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노래. 

눅눅한 피곤에 절은 이밤. 한없이 나를 안아주고 감싸준다. 

내 생일도 아니지만, 꼭 생일축하 받는 느낌까지.

기분이 참참참 좋아. 이 노래. 마음이 방실방실.


내가 사랑하는 당신(들)의 생일에, 꼭 이 노랠 불러주고 싶어.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생일 축하해.
정말이지, 콱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사랑스런 당신을 위해 말이야.  
 
얼마 전, 생일을 맞았던 내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도...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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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친구들 중에 나를 간혹 '준쉐이(혹은 준셍이)'라고 부르는 넘들이 있다.
당연히 영화(<냉정과 열정사이>)의 준세이처럼 간지나고 잘생겼기 때문이지.
라고.................................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첫사랑을 오매불망 잊지 못해 그녀를 품고 세월을 버티는 순정남이라서.
라고..................................해도 끔찍한 뻥이야. OTL

이유? 단순하다.
그저 내 이름 중에 '준'이 쏙 얼굴을 내밀기 때문이지.
간혹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생각난다. 내게도 있었던 아오이(들).
풋풋한 스무살 시절, 준세이와 10년 약속으로 손가락을 걸었던 여인.
5월25일 피렌체 두오모에서 해후하면서 옛사랑을 복원했던 준세이와 아오이.


어제 밤, TV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방영했다.
영상보다 음악이 더 도드라졌던, 
원작(책)보다 밀도와 질감이 미치지 못했던 영화를 다시 응시하면서,
이번에는, 준세이와 아오이보다 다른 인물들에 눈을 맞췄다.

운명(으로 포장된) 사랑을 위해 들러리를 서야 했던,
바퀴벌레 한쌍의 작당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메미와 마빈.
메미는 (아오이 없는) 준세이의 연인이었고,
마빈은 (준세이 없는) 아오이의 연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정작 마음은 저 멀리 가 있는 연인 때문에 가슴은 가슴대로 앓고,
눈물은 눈물대로 흘려야 했던 그네들.
단지,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두 주인공이 덧칠하는 옛사랑의 복원 때문에 동원됐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들이라고 왜 마음이 없겠는가. 사랑을 왜 지키고 싶지 않았겠나.
그럼에도 주목받지 못한 채 스크린 뒤로 물러서야 했던 그네들의 마음.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제목은,
주인공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아오이와 준세이가 복원하려는 사랑이 열정이라면,
그 틈바구니에서 외면당해야 했던 마빈과 메미는 그야말로, 냉정.

누구나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는 주인공이다.
메미와 마빈에게도 마음이 있고, 사랑이 있다.
조연이라고, 들러리라고 무시하지 마시라.

히스 레저.
어제, <브로크백 마운틴>을 돌려보고 싶었다.
동료에게 그 말을 했다. 카페에서 그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어제 1월22일이 그의 2주기라서.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집의 DVD 플레이어는 고장났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삽입해도 소용이 없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도 보고 싶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히스 레저를 생각하면,
그냥 딸 마틸다가 눈에 밟힌다.
내 딸도 아니고, 아무 연관도 없는 아이임에도.
올해 여섯 살이 되었을 마틸다.
아빠의 존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느닷없이 곁을 떠나야 했던 아빠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마틸다 레저가,
세상의 악행과 슬픔을 잘 견뎌나가길.
거칠고 더러운 공공연한 비밀을 품은 세계를 헤쳐 나가길.  
어느날, 훌쩍 커버린 마틸다를 보곤 '잘 컸구나'하는 탄성을 뱉을 수 있길.


오늘, 봉춘이가 결혼했다.
녀석. 이렇게 훅~ 가게 될지는 우리 친구들 아무도 몰랐다.
다들 놀랍다는 말 한 마디씩 덧붙인다.
원투쓰리(1월23일). 꾹꾹 눌러담은 그 말로 결혼식에 와 달라던 녀석.
몰래 사랑도 아니고, 알기론 너무 미적지근한 사이였음에도,
그렇게도 결혼은 한다. 나로선 의아한 일이긴 해도, 녀석은 녀석의 방식대로!
내가 녀석에 대해, 녀석의 결혼에 대해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행복하길. 아니 녀석에게 행복이 작은 한뼘이라도 늘어나길.

몇 남지 않은 미혹 혹은 비혼에게, 어떡할거냐는 진부한 타박(?)도,
나는 열외인종. "쟤는 그냥 재껴놔." 친구들마저 이젠 인정한다.
뭐 내 의도와는 무관.
나는 독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주의자도 아닌, 회색인간, 열외인종.

그래도, 커피가 나를 달래준다.
메미와 마빈, 히스 레저와 마틸다까지.
아름다운 여자만큼 커피가 좋은 이유. ^.^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지만,
마음의 있을 곳이란, 커피 한 잔에도 있단다.

어쨌든 5월25일 피렌체 두오모에는 갈 테닷!
피렌체 두오모에서 커피 한 잔 마실테고.
그 순간, 당신이 함께였으면 좋겠다. :)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5월25일, 당신의 가슴 속에도 누군가가 있는가...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 안녕, 에니스... 안녕, 히스 레저...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우리, 히스 레저 배웅할까요~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히스 레저, 그리고 우리들의 '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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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0일.
2009년 그날 불길이 치솟은 이후, 우리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권력과 이권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의 야만을 너무 뼈 아프게 절감했다.

