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이것부터 말해야겠다. 나는 어떤 종교(에 대한 믿음)도 갖지 않은, 비종교인이다. 어떤 종교활동도 않는단 뜻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어떤 종교든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선 거의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힌 책이라면, 성경(Bible) 되시겠다. 관련 종교의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도 성경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의 삶 또한 정말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김규항 선생님의 《예수전》을 읽고선 그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니까, 성경이나 예수는 종교적 가치를 넘어 인류적 가치로서 더욱 빛나는 무엇이다.

그런 성경을 둘러싼 묵시록적인 세계를 그린 <일라이>. 주연을 보자. 덴젤 워싱턴이다. 게리 올드만이다. 그 호명만으로도 관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이름들. 100%야, 너무 비인간적인 수치겠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이름값을 하는 영화라고 선택해도 무방할 정도는 되겠다. '콩 심은데 팥났다'고 해도, 덴젤 워싱턴이라는 이름이 경작자로 올라가 있다면, 아마 나는 덜컥 믿을지도...^^;;

그런데, 결론적으로 <일라이>는 덴젤의 필모그래피 중에 따로 빼놨으면 하는 영화다. 여느 필모와 달리, 선교를 위해 특별 출연했다고 (믿고 싶다고) 할까. 그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 봉사한 그런 영화. 같은 종교인들을 위해 덴젤이 우정 출연한. 물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덴젤에 대한 애정의 발로에서 나온 땡고집 되시겠다.

영화의 표피는 그렇다. 지구 종말 혹은 인류 종말이후의 사건을 다룬 '종말 액션 블록버스터'. 지난 연초 <더 로드>를 좋게 봤기에, 이번 종말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다뤄질까 하는 기대감, 분명 있었다. 더구나 <더 로드>에는 없는 '액션'과 덴젤 워싱턴, 게리 올드만이라는 든든한 '빽'까지 가세했으니. 유후~

그렇다고 내가 종말론적 세계관을 신봉하거나 끌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종말의 세계관은 대개 현실에 대한 메타포를 품고 있기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것을 나는 좋아한다. 더구나, 종말적 세계는, 영화적으로 봤을 때 한 마디로 장관이다. 그 엄청난 스펙타클의 향연. <나는 전설이다>의 그 텅빈 종말적 뉴욕을 떠올려보라. 뜨아아~
 
<일라이>는, 그 모든 기대와는 무관하다.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남보원'에 출연하는 박성호의 말을 빌자면, "괜히 봤어~~ 안 볼 걸 그랬어(들썩들썩)" 나름 독실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혹은 신앙심 작렬하는 신자들에겐 충분히 "아멘(에이멘)~"을 연호하게할 영화였겠다. 딱 교회에서나 제한 상영됐으면 좋을. 아, 물론 기독교가 모태신앙인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다보니, 그쪽 나라에선 나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줄거리 내달을 필요도 없겠다. '그 사건'이후 종말에 다다른 인류가 '성경'을 찾아서 새로운 불씨를 키워보자는 건데, 심하게 말해, 개수작이다. 끊임없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작태야, 성경홍보 영화겠거니 참고 넘어가겠는데, 과도한 비장미에 곁들인 슬로모션과 음악은 고문에 가까울 지경이다. 성경의 진짜 의미를 되짚고 넘어갈 틈새도 없다. 성경 한 권 때문에 벌어지는 무자비한 악행과 폭력은 어떤 개연성도 없다. 그저 성경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단다. 성경이 담고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나 성찰은 어디에도 없다.

덴젤이 연기하는 일라이도 그렇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건 좋다 이거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은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실천적 태도를 견지한 책이 아니던가. 일라이는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악행의 현장 앞에서 "지나가자.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며 되새김질하면서 외면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태도같은데, 글쎄 순교자의 운명을 지난 자 치고는 어설프다.

