구. 얼마 전에 술을 한 꽐라 걸치고 밤 늦게 내게 전화했던 영화하는 친구. 녀석도 결혼한 지 이제 반년, 알콩달콩 행복하지만(아직은 그럴 때지, 암! 끄덕끄덕. 결혼도 못 해본 내가 어떻게?ㅋㅋ), 꽐라했던 그날의 전화통화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애가 잔뜩 묻었다.

핵심은 그거다. 십 수 년째 영화에 매달리고 있지만, 아직 입봉을 못한 친구. 영화는 십 수 편이 엎어졌고, 이젠 현장에서도 약간 떨어져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면서 지탱하고 있지만, 언제 입봉할지도 몰라, 가장으로의 책임감은 점점 무거워져. 물론 제수씨는 아직 녀석을 몰아붙이지 않고 있었고, 생계는 대부분 그녀가 책임지고 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언제 제수씨가 돌변할지, 녀석의 영화꿈은 언제나 이뤄질지, 모든 것은 불투명하다. 녀석은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 참, 녀석의 영화를 기다리는 이유가 나도 있다. 그 영화에 나도 출연시켜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주연은 아니고, 행인.^^; 아직 내가, 온갖 캐스팅 제의(?)에도 불구,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는 이유다. 녀석의 영화에 첫 출연을 하고 싶어서? 푸하하. 쪽 팔리는구만. ^^;; 그래도 나는 녀석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영화가 뭐기에 그렇게 붙잡고 있느냐고. 영화를 사랑하기에.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말, 나는 믿지 않으니까.

루저? 위너? 행인! : 아들과 남편을 둔 30대 후반의 여성, 지완에게 영화계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시나리오만 쓰고 엎기를 수차례. 노트북에서 개미가 기어다니는 환영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PD의 재촉을 받으며 상업성과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지완. 집에서 남편은 언제 영화 하느냐고 재촉하고, 밴드를 하겠다는 아들은, 사춘기다. 아, 어쩌란 말이냐.

지완은 버티고 견딘다. 음악영화를 하겠다고 취재에 나섰다가 한 페스티벌에서 발견한 악보에서 그녀는 또 다른 재미를 맛본다. 물론 그렇다고 현실의 영화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옆 방의 별 볼일 없이 빈둥대는 감독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도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자신은 죽도록 고생만 한다. 화를 내거나 분출하는 것도 없이 그저 묵묵히, 묵묵히.  

그렇다고 묵묵하게만 살 수 있나. 어느 날, 후배의 영화 현장에서 우연히 행인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되면서, 한 순간 폭발하고야 마는 지완. 뭔가 홀가분해진 것 같은 느낌. 진즉에 터졌으면 싶었는데... 아들이 묻는다. 엄마, 루저가 뭐야? 지완은 답한다. 잃을 게 더 없는 사람. 그럼 위너는? 더 이상 얻을 게 없는 사람. 그럼 엄마는? 엄마는 행인. 그냥 걸어가는 사람.

지완의 깨달음. 그냥 걸어가는 거다.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시스템에 갇혀 있지 말자. 반보 후퇴하고 일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한 거다. 지완이 언제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영화 만드는 것 자체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근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걸어나갈 테니까. 그녀는 행인이니까.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레인보우>.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 영화에 뜻을 둔 사람에겐 특히나 자신의 처지와 연동돼 어떤 정서적 울림이나 감흥이 더 와닿을 순 있겠다. 글쎄, 얼마 전 전화가 와서 하소연 한 친구가 아녔다면, 이 영화가 그렇게 와 닿았았을진 모르겠다. 물론 나도 행인이니까, 지완의 처지에 공감은 충분히 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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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일지 2. '원 나잇 스탠드', 과연 짜릿했는가.

사건개요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감독 마이크 피기스의 <원 나잇 스탠드>(1997)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스타샤 킨스키(카렌 역)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웨슬리 스나입스(맥스 역)의 상대역. 흑백의 인종적인 문제로 대뜸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난 관계 혹은 인연에 대한 이야기니까.

물론 전작, 라스베이거스에서 흐느적거리던 벤(니콜라스 케이지)의 발걸음을 따르고 싶게 만들던 그 정서적 울림은 덜했다. 그래도 하룻밤의 불장난이 불러온 관계망의 헝크러짐을 직조하는 기술은 마이크 피기스다움!