정확하게 1년을 버틴 날 내리는 비는,
아마도 1년 전 그 화마와 불길을 기억해서일 것이다.
이 비로도 야만의 시대와 동물의 세계를 씻겨내릴 수는 없다.
아마도, 그날을, 그 참사를, 우리의 발가벗은 몸을 잊지 말라는 뜻일 게다.

이 개좆 같은 세상.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아직 이 세계가 살아갈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거든,
혹은 우리 사는 세계의 누군가를 아직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고 김연수는 말한다.

비, 용산, 노력...
지난해 9월에 만난,

김연수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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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와 영향을 주고받은, 비 오던 그날 밤의 이야기

[독자만남] 『세계의 끝 여자친구』 저자 김연수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 내 일터이자 서식지로 향하는 버스 안, 김연수의 새 책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서식지에선 용산참사 현장에서 주워온 냉장고, 간판, 문고리, 숟가락, 도마, 컵, 선반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과 예술가들의 현장작업이 결합된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정도 있었고, 고인과 유족들의 일상이 깃든 사진도 있었다. <용산포차, 아빠의 청춘>이라는 이름의 전시. 200일이 넘었지만, 다섯 분의 철거민과 한 분의 경찰관이 죽었지만, 진상규명은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시대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함이자, 그들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 마침, 이 전시의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막걸리와 빈대떡 등을 파는 일일 포장마차를 운영, 수익금 전액을 용산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전하기 위한 행사. 그 행사를 향해 가던 버스 안, 나는 해당 소설집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읽고 있었다. 우연찮게 그 단편은 용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온 동료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내가 화면을 끌 때까지, 거기에는 타오르는 불꽃과 시커먼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침묵의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거기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건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p.107)




읽고 있던 와중에 나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보아오던 영정과 가족사진, 이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는 생각이 미쳤다. 윤현구군이 아버지에게 썼다는 편지가 나오는 구절에서, 내 눈물샘은 무방비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내가 떠올린, 그날 새벽의 타오르던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피어나던 검은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하얀 물줄기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읽게 된 편지의 구절들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빠에게"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나와 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2009년 1월 용산참사로 숨진 윤용헌씨의 장남 윤현구군이 쓴 편지 중에서)로 끝나는. 아까 내가 울었던 건 그 편지의 구절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얘기했다.”(p.114)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빚. 2009년 1월20일 이후로, 내게 용산은 더 이상 ‘전자상가’로 대변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용산은 이 시대의 몰염치와 패악이 집중된 참사현장이자 아픔이 됐다. 김연수의 글은, 그 전시와 함께 어느 새 용산과 시대의 야만을 희미하게 희석시키고 있는 내 기억과 신경의 나태함을 건드리고 있었다. ‘케이케이’를 사랑했던 미국인 작가(「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마냥, 정말이지, 나도 그랬다.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에서 떠나고 싶다. 지금 당장.” (p.20)


아니 그런데, 너는 용산참사와 아무 관계없는 놈 아니었냐고? 참사의 희생자들 가운데 알거나 관련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 그렇다고 막장식 살인진압을 지휘하거나 감행한 국가권력과도 연관을 지은 것도 아니면서, 무슨 얘기냐고?


글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한번 들어보자. 용산참사의 현장을 접했던, 망설였으나 글을 통해 이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김연수의 이야기. 지난 21일 가을비 내리던 저녁, 대학로의 연우무대에서 독자들과 함께 공기를 나눈 김연수의 이야기. 때로는 모노드라마처럼 관객석에 앉은 독자들을 향해 연기를 하는 것 같았던 김연수의 이야기. 한편으로 함께 호흡하면서 저녁시간을 공유한 우리의 이야기. 그런 우리가 정말, 용산참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까.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저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진 광년에서 숨 쉬는 것일까. 일단 들어보자.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에는, 책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무슨 교과서 혹은 꼰대 같은 말이냐고? 그러게 말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모범생 같고 성실하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사실, 난 모범생이 아니다. (웃음) 처음 이 문장을 소설에 쓰고픈 생각은 없었다. 무슨 교장선생님 말씀 같지 않나? 다들 노력하는 거, 별로잖나. 누구든 노력 안하고 뭐든 성취했으면 싶고...”



김연수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였다.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날. 그랬기에 명절이 끝날 무렵이면 상실감이 몰려오곤 했다. 친척들과 막상 헤어지게 되면 속상하고 맘이 아파서, 정작 방에 박혀서 혼자 슬픔을 감내하던 소년. 어릴 때는 참으로 궁금했다. ‘좋았던 시간들은 왜 끝나고 마는가.’ 살다보니 그런 고민들은 이어지게 마련이고, ‘차리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김연수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소설을 쓰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삶을 보면 괜찮은 것 같다. (웃음) 다른 사람들을 (소설 속에) 쓰긴 쓰는데, 왜 이렇게 사나 싶다. 최근에 그런 주인공들이 많아졌다. 이상(주. 『꾿빠이, 이상』)도 마찬가지였다. 천재였을 것 같지만, 이상은 나랑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을까, 싶고.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그렇고, 지금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소년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주인공들이) ‘어떻게 불합리한 자신의 삶을 납득하게 됐는가’를 따져보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의 그 말,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는, 최근 5년 동안의 그런 생각들이 농축된 것이다. 자기를 견디는 일에 대한.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기 인생의 빛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통 속에서 자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게 사랑이다.” 사랑은, 그렇게 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살아가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고 노력하고 살아간다. 비루한 일상을 버티고 견딘다. 사랑한다면, 그렇게 노력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어떻게 나왔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르는 얘기는 할 수 없고, 아는 얘기만 하겠다는 김연수. 이 소설집의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뉜단다. 2005년 5월 출간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그 경계다. 그 책을 다 쓰고 여력이 남아 쓴 3편의 단편(「기억할 만한 지나침」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이 있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이후에 썼던 소설은, 지금의 상태와 유사한 소설이라는 것이 김연수의 설명이다.