뭣보다 성경을 빌미로 벌어지는 악행의 나열은, 성경에 대한 단순집착적 애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말하자면, '바이블필리아'들의 난장. 네크로필리아(시체 애호증)와 대체 무엇이 다른가. 성경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세계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단순 책 읽기의 무의미함과도 이어졌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일부는 자신이 읽었다는 책(들)을 블로그 등을 통해 나열한다. '나 이만큼 읽었소', 하는 자랑질로 삼고 싶은 이도 있겠고, 목표에 대한 담금질적인 의미를 가진 이도 있겠으며,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겠지.

하지만, 그런 애호가적 소비, 왠지 책에 대한 배신같다. 그 책 읽기,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될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종종 의심한다. 그렇게 자신이 읽은 책을 나열하는 것, 무엇을 위함일까(리뷰와는 또 다른). 그것을 매개로 한 한 세계(사람)의 변화, 혹은 실천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상실된 것, 아닐까. 비판적 독서도 아니요, 그저 읽고 보자는 맹목적인 향유는 아닐까. '나, 이만큼 책 읽는 사람이니 우습게 보지 마시오'라는 자기 과시?

뭐 꼭 그것이 나쁘다 함은 아니지만,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지금의 책읽기 형태에 대해 이런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팬'이 되는 것. 즉, "라이프스타일 가꾸기의 방편으로 책을 수집하고, 읽고, 그 경험을 나누는" 새로운 지식소비 패턴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과 모색은 없이, 사회적 실천과는 유리된 지적 허영에 가까운 책 읽기.

책을 읽는 것,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만의 사유의 힘을 기르고 이를 생활에 녹여가는 것이 아닐까. 김규항 선생님은 유시민의 예를 들었다. 《청춘의 독서》는 좋은 책이지만, 더 중요한 교훈이 따로 있다고. "지식인 유시민과 정치인 유시민의 차이를 통해 사람의 지식과 실천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생생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
 
유시민의 글은 날카롭고 때론 유려하며, 종종 핵심을 찌른다. 그래서 감탄하기도 하며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그의 행보는 그가 잉태한 글(지식)과 다르다. 물론 누구도 완벽한 언행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진 않지만, 정치인 유시민은 글쟁이(지식인) 유시민을 완벽하게 갉아먹는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그러니, 책이 우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다면, 그 변화가 일상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실천되고 있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그런 균열이 우리라는 세계를 0.0001mm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데, 어쨌다고. 니 책 졸라 굵다, 고 말해주리? 심하게 말해, 성경 한 권 갖자고 똥지랄을 해대는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다시 돌아가 성경. 지금 이 세계를 야만으로 덧칠한 부시도 성경 말씀은 꼬박 인용하시더라.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 읽었다고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선구안을 가지느냐? 것도 아니다.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읽은 자의 태도와 실천이다. 성경 읽었다고 예수주의자가 되는 것 아님은 익히 경험한 바이고, 고작 예수의 팬으로서 예수 부르짖을 줄만 알며 종교 활동하고 있다면, 스스로 나이롱 신자라고 커밍아웃부터 하고 볼 일이다. 그렇담 깨끗이 인정이나 하지. 시시콜콜 예수 들먹이며, 예수를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아멘.

<일라이>의 미덕이라면, 그런 점 일깨우는 정도? 내 보기엔 종교적 신념도 개뿔.
어휴, <일라이>, 괴로운 영화관람의 경험. 관람지옥, 비관람천국. 에이멘.


근데, 궁금한 거.
미국에선 그 순교자 역할로 흑인인 덴젤 워싱턴이 한 것에 대해선 군말이 없었나?
덴젤이 연기한 일라이. 꼭 예수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더만. 물론 덴젤 워싱턴은 흑인이긴 하지만 백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다고 알고 있으니, 없었을 수도.

아, 그리고 마지막, 일라이를 대신해 칼 들고 순교자의 길을 나서는 솔라라. 완전 사족의 방점을 찍드만. 이 영화, 왜 만들었나이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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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네. 정말로.