원 나잇 스탠드.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흔히 번역하는 이 단어도 사실은 삶의 우발성을 좀더 극적으로 강조한 표현, 아닐까. 삶은 많은 부분에서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우연에서 시작돼 불가해함으로 귀결된다. 무엇하나 우연이 아닌 것은 없다. 모든 만남은 우연이다. 아니 당신들 만남은 필연이고, 운명이라고? 조까라 마이싱. 그렇게 믿겠다면, 말릴 이윤 없겠지만, 어쨌든 조까라 마이싱.

우연이 우연을 불러 인연이 넓고 깊어지거나 단절 혹은 파국을 맛본다. 우연이 길어올린 인연이 세계를 넓혀주기도 하고, 더 좁은 세계에 갇히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우연은 그렇담, 삶이 주는 선물? 글쎄, 그건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삶을 직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뭐, 그건 곧 운이지. 운7기3, 아니 운9기1.

<원 나잇 스탠드>의 감독들, 왼쪽부터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

(사진은 서독제 홈피(www.siff.or.kr)에서~,

근데 어째 하나같이 포즈가 똑같을까. 왼손이 오른손 위에 올라간 것까지.

이것은 사회적으로 교육된 결과일까, 관습적으로 익힌 사회화의 결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진사의 요구였을까. ^^;;)


사건전개 : 서울독립영화제2009를 만난 것도, 개막식에 참석한 것도, 개막작 <원 나잇 스탠드>를 마주한 것도, 순전히 우연이다. 우연이 나를 낚은 거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천만에, 그건 아니다. 기1 정도를 불어넣었더니, 우연과 결합이 된 것? 더구나 개막작 이름 봐라, 봐라. 원 나잇 스탠드.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어떤가. 당신의 대뇌피질 안에 있는 측두엽은 코피를 쏟을지도 모를 일. 혹은 뇌하수체가 부신피질호르몬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어 엉뚱한 길로 인도할지도 모를 일. '아, 된장 난 코피가 왜 나지?'하고 시티헌터 같은 액션을 취하진 않나.

괜한 기대로 가슴이 벌렁벌렁. 서독제가 처음으로 기획·제작에 나서,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세 명의 감독이 뭔가 핑크빛 향연을 보여줄 것 같은 서툰 예감? 더구나 포스터 카피 봐라. 잠들 수 없는 격정의 밤. 후욱~ 후끈후끈. 아잉, 부끄러워라~ 세 명의 감독, 원 나잇 스탠드, 경험한 적 없다고 발뺌(?)들 하시는데, 영화 보는데 중요한 것 아니니까, 퉁.

참고로, 내 생애 가장 짜릿하고 아름다웠던 원 나잇 스탠드는, 알다시피 <비포 선라이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어떤 하루(들)) 유럽여행을 다녀왔고, 내겐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직 유럽여행의 로망을 포기하지 있는 나는, 그래 낭만소년! ^.^;;  


사건내용 :

Episode 1 (감독 민용근) - 라면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유

슬펐다. 술 펐다가 아니고. 그 모든 것은, 어쩌면 라면에서 비롯됐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를 꼬시기 위해 선수친 그, "라면 먹고 갈래요?". 눈이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한 청년은 매일 밤 빌라 복도의 계단에서 한 또래 여성의 집을 서성인다. 청진기로 집 안 소리도 듣고, 그녀가 버린 쓰레기를 가져가 그녀의 스타킹 등에서 훅~ 느낀다. 그러니까, 페티시즘. 

고등학교 시절, 그의 망막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눈에 낚인 청년. 이제는 소리와 냄새로만 그녀를 느껴야 하는 슬픔. 왜 놓지 못할까. 그것은 나중에 그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어쨌든 그는 막막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그녀 윗집의 한 여자. 역시 혼자다.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알고 싶은 전 남자친구를 철저히 외면하는, 잘 때도 선글라스와 함께 자는 그 여자. 늘 선글라스를 낄 수밖에 없는 어떤 아픔도 있다.

청년의 눈에 눈물을 고였다. 그대 눈에 고인 눈물이 짝사랑 그녀의 라면에 의한 것이라면, 그 눈물을 닦아 준 것은 윗집 여자의 라면. 청년이 선글라스까지 끼고 지팡이를 잡는 것까지, 다소간의 비약이고 작위적이었음에도, 그들이 섹스를 하면서 맞잡은 손은 슬프면서 다른 어떤 섹스신보다 에로틱했다. 슬픈 그 섹스. 청년의 눈빛은 왠지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고나.  