어쨌든 김연수에게는, 소설을 쓰면서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 무슨 변화인지는 모르겠는데, 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싶다. 2007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정리를 다 했다. ‘그래 이거야. 더 이상 고통은 없어.’라면서. (웃음) 더 이상 쓸게 없더라. 추리소설을 쓸까, 판타지나 SF를 쓸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케이케이의…」는 당초 원제가 ‘거무스름한 불’이었다. 편집부에서 제목을 바꿔달라고 해서 바꾼 것이 지금의 제목이었는데, 다시 원제로 바꿔달라고 했다가, 편집부에서 지금의 제목이 좋다고 주장해서, 최종 낙찰됐다. “(이 글을 쓰게 된) 최초의 동기는, 꽤나 의욕적이었는데, LA폭동에 대해 쓰겠다는 것이었다. 르포도 찾아보고 자료 수집을 하면서 반년이 지났다. 그러다 어느 날, 김중혁과 차를 타고 일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유로에서 검은 연기가 보였다. 가봤더니, 트럭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더라. ‘트럭에 불이 났구나’하면서 얘기를 하는데, 어느 순간, 열기가 확 들어오더라. 유리창을 뚫고. 그 열기가 되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김중혁은 그것을 (소설로) 쓰지 않았고, 나는 썼다. 감수성의 차이지. (웃음)”


소설은 대개, 마지막 부분부터 쓴다는 김연수. 특히 단편소설은 더욱 그렇단다. 그래서 그 열기를 느끼면서 마지막 장면이 떠올라, ‘이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LA폭동과 교포들의 정체성 등을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나오진 않았고, 뜻하지 않게 상실의 이야기로 써졌다. 그러다보니, ‘영향’이라는 문제가 생기더라. 정말 살다보면, 전혀 관계없을 법한 것이 내게 영향을 미친다. 그 소설을 다 써갈 즈음, 숭례문이 불탔다. 마감하면서 봤는데, ‘영향을 받는다’라는 명제를 확신했다. 숭례문에 난 불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뀔지 모르고, 삶은 그렇게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 다 쓰고 나서도 잘 몰랐는데, 이렇게 책이 나오고 보니 확실해진다.”


“나는 숭례문의 그 불꽃에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았다.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p.317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p.32)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나는 유령작가…』의 여력이 남아, 소설적 도전을 많이 할 시기에 쓰인 단편이다. “여성화자에 도전할 때였다. 당시는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은 화자에 가닿을 수 없다고 보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지만, 그 실패가 날 유혹했다. 여성화자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한창 많이 썼는데, 그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정작 여성분들은 이럴 수 있을까, 이러더라. (웃음) 어쨌든 도전해보고 싶어서였고, 열여덟 여자를 주인공으로 했다. 한창 소녀들에 빠져 있을 때였다. (웃음) 문학작품의 소녀들이 어떤 행동방식을 보이나 조사도 했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설이나 롤리타와 같은. 그때 알게 된 소녀들의 비밀을 이 소설에 쓴 거다.(웃음) 말이 되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시작은 전적으로 노래 때문이었다. 무척 좋아하는 노래 세 개 가운데, 밝고 맑으며, 달리기를 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킨 노래. 그리하여, 일산의 호수공원을 달리기하다가, 기념식수를 여러 번 보면서 뭐가 되겠다 싶은 직업의식도 발동하고. 부근의 자주 찾아가는 마두도서관의 설립 초기, 책이 부족할 무렵에 기증됐던, 기증자 이름이 박힌 책도 그를 자극했다. 일산 라페스타 근처, 그의 작업실이 있는 곳엔 신호등이 많은데, 그 신호등을 피해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단다. 그 기분 좋은 메타세쿼이아 역시, 소설에 한몫했다.


“이렇게 노래부터 기념식수, 기증자의 책처럼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 때가 있다. 메타세쿼이아에도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조사를 했더니 소설에 들어있는 그 사실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얼마나 확신을 가지겠나. 소설가라면 지어서라도 써야하는데, 이렇게 역사적 사실까지 있다니. (웃음) 쓰고 나서 되게 기분이 좋았다. 원고를 보내고, 일산주민들을 위한 낭독회가 있어서 읽어주기도 했는데, 배경이 주변에 있는 일이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음악이 감춰진 기억을 끄집어내서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는, 용산참사를 접한 뒤 나온 단편이다. “지금도 고민이다. 예를 들어 동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소설로 형상화할 때, 어디까지, 어떻게 할 수 있나,를 고민한다. 올 1월 용산을 보고 충격이 엄청났다. 그 이후도 다 충격이지만. 용산 지날 때마다 거대한 물음표가 생긴다. 쓸 수 있다, 없다,를 넘어 벽이자 난관이었다. 그걸 쓴다고 했을 때, 쓸 수 있을까. 처음에는 없다고, 결코 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쓸 수 없다고 결론을 냈지만, 그럼에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이렇게 나왔다.”