그때만 해도 당신, 덤벙거리긴 해도 순수의 결정체에 가까웠지. 하하.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씩씩하고 명랑한 그때 그 모습.
때론 감내하기 힘든 슬픔 앞에서 감정을 폭발하던 당신.

세월이 메이크업을 시켜준 까닭일까.
당신 이젠, 확연히 관능적인 여인이 됐네.
농익을 대로 농익은, 치명적으로 매력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까.
당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숨이 턱 막혀.
훅, 당신에게 이런 관능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 엄청난 간극에도,
아름다운 당신, 어디가겠어.
뜨겁고도 부정적인 갈망이 잉태한 암흑이라도 그게,
당신이라면.
김수영 시인의 이말.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다"

아직,
당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나 역시도, 사랑 '받은' 기억보다는 사랑'한' 기억을 떠올릴 거야.
그건, 당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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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합니다, 김소진

4월22일 봄날, 세상을 떠난 눈 밝은 작가를 떠올리자


나는 오늘

봄 나무들 아래를 지나왔다

푸르고 생기에 찬 햇잎사귀들 사이로

바람은 천년의 기억 속을 들락거리고

나는 그곳을 지나

집으로 왔다 …

(중략)


나는 왠지

내가 지나온 그 나무들 위에

바람만이, 햇살들만이 그 새살 같은 잎들을

흔들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

(중략) 


- 장석남 「새의 자취 - 故 김소진 兄 생각」 중에서 -


지구의 날에 생각하는 김소진


4월22일의 봄날. 햇살이 좋고, 마음결도 바람 따라 살랑거립니다. 그저 바라만보고 있어도 좋은 푸른 잎사귀는 조곤조곤 귀를 간질입니다. 그래요 이날, ‘지구의 날’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지구의 품안에서 사람살이를 영위하는 우리는 너무 자주 지구의 수고와 고마움을 잊고 지냅니다. 우리 모든 것을 있게 만든 지구. ‘지구야,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은 날입니다.


1970년 미국, ‘지구의 날’은 시작됐습니다. 앞선 해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기름유출사고가 계기가 됐다죠. ‘데니스 헤이즈’라는 청년 주도로, 이 해 20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행사가 열렸고,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180여개 나라의 약 5만개 단체가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토건주의자나 성장지상주의자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지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겠지만요.


그런 까닭인지, 이날만큼은 봄바람이 더욱 살갑습니다. 무감동한 낯으로 지구를 대하는 것은 몰염치하게 느껴집니다. ‘삶’이라는 밥상을 차려준 지구에 감사하고 싶은 작은 마음가짐이랄까요. 그리고 공정무역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김소진을 떠올립니다. 13년 전, 4월22일 서른넷의 나이로 요절한 눈 밝은 작가. 이날, 지구에서 육체를 소진(消盡)하고야 말았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부질없는 넋두리겠으나, 아마 요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한국 문단의 큰 기둥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쥐잡기」(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장단편을 거치며 필력과 시선 모든 면에서 꾸준히 상승했습니다. 1996년, 그에게 주어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결코 허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기존의 소설풍과 달리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을 통해 우리네 삶과 시대상을 현실감 있고 감칠맛 나는 언어로 표현했던 그였으니까요. 무엇보다 소외된 약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도시 서민의 낙오와 패배를 일상화시킨 체제를 고발한 그의 눈 밝음은 희소한 가치였습니다.