그 하룻밤 불장난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원 나잇 스탠드가 아닌가. 우연의 겹치기 출연. 라면이 만들어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Episode 2 (감독 이유림) - 수컷들에게

미스터리 스릴러는, 아니다.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주인공은 헷갈린다. 보는 사람도 맥을 놓치면 힘들어진다. 신혼부부지만, 아내는 남편의 섹스를 거부한다. 뭐? 정신이 좀더 성숙할 때까지 미루자고? 마침 후배 커플과 함께 산장에서 놀러간 상태였는데, 남편은 후배의 여자친구에게 끌린다. 더구나 집으로 출발하려는 아침, 후배 커플의 섹스를 본의 아니게 목격하고. 거참, 어쩌란 말이냐. 신이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이런 심정?

함의가 있다.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것도 원서로 된. 섹스를 기피하는 아내를 남편은 제 멋대로 짜맞추기 시작한다. [보봐리 부인] 군데군데 쓰인 어떤 글에서, 남편은 아내의 섹스편력을 마구마구 상상해낸다. 역시나 수컷의 상상력은 고작 침대에서만 발현된다. 여자가 다른 수컷과 뒹구는 것 이상은 상상하지 못하고, 그것을 질투하고 집착한다. 그러니, 과거를 묻는 수컷에게 부디 과거 따윈 말하지 마시라. 어떤 감언이설로 수컷이 꼬드겨도. 그것이 발설되는 순간, 수컷은 자가발전한다. 쾅~

그런데, 아쉬운 점이라면 좀 길다. 꿈과 현실 사이의 장막을 흐릿하게 한 것은 기교였겠지만, 그것이 다소 불편하게 한다. 물론 내가 제대로 못 쫓아가서 그렇겠지만, 이 영화, 친절하진 않다. 그것이 또한 매력이기도 하고. 그저 불장난도 못 치고 끝난 하룻밤의 꿈.

재미있는 건, 배우 정만식은 이번에도 정만식이다. <똥파리>에서도 만식이었던 그는, 이번에도 실명 출연한다. 이 다채로운 배우는, 어쩌면 만식이라는 이름에서 연기의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주목할만한 배우. 마침, 개막식에도 왔더라.


Episode 3 (감독 장훈) - 원 나잇 스탠드가 깨우는 편견

우선 반가운 얼굴. 방가방가~ 달시 파켓. 이 벽안의 영화평론가를 한국 영화의 주연으로 보게 될 줄이야. 상상, 못했다. 내면 연기까지는 몰라도, 표정 연기 괜찮고, 몸연기도 괜찮다. 발연기, 전혀 아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연기 괜찮은 외국인을 캐스팅했겠구나 싶겠지만, 그를 알고 본다면 더 재미날 영화. 더구나 극중의 역할도 뉴욕의 저명한 영화평론가닷. 권해효의 따박따박한 내레이션도 극중 몰입을 돕는다.

이 영화, 캐스팅처럼 유쾌하고 알싸하다. 원 나잇 스탠드하면 떠오르는 통념을 깨는 재미난 설정. 더구나 그 설정 속에 우리 안의 일상적 감정과 편견이 속속 드러난다. 뉴욕의 영화평론가가 한국에서 환상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바로, 대중목욕탕에서 때미는 것. 그러다보니 공중목욕탕 관리사 진영과 친해지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여자를 둘러싼 수컷들의 질투와 라이벌 의식이 드러나고, 친밀하고 애정 섞인 포즈에 동성애자로 오인하면서 드러나는 호모포비아. 너무도 다른 세계임에도, 우연이 만들어준 인연으로 함께 하는 그들. 원 나잇 스탠드가 꼭 성적 접촉을 뜻해야 한다는 규율 따위도 없다. 내 안의 편견을 버릴 것.


사건결론 : 그래서 짜릿했냐고? 홍콩갈 정도는 아니었대도, 이만하면 괜찮지 뭐. 붕가붕가~ ^.^ 우연은 그렇게, 세계를 넓혀준다고, 강조했잖아. <원 나잇 스탠드>와의 원 나잇 스탠드. 아주 쉽게 잊히진 않을거야. 그치? 원래 원 나잇 스탠드는 금방 잊어야 서로에게 좋은 거라던데. 어떻게 아냐고? 에이, 친구가 알려줬어~ 그나저나, 유럽에 다시 가고 싶네. 쩝. 꼭 사이가 좋지 않은 독일인 부부가 탄 열차 객실에 타야 할 텐데... 그리하여, 난 제시, 당신은 셀린느. 하하.

2009/12/13 - [메종드 쭌/무비일락] - 폭풍간지의 밤, 하악하악

2009/12/10 - [메종드 쭌/무비일락] - 오늘 나는 '원 나잇 스탠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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