그가 용산을, 담는 것과 별개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녔을까. 그는 촛불을 이야기했다. 촛불시위 때 많이 나갔다는 그는, 그곳에서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감정을 새삼 실감했다. ‘같이 겪고 있구나.’ 국가권력이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을 때도, ‘이게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이고, 경험하고 있구나’하는. 같이 물을 맞고 같은 감정을 겪는 느낌, 그래서 되게 따뜻했던 느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쓸 때, 고민이 많았고,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고, 아직까지 고민 중이다. 좋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몰랐던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 기간 생각해보면, 촛불, 용산, 대통령의 서거 등 우리는 많은 사건과 감정을 공유했다. 그런 공유지점이 많아서 지난 2년을 생각하면 내 얘기를 해주고 싶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는 그에겐 큰 변화의 징후를 거친 시기였다. 대화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김연수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관통하면서 소설을 통해 말을 걸고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물론 통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 2년은 신뢰를 쌓게 한 시간이었다. “아직은 자신 없지만,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각각의 삶은 하나씩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돼 있으니,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한쪽 끝이 떨린다. 그 공명과 공감 속에서 예수 시절 이래의 ‘정의와 아름다움’이 이어져올 수 있었다.”(pp.294~295)


김연수, 묻고 답하기



처음 제목을 봤을 때, 하루키의 소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 생각났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가장 좋았는데,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일말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음악에서 이름을 빌려온 거라서 하루키 생각은 안 했다. 딱 떠오른 느낌은 여자의 세계의 끝까지 간다는 것. 한 여자와 갈 수 있는 먼 세계의 끝이 어딜까 생각해봤다. 그건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감정적 장소일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을 빌려왔는데, 사람들은 하루키의 소설을 이야기하더라. 하루키 소설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 읽고 있는 『1Q84』를 보면 좀 이상해졌다. 할아버지가 됐는지, 굉장히 멋진 얘기를 한다. 방향에서 보자면, 여전히 사람에 대해 쓰고 있고. 참, 우리나라 평론가나 언론이 말하는 하루키는 대중소설가적인, 한국소설을 망치게 한 주범이다. 그런 의미라면, 누가 하루키를 좋아하겠나. 내가 보기엔 그는 괜찮은 사람 같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2년 동안 좋은 일, 안 좋은 일 겪으면서 공감되는 사람도 찾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화해할 수 없는 사람도 보이더라. 그러니까,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최’ 같은 사람. 그런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해야 하나.


나는 편애하는 게 좋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그냥 예의만 지키고 살고,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지적하고. 안 맞는 사람도 많은데, 싫어할 이유는 없고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을까. 글쎄, 답을 잘 못하겠다. 잘 알지도 못해서. (웃음)


그 질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이해’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생각했다. ‘이해한다’는 흔한 말, 그럼에도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라는 의문.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p.81)


「기억할 만한 지나침」과 같은 여성화자는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선 여자인 나도 이렇게 여우 같이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웃음) 혹시 아저씨가 바라본 시선 아닌가. 그리고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에 공감이 참 많이 됐다. 삼십대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기억할 만한…」의 열여덟 소녀는, 내가 만나보고 싶은 소녀 얘기를 한 거다. (웃음) 사실 그런 십대 여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만든 소설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신들 모두 …」는 쓰고 나서 좋아한 소설 중의 하나다. 찌질한 삶의 양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고… 나는 서른이 되기 전에, 비장하게 돈이나 벌자, 소설 같은 거 말고, 이렇게 생각하고 출근을 하게 됐다. 일산에서 3호선을 타고 동국대까지 출근을 하는데, 너무 놀랐다. 아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근을 하는지, 진짜 감동적이었다. (웃음) 술을 새벽까지 늦게 마시고, 다음날 제 시간에 출근도 하는 거다. 정말 대단했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뭔가 만들잖나. 이런 삶을 반복적으로 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마인드도 있구나 싶었다. 삼십대 초반에, 인생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았다. 부탁이 있다면, 삼십대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심각해도 바뀌는 게 없다. (웃음)


그렇다. 비장하지 말기. 나는 너무도 비장하게 살아가라고 다그치는, 나잇대에 따라 사람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그런 것들이 싫다. 미래를 위해 현재는 희생하고, 한 우물만 파서 그러면서, 종국엔 ‘대박’나라고 외쳐대는 꼬라지가 싫다. 그런 책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것처럼 말한다. 아니 죽어 마땅하다고 옆구리를 쿡쿡 찔러댄다. 왜 우리는 좀더 재밌게 살면 안 되나. 꼭 심각해야 제 맛인가. 우리에겐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가 책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든가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등의. 그게 역사서든, 과학서든, 철학서든,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뒤 그가 알게 된 진리는 그처럼 단순했다.… 도서관에 있는 그 어떤 책을 들춰봐도 거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 노인이 다시 젊어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pp.169~170)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음흉하고 음침한 역할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김연수 작가에게 실망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자고 하니까, 싫다는 변절자(?)도 있었다. 역할이 마음에 들었나? 다시 또 제의가 오면 영화 찍을 건가?