김소진, 힘들지만 필요한 떠올림


“김소진을 되살려내는 일은 힘들다. 힘이 필요하다 . 한때는 슬픔이 힘이 되었다 . 이제는 그리움이 힘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 십 년, 십 년. 매년 봄, 알싸한 향의 복숭아꽃 꽃잎이 눈처럼 흩날릴 때 그를 생각한다. 소진, 너는 내가 모르는 초월적이고 깊은 그 무엇의 일부가 되었다. 잘 있어라.”                                - 성석제, 「복숭아꽃이 흩날릴 때마다」 중에서 -


복숭아꽃이 흩날릴 때마다, 김소진은 불쑥 찾아옵니다. 6년이라는 짧은 작품 활동에도 불구, 그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장을 새겼습니다. 신문기자로서 일상을 버티고 견디던 그가,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좀 더 웅숭 깊은 시선으로 우리네 삶을 다독일 것이라고 여겼건만, 하늘도 그의 재능을 탐냈나 봅니다. 지상에 두기엔 아까운 재능. 우리 중 누군가는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슬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짧은 활동이었기에 아쉽고, 누군가는 그가 없는 무정한 세상을 꿋꿋하게 버텨야 하기에 슬픕니다.


사실 제가 만난 최초의 김소진은, 유작 산문집인 『아버지의 미소』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그 숙제에 대한 김소진의 시선에 훌쩍였던 기억. 그가 유년을 보낸 기찻길 언저리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 『장석조네 사람들』은 주변적이고 소외된 것에 대한 애정과 공감을 기저에 둔, 김소진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특히 걸쭉한 입말과 아름다운 순우리말 방언이 화음을 이루며 도시 빈민의 애환과 사연을 감칠맛 나게 전달합니다. 그들이라고 마냥 슬픔만이 기저가 아님을, 건강한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장석조네 사람들』은 끈끈하게 보여줍니다.

 


12편의 중단편이 모인 『자전거 도둑』. 그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울림 있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내게 아버지란 이도 저도 아닌 개흘레꾼에 불과했다”며 아버지를 향한 기억과 버무려진 아들, 딸, 누이 등 우리네 사람살이가 있습니다. 1948년작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과도 맞물리면서, 이 작품은 늘 어떤 세상에서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심어져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를 읽을 때마다 저려오는 통증은. 그는 시대와 삶을 담으면서도, 세상의 속도에 휘둘려 잊고 지낸 무엇을 끄집어내줍니다. 진부한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의 작품에는 점액질 같은 삶이 있습니다. 마냥 추하지도, 그렇다고 미화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삶을 씹어 삼켜야만 하는 사람의 곤궁함과 비루함. 당대의 트렌드였던 포스트 모더니즘과 거리를 둔 그만의 방식, 즉 김소진의 시선. 그 안에 있었던 뭇별들을 더 이상 지상에서 반짝이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아마, 그래서 일겁니다. 4월22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와 더불어 김소진을 떠올리는 것이. 어쩌면 지구에 남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울림을 주는 것 아닐까요. 열린 사회의 적들을 향해, 문학적 필살기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던 눈 밝은 작가는 물론 지금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김소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 충분합니다. 가난과 소외는 애초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개인의 무능이나 책임으로 떠미는 것은, 더 이상 지구에서 함께 살기 싫다는 빵꾸똥꾸들의 우격다짐이겠지요. 지구는 우리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생명체 어느 하나, 다른 것으로부터 신세를 지고 있잖아요. 그러니, 합시다. 서로에게 손 내밀기. 지구의 날, 김소진이 떠오를라치면, 옆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손을 내밀어 보자고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그렇게 우리는 지구에 발 딛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2010 3·4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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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진지 드셨습니까.”
동네 어귀, 바둑 삼매경에 빠진 동네 어르신들을 지나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꼬박 안부 인사를 건넨다. 진짜 진지를 드셨는지 여부를 여쭙는 것이 아니라, 그건 인사말, 즉 일상의 리추얼(의식)이다. 전쟁이 났다지만, 그들의 일상은 여느 때와 크게 다름이 없다. 걱정을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박사님’(이승만)도 있고, 미군도 있다.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데, 어찌 될거나 있나, 하는 소박한 마음. 전쟁은 그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풍문이었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의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쟁은 엉뚱한 곳에서 발발한다. 미군이 일본말 안내방송을 통해 피난가라고 할 때만 해도 산골짜기에 한 며칠 박혀있으면 될 줄 알았다. 소풍 가듯 피난을 떠났다. 임진년 난리를 피했다는 가마봉에 간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군이 다시 ‘도락구’에 태워 남쪽으로 보내준다는 말이 들렸다. 다시 그 말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러려니 했다. 어떤 통신수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전쟁 상황이나 흐름을 알 길 없는 장삼이사에겐, 나라님 말씀이겠거니, 설마 우릴 죽음으로 몰아넣겠거니, 하는 의심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 피난소풍길. 블라블라,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코쟁이들이 총을 들이댄다. 뭔 일인가, 싶어도 말도 안 통하는데, 느닷없이 미군기가 폭격을 하고, 코쟁이들이 총을 쏘아댄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피가 사방으로 튄다. 전쟁이 따로 있나. 눈앞의 광경이 바로 전쟁이다. 우릴 지켜주는 줄 알았던 코쟁이들은 대체 어디로 갔으며, 왜 우리는 총을 맞아야하는가, 하는 고민할 겨를도 없다. 총을 피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쌍굴다리로 피했지만, 그곳이라고 총구의 시야에서 자유롭지 않다. 총알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향하고, 총격에 쓰러진 혈육을 두고 도망가야 하는 이들의 비통한 얼굴은 전쟁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은연못>의 노근리 사건은 그렇게 재구성됐다. 1999년 AP통신 최상훈 기자 등의 보도가 2001년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알려진 그 사건. 한국전쟁이 아닌, ‘노근리 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민간인 학살의 현장. 무려 300여 명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어르신, 진지 드셨습니까”하는 일상의 리추얼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남한과 북한을 둘러싼 외세의 이데올로기로 위장한 이권 다툼이었다면, 이 노근리 전쟁은 전쟁의 실체를 정직하게 까발린 진실이다.