좋아할 리가 없지. (웃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1999년에 직접 만난 적은 있는데, 이번에 조감독이 전화가 왔더라. 시나리오를 살 리는 없는데, 출연을 요청하더라. 처음에는 일 없다고 끊었다. 그런데 도와주고 싶고, 기념도 될 것 같아서 다시 내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건대로 갔다. 연기를 해 보래. 설정을 주고,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에는 소설가로 나가는 줄 알았다. 스탭들이 비열한 배역이라고는 하던데, 알다시피 홍 감독 영화는 시나리오가 늦게 나오잖나. 그저 실수만 안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사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이 있다. 애로배우와 풀장에 뛰어들어서 ‘저 잡아보세요’하면 ‘좋아 좋아’ 박수를 치면서 손잡는 장면이었다. 나왔으면 얼마나 추했을까. (웃음) 다음날 김태우 씨가 그 배우에게 그러더라. 지난주엔 원빈과 키스하고, 이번 주엔 김 작가랑 손잡고...

(웃음) 


그 영화, 다시는 안 보고 싶다. 드릴 말씀이 있다면, 김태우, 엄지원, 고현정 씨 등 실제로 보면 되게 예쁘다. 그런데 홍 감독 영화에선 찌질하게 나오잖나. 일반인들이 나온다면 오죽 하겠나. (웃음) 홍 감독의 영화는 카메라가 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왜곡시켜 보여준다. 어쨌든 순전히 기념으로, 홍 감독 영화여서, 궁금해서 출연을 한 거다. 다시는 출연 않을 거다.


문장이 즉흥적이라기보다 평소에 아이디어를 저장했다가 내놓는 것처럼 치밀하다. 문장을 쓸 때, 차곡차곡 쌓아서 하나 아니면 즉흥적으로?


문장을 쓸 때, 반복해서 쓴다. 한 번에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다른 것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특히 음악. 소설에서 잘 쓴다는 건 다르다. 소설가가 지어낸다기보다는 등장인물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경험 등이 조합돼서 나온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감정이입을 위해 음악을 이용하거나 자료조사도 한다.


괜찮다는 지점에 이르는 것은, 막힘없이 간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 때는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화자가 쓰는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에 들어가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거고. 그 다음에 문장이 나오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1인칭을 선호한다. 문장 쓰기가 용이해서. 그런데 3인칭을 가면 문장 쓰는 것이 달라진다.


「달로 간 코미디언」을 여러 번 봤다. 그렇게 보면서 사람이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낀다. 쓰는 사람도 그런가.


쓸 때마다 달라진다. 소설을 쓰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소설을 쓰기 전에 나는 되게 이상하고, 남 탓만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사람을 믿지 않았다. 책 한권을 쓰는 건, 큰 변화는 없다. 그런데 약간 변한다. 1년 정도 되면 창피할 때가 있다. 그걸 느끼면서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는 변화되는 폭이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초지일관’ 이런 것을 좋아하는 (모)범생이었는데, 소설가가 되고 나서, ‘조삼모사’ 이런 것을 좋아하게 됐다. 다른 사람이 약속 안 지키고 그러면 예전에는 화를 내고 그랬는데, 이제는 뭔가 일이 생겼나보다 싶고. 뭐 내가 바뀌니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웃음)


끝나지 않은 용산, 김연수와 우리의 고민


누군가는 오늘 이 자리, 가을비가 드문드문 내리던 어느 저녁에 김연수를 만난 것을 기화로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체적이 폭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향’은 그런 것이다. 한 연인이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합을 하다가 링에서 쓰러져 죽은 권투선수(고 김득구) 때문에 서로 사랑했고,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 때문에 헤어졌듯(「달로 간 코미디언」), 용산참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연수와 나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그렇게 빚을 지고 있다. 동시대를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빚이다. 삶의 터전을 빼앗겨 살 곳을 묻는 이들에게 국가가 폭력으로 대답하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빚. 창을 뚫고 우리에게도 확 들어온 국가권력의 화염과 열기. 우리는 최소한 이것을 뚫고 나가야 한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그 처절한 싸움에 우리가 함께하고 있고, 그 흉포한 만행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임을 우리는 전해야 한다. 김연수는 여전히 그것을 고민하고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방법(글쓰기)으로 그 고민을 공유하고자 하고 있다.


김연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우리도 각자의 방식대로 그에 화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돼 있고,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별들이니까.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p.313 해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중에서)


모든 삶을 어떻게든, 불합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납득해야한다. 굳이, ‘착해지지 않아도 돼/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첫 문장) 어쩌면 훗날, 바로 지금 이후 발생하는 일의 어떤 근원에 용산이 버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pp.63~64)


일일 포장마차는 다행히 용산을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나는 윤현구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아빠를 뺏기지 않으려는 아이의 안간힘이 자꾸 눈에 밟혔다. 아빠를 안을 수 있는, 아이의 그 사소한 행복조차 지켜주지 못한 이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사회는 대체 무엇일까.


“불편한 자세로, 우리는 물속에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물에 젖었건 땀에 젖었건, 내가 사랑한 케이케이의 몸은 언제나 젖은 몸이었다. 나는 케이케이의 젖은 몸이 내 몸에 닿는 게 좋았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한없이 부드럽고 또 연약했다. 소년의 몸. 가만히 두면 물에 풀리는 물감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젖은 몸. 나는 그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사코 케이케이에게 매달렸다. 내가 아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었다.”(p.21)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잊지 말아야겠다고. 이 흉포하게 구획된 질서에서 피 흘리는 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살인에 동참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그 흉포한 질서에 사소한 것이라도 불복종을 해보는 것.


비오는 가을 밤, 우리는 그날 그렇게 만났기에, 김연수와 같은 동시대의 고민을 나누었기에, 나는 그 만남을 엄중하게 담았다. “헤어진다고 하면 그저 멀리 떨어져 지낸다는 걸 뜻할 뿐,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게 아니겠느냐던 안이한 생각이 일순간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엄중함이랄까, 그런 삶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pp.100~101)


그리하여, 세상 수많은 아픔 앞에서 고개 돌려 외면하지 않기. 나하곤 상관없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라며 지나치면 이 졸렬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아무런 악의도 없는 누군가에게, 시스템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를 일.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우리 서로의 얘기를 하고 듣자. 그렇게 우리 노력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예스24 기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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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한때는 사치의 대명사로 치부했었다.
그것은 오산. '샤넬'이라는 이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지 알기 전의 오해.
명품이라고 일컫기 이전의 샤넬은 그야말로 어떤 혁명. 특히나 여성들에겐 해방의 이름.

샤넬은, 곧 코코 샤넬.
진부하고 식상한 이야기 한 토막.
세기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밤에 뭘 입고 주무삼?" (그따위가 궁금하더냐, 이 기자놈아!)
마릴린 먼로의 우문현답. "샤넬 No.5다, 이놈아." (먼로에 대해서라면 다음 기회에~)

그렇다. 샤넬은 본능이었다.
전세계 여성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핸드백이,
샤넬 '2.55 퀄팅백'이라지?
1955년, 코코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선보인,
퀼팅(누빔)처리한 가죽백에 금색 체인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만든 이 제품.
하나의 2.55를 위해 180여개 공정을 거쳐 장인 6명이,
일주일 이상 정성을 들인다는 이 제품.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은 물론, 샤넬을 갖는 것을 로망으로 삼게끔 했다.
당시,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었단다.
"샤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여자가 아니다." 허허.

스타일, 샤넬의 모든 것.
카디건 슈트, 샤넬 슈트, 샤넬 No.5...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터.
하나로 정리하자. 샤넬 스타일(Chanel style).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
가식 따윈 아듀~ 쓸모없는 복장에 대한 저항.

장 콕토는 말했다.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잔인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자. 분노, 변덕스러움, 친절함, 유머, 반짝이는 생각, 검소함, 그리고 관대함이 샤넬이라는 다시 없을 독특한 여자의 모든 것이다."
장 콕토도 샤넬, 무척 좋아했었나보다. 행간마다 꼼꼼한 애정이 넘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 표현할까.


물론 과장도 있었겠다.
코코는 스스로 "마음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며 도둑에다 거짓말쟁이, 엿듣기의 명수"라 말했다.
의상 제작에 있어 여성 해방을 적극적으로 내비친 적도 없단다.
그저 샤넬 스타일이, 여성 해방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난 게고, 
사후 누군가가 과장했을지도.
코코는 또 사랑에 빠져, 독일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했다.

왜 샤넬 이야길 꺼냈냐고?
1971년 1월10일, 39년 전, 코코 샤넬이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꺾었다.
미터기도 아닌데, 왜 꺾냐고. 내릴 때가 됐으니, 꺾는 게지.
어쨌든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샤넬은 (여성) 몸의 혁명을 만든 장본인이다.

샤넬, 알고 입으면 당신은 더욱 멋진 사람.
내게 샤넬은 더 이상 사치의 대명사, 아니다.
샤넬의 옷이건 액세서리건 향수건, 당신의 스타일을 위해서라면 향유해야지.
그러면서 샤넬의 것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코코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나는 당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겠소이다. 하하.
샤넬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샤넬이 된다면, 더더욱 얼쑤~~~

P.S. 샤넬은 여전히 개인기업 형태로 운영된단다.
말인즉슨, 주주나 투자자에게 공개한 주식회사가 아니며 경영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인 사업의 확대나 이윤의 추구만이 샤넬이라는 기업의 모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란다. 믿거나 말거나, 당신의 몫.