전쟁을 아직 영토 분쟁이니, 이데올로기 갈등이니 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당신은 너무 나이브하다. 전쟁은 지배계급의 탐욕이 빚은 극강의 야만이다. 전쟁이 나면, 국가를 위해 싸워야한다고? 순진한 소리 마라. 국가를 들먹이는 건, 대개의 경우, 지배계급이 당신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한 레토릭이다.
 
“전쟁은 지배계급에 의해서 준비, 결정, 조직되고,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전쟁을 치르며, 고통 받는 것은 바로 일반 민중이다.”
(베르너 빈터스타이너)

<작은연못>은 그 말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의 하나이다. 아무도 모른다. 학살을 당한 민간인들도, 총을 쏘는 미군도, 그 비극의 현장을 비통하게 바라보는 우리도. 다만,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령부만 안다. 그저 쏘라는 명령만 내리는 그 주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무전기를 통해 목소리만 전해지는 지배계급 말이다. 그들은 그저 뒷전에만 있을 뿐, 전장에서 총을 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고통? 무전기에는 어떤 고통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죽이라고 명령해서 죽은 사람이 무고한 민간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도, 그들은 이리 말할 것이다. 전쟁 중 벌어진 일이라고. 전쟁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한국전쟁 60년. 일부러 이 시기에 맞춘 것은 아니다. <작은연못>은 AP통신의 보도 이후 이를 엮은 《노근리 다리》가 2003년 출간되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오랜 세월 풍문으로만 돌던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까발린 기사에 자극받은 영화인들이 이를 스크린에 담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음이리라. 한 마디로, ‘사회적 영화’였다. 영화 내용이 품은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인들의 사회적 책임이 발로가 된 영화를 말함이다.

뭣보다 142명의 배우와 229명의 스탭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고 박광정을 비롯해 강신일, 김뢰하, 문성근, 문소리, 박원상, 송강호, 유해진, 이대연 등 주류 영화연극계 배우들이 무보수 자발적으로 참여한 영화. 영화를 연출한 이상우 감독의 집념이 만들어낸 영화. 마침내 8년여의 오랜 제작과정을 거쳐 최근 힘들게 개봉했다.