영화 <코코 샤넬>은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봤다. 어떻든가?
오드리 토투의 샤넬. 정말 구미 당기는 조합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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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혁명을 기대한다, 당신도 샤넬처럼

20세기 여성을 해방시킨 패션혁명가에서 엿보는 우리 시대


“20세기 여성 해방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샤넬이다. 코르셋을 벗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이 아니냐. 물론 코르셋 없는 속옷을 만든 이는 따로 있지만, 상품으로 팔릴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든 사람이 샤넬이다. 핸드백에 끈을 달아, 한 손을 풀어준 사람도 샤넬이고. 샤넬은 화도 잘 내고 말도 막 한 사람인데, 살면서 가장 분노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크리스티앙 디오르다. 디오르는 H라인, A라인 등을 만들었는데, 남성의 눈으로 남성이 보기에 괜찮은 옷을 만든 사람이다. 샤넬은 디오르를 향해 반동이라는 말을 썼다. 20대들은 샤넬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샤넬이 되면 된다. 샤넬은 돈도 잘 벌고 재밌게 살았다. (웃음)”


- 우석훈 (≪88만원 세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저자)의 강연 중-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는, 늘 달라야 한다”


지난 1971년, 39년 전 1월10일. 한 시대가 저물었다. 코코 샤넬.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별칭이 코코(Coco). 패션 브랜드이자 아이콘으로서 주로 회자되던 그 이름. 산책을 한 뒤 자신의 침대로 향했던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고 가정부가 달려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의 죽음 치고는 황망했나. 아니, 그렇지만도 않다. 어쩐지 죽음을 예감한 뉘앙스 아닌가. 향년 87세. 1월의 찬바람을 살짝 만끽한 뒤, 육신을 접은 것은 영원한 스타일리스트이자 혁명가의 센스일지도.



샤넬의 이름 앞에 혁명가라는 레떼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떠올려보자.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것, 그것은 몸의 혁명이 아녔을까. 샤넬 이전, 복잡하고 불편한 옷을 감내하고 살아야했던 여성들이었다. 샤넬은 ‘왜 여성만’이라고 반문했다. 손을 움직였다. 우아하면서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의상디자인이 그녀의 손끝에서 나왔다.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에서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여성미가 넘치는 스타일이 나왔다.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지드레스, 슈트, 나팔바지, 단발머리, 트렌치코트, 터틀넥스웨터, 리틀블랙드레스 등. 이른바 샤넬 스타일의 시작이었다. 유행은 흐르고 바뀌어도, 변함없이 애용되는 바로 그것, 샤넬 스타일.


또 들어볼까. 핸드백으로부터 손을 자유롭게 한 것, 무릎 근처로 올라간 치마로 땅에 닿는 긴 치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샤넬의 공이었다. 여성용바지 또한. 무엇보다 철 지난 것이 아닌 불멸의 것으로 스타일을 창조한 사람. 기존의 것과 달라야하는 것. 그것은 혁명의 다른 이름.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잊거나 모르고 있지만, 여성을 옷뿐만 아니라, 시대의 속박으로부터 자물쇠를 연 사람, 샤넬이다. 당신에게 지금 샤넬 제품이 없을지 몰라도, 둘러보라, 샤넬 스타일은 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한가”



샤넬은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일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세간의 입방아로 비유하자면, 스캔들 메이커였다. 어린 시절의 불행을 보상받으려는 듯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다. 1895년, 그녀 나이 12살.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샤넬을 포함한 세 자매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아버지가 버젓이 있는데도 고아가 돼야 했던 소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18세, 낮에는 보조양재사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코코란 별칭도 이때 얻었다. 본인은 이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커리어의 시작은, 젊은 장교 발잔과 연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는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량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1910년, 발잔의 친구이자 영국 폴로 선수인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고 곧 스웨터, 스커트, 액세서리 등도 취급했다.


하지만 카펠의 죽음은 샤넬에게 지울 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한 그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샤넬은 “모든 것을 잃었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가 남긴 이 말은 카펠의 죽음이 남긴 상흔이 아녔을까. “나는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성과 사랑하는 의상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남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도빌룩, 리블블랙드레스 등을 통해 패션의 전설을 기워나갔다. 남성의 눈이 아닌, 여성의 편리에 초점을 맞춘 샤넬 정장도 만들었다. 샤넬은 옷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혁명을 진두지휘한 혁명가였다. 1921년 5월5일 선보인 ‘샤넬 넘버5’는 당시 연인이자 샤넬이 결혼을 꿈꿨던 러시아의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의 소개로 만난 향수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게 제작을 의뢰해 선보인 제품이다.


샤넬은 일과 함께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 폴 이리브 등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첩보원으로 활동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이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슈파츠)에게 빠져 ‘모자 견본’이라는 작전(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독일에 협력한 배신자로 구금됐다가 처칠의 영향력으로 풀려났으나, 슈파츠와 함께 스위스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모르핀을 주사했던 시기를 거쳤다.


“패션은 건축,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여정이었다. 1939년 사업상 부티크를 닫아야했던 샤넬이 패션계에 복귀한 것은 1954년, 71세 때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 앞서 말했듯, 샤넬에게 그는 가장 분노한 대상이었다. 기껏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옷을 만들어놨더니, 남자의 시각에서 여성을 재단한 옷으로 흐름을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그녀는 트위드 슈트, 앞부분이 까만 구두, 금색 체인의 누빈 가방 등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샤넬 스타일을 창조했다.



샤넬은 그렇게 자기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자존감을 세운 혁명가였다. “나는 자신이 사용하는 향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여성들이 불쌍하다. 향은 그 자체가 말해야 한다. 향은 은밀하게 속삭인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녀는 늘 달라야한다는 혁명적 주체였기에, 문화예술계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염문설도 끊이질 않았고. 그녀는 피카소 등 예술가와의 우정을 위해 최초의 남자 향수 ‘뿌르무슈(Pour Monsieur)’를 만들기도 했으며,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리네 디트리히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창작활동을 도왔다.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세기(20세기) 프랑스에는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샤넬, 드골, 피카소.” 폴 모랑도 그녀를 향해, “19세기의 막을 내린 천사”라고 일컬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다. 패션을 건축과 비유하면서 균형과 비율을 강조했던 샤넬은, 종합예술가였다. 스타일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이길 바랐던.


그는 늘 시대를 읽고자 애를 썼으며, 시대에 함몰되지 않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남들만큼, 남들 보기에’라며,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를 대세처럼 늘어놓고, 획일화될 것을 강요하는 이 몰개성의 시대. 샤넬을 사는 것보다 샤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혁명을 향한 디딤돌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당신을, 기대한다. 


  [뷰즈 2010 1·2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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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다.
전보가 그렇게 왔다. 내 탓은 아니지만, 가지 않을 수 있나. 사장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휴가를 내고 버스를 탄다. 피곤했을까. 계속 잠을 잔다. 도착해선 엄마의 시신도 보지 않는다. 눈물? 글쎄, 눈물샘이 마른 건가. 엄마의 주검이 담긴 관. 경비가 커피를 권한다. 홀짝. 커피엔 역시나 담배. 그래도 엄마 시신 앞인데... 잠깐 망설인다. 그렇다고 꺼릴 이유도 분명치 않다. 담배 한 모금. 후~ 커피가 담배를 부른 것인지, 담배를 피우기에 앞서 커피를 애피타이저로 마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맞다. 뫼르소다. ≪이방인≫ 
커피, 태양, 담배, 바다, 정사... 그리고 숱하게 명명된, 그래서 지겨울 법한 부조리. ≪이방인≫을 떠올리자면, 그렇다.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문학)역사상 가장 병맛(!)스러운 살인의 이유를 들이댄 뫼르소. 다양한 병맛짓으로 그야말로 인생사 병맛을 실감케 한 재능은, 온전히 그에게서 나왔다.


그렇다. 그, 알베르 카뮈.
그는 커피 한 잔과 함께(물론 담배도 곁들여서) ≪이방인≫을, 뫼르소의 병맛짓을 휘적거렸다. 빠뤼의 골목, 생제르맹 거리에 위치한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2개의 도자기 인형)’와 ‘드 플로르·de Flore’에서였다. 생제르맹 교회 앞 광장에 위치한 카페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뮈는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커피의 힘을 빌어가며, 뫼르소를 탄생시켰다. 부조리의 탄생. 커피로 조리한 부조리? 물론, 이곳엔 카뮈와 한때 절친이었던 사르트르를 비롯해 보부아르, 랭보, 베를렌, 알퐁스 도데,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피카소 등 내로라하는 문인·사상가·철학자·예술가 등이 즐겨찾았다. 오죽하면 "집으로 삼았다"는 얘기(사르트르)까지 나왔겠나. 지금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머무는 장소가 됐다지만. 


카뮈는 반항아.
저 포스를 보라. 반항 아니면 죽음을. 그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반항, 자유, 열정.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오해하는, 아니 그를 이용해 먹은 한국의 지배세력의 유언비어도 있었다.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그를, 반공주의자로 끼워맞춘. 말하자면 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반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가까웠다(고 나는 알고 있다). 폭력에 근간한 정복자의 모습을 한 절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드러기. 부조리에 반항하되, 반항의 기원을 잊지 말아라!

커피가 카뮈를 꼬드겼다.
약간 과장하자면, 커피 없이 ≪이방인≫이 나왔을까.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그의 지성을 자극한 것은 커피였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커피하우스에선, 또 다른 카뮈가 담배 한 모금과 함께 커피의 힘을 빌어 지금의 부조리를 끄집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 1959년 한 인터뷰에서 "내 나이 마흔다섯, 아직 놀랄 정도로 활력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던 카뮈는 이듬해 초, 소설(≪최초의 인간≫) 원고를 품고 가다가 차에 치여 아듀. 요절이었다. 커피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한 이의 부조리한 죽음. 

그런데 왜 카뮈?
시간을 빼내질 못해서 지난 4일 그의 이야기를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지난 4일은 카뮈의 50주기. ≪이방인≫을 언급하기엔 나의 내공이나 공력이 너무 얕고. 커피와 카뮈는 어떤 관계였는가 정도로만. 그나저나, 저 포스, 저 간지. 아주 부러워 죽어죽어. 저 정도 간지라면, 여자들에겐 축복 아니었겠나. 한 여자보다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했던 부조리한 이유? 뭐, 농담이고, 50주기를 맞아 드디어 나온 카뮈 전집, 소장하고 싶다. 꿀꺽.
다시 아파온다…카뮈가 겨눈 ‘진실의 화살’


참, 늦었지만 시즌1, 접.었.다. 가슴이............ 쫌 아프다. 다시 얘기하자. 지금은 시즌2다.
마지막으로, 카뮈 따윈 몰라. 영화 제목이다. 일본 영화. 카뮈 무덤은 안 옮겼으면 좋겠다. 우파 정부 따위, 반항하는 게 카뮈 답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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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목숨보다 아낀, 아니 목숨처럼 아낀 사내의 이야깁니다.

이 밤을 꼬박 새우고도 남을 비밀을 당신에게만 털어놓습니다.

아주 간혹, 당신을 위해 들려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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