오해는 마시라. 사회적 책임과 뜻이 모였다고 결코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날의 참사를 더욱 아리게 만드는 1950년대 농촌 풍경은 영상미를 담보하며, 컴퓨터그래픽과 접목된 폭격 장면은 완성도만큼이나 비극을 더욱 아로 새긴다.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연출과 그 많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스크린을 빛낸다.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강요로서 다가오지도 않는다. 민간인이자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리들이라면, 노근리에서 총알을 온몸으로 맞고 피해야하는 그들의 공포와 슬픔을 남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전장’과 작동 메커니즘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시장 (만능주의)’의 영향권에서.


1950년 7월의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300여 명 주민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단 25명. “시체로 참호를 쌓고, 핏물로 갈증을 달랜” 비극은 아직 제대로 달래지지 못했다. 그때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생존자의 삶은, 그 참상을 겪고 난 뒤 온전했을까. 영화의 끝, 그날의 비극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증언을 하던 얼굴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전쟁을 본다.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 혹은 현실과 겹칠 수밖에 없는.

나는 전쟁에서, 그리고 전쟁의 또 다른 형태인 시장에서, 늘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죽어가는 혹은 낙오(곧, 죽음)를 강요당하는 우리네 모습이 밟혔다. 그들은 곧, 나와 다르지 않았기에 눈물이 났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듯이,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만 직접 전쟁에서 죽을 확률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은 20세기 거의 모든 전쟁에 관여했지만, 한 세기 동안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죽은 미군 병사의 총수는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 죽은 한국인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 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죽을 확률이 0.1%에도 미치지 않는 군인과 죽을 확률이 10%가 넘는 사람을 같은 군인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를 전쟁의 피해자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중략)

인간 세상에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리영희 프리즘』, pp.65~66)

어쩌면 내가 그 ‘노근리 전쟁’을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울음을 갑자기 멈춰버린 아기. 옆에서 죽어간 가족과 이웃 때문이었을까. 예민해진 누군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총알 세례를 부른다며 울먹이며 질책했다. 그 순간, 누가 그 생존의 울부짖음을 타박할 수 있을까. 울고 있는 아이를 품고 있는 아비의 결단. 이성의 발로였을까, 감정적 충동이었을까. 모르겠다.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먹먹했고, 나는 울고 있었다.

그들은 소풍처럼 피난길을 떠났을 뿐이었다.


* 229명의 스탭과 142명의 배우가 노근리 사건을 기억한다고 그랬다.
당신과 나, 관객인 우리도 함께 그 기억에 동참하자. 비극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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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아마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푼크툼'이 회화 보기에서 차용될 줄이야. 그것도 21세기, 자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말이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이번에는 미학과 미술사를 넘어, 회화보기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했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을 회화에도 적용해서 말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최근 그의 처지와 맞물려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브뤼헐은 당대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대운하를 반대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게 풍자의 대상은 서민이라고 비껴가질 않았다. 진 교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반인이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는다. <디 워>논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런 진 교수가 스스로 꽂혔다며, 열 두 작품을 언급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도 있다. 어떻든간에《교수대 위의 까치》를 관통하는 개념은 푼크툼이다. 즉,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감각.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도 없는, 작품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피사체가 있는 사진에서만 쓰이던 개념인데, 그 개념을 완화했다는 것이 진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진 교수가 언급한 열 두 작품은 이전에 우리에게 주입된 회화를 보는 방법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낯설게 보기다. 표준적인 작품 해설에 의한 미술사 보기가 아닌, 내 마음에 꽂히는 '삘'로 작품 마주대하기. 표준적인 작품 읽기가 아니어서일까. 책은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의외로 미술보기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더구나, 타의에 의해 교단에서 쫓겨난 그의 처지와 맞물려, 책에 나온 작품들이 (잘리지 않았다면) 강의실에서 얘기될 것들이었다고 하니, 마지막 강의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책에 대한 집중도 또한 높아진다. (교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이 아이러니.  

책은 곳곳에서 찔러댄다. 회화를 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니며, 미술사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시선을 빌려서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범례적으로 보여준달까. 경계를 넘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방법이 앞으로 회화를 만나면, 나만의 푼크툼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게 한다.   

'사라진 주체'라는 테마로 진행된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의 <자화상>이 메타 회화를 언급한다는 대목에선 17세기 화가들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봤다. 이 작품, 희한하게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현실과 비현실, 더 나아간 비현실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실과 비현실은 위치를 바꾼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이고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셈이다.   

이것은 그렇다고,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란다.그럼에도 굼프를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은 보들리아르가 언급한 시뮬라크르(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일찌감치 다룬 셈이다. 화가의 정체성을 넘어 회화의 정체성을 다룬 진화의 단계.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만나 봰 진중권 교수(뒤)


여러모로 진 교수의 범례적 회화읽기는 곳곳에서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림 보기가 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답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제도권 교육의 폐해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답 하나만 좇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 푼크툼은 그것만큼 중요한, 새롭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답을 푸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임을.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는,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때문이었다.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진 교수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만든 굼프의 <자화상>. 

세상을 보는, 세상을 사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다.
푼크툼으로 인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안겨준 책 읽기의 행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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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늘 그러하듯,
이별 역시 느닷없이 다가오는 법..

그렇다고, 그 만남에 이별을 대입하진 않잖아.
언제 올지 모를 이별을 생각하며 만남을 갉아먹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있을까.
비록 인간은 늘 이별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지라도...

당신도 그런 이별, 겪어봤잖아.
느닷없이 당신을 덮치고야 말았던 그 이별.
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던 그 이별.
나는, 그런 당신이 너무도 아팠어. 나는, 당신이 슬프고.



이별은,
어떻게든 수습되지 않는 형벌이야.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굴레이며.

여신에게 다가온 이별,
여신으로부터 멀어진 이별.
그 이별을 저울로 달아 어느 것이 더 무겁다 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이별 앞에, 세계는 그 작동을 멈춰야 한다고 봐. 
누구도 그 이별의 무게를 잴 수 없으니까...

離別
이별앞에,
사랑은 언제나 뜨겁기에,
이별이 그리도 아픈 건가봐.

느닷없이 당신이 떠날 때,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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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향한 기다림.
길었지만, 괜찮았다오.
누군가는 그 기다림, 부질없다했지만,
당신이 다시 꼭 돌아오리란 희망, 내겐 있었으니까.

지금, 당신이 그렇게 돌아와서 가슴이 다시 콩닥콩닥.
다시 뛰지 않을 줄 알았던 내 심장도 쿵쿵.

마음 같아선, 이마에 '여신, 돌아오다'라고 붙이고,
당신의 얼굴을 담은 옷을 입고 활보하고 싶소.

이런 장담,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나지만,
날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말 했다하면, 놀라겠지만,
그게 당신이라면, 25년 후에도 당신을 사랑하겠소.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나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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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들의 시대, 길을 묻는다
[리뷰] <여행자>

 
사연이야 분명 있겠지만, 아버지에 의해 고아원에 살게 된 진희(김새론)는 고아원 원장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아빠와 엄마가 없는 애들이 고아잖아요. 난 고아가 아니에요.” 맞아. 그러고보니,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었잖아! 엄마 아빠 없는 아이를 '고아'라는 불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지금-여기의 우리가 떠올랐다. 이상한 기시감.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 어머니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찬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지금의 우리들 말이다.


알다시피,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면서 갈 곳을 묻는 이들에게, 국가가 폭력으로 대답하는 시대다. 용산(참사)뿐 아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의무였던 '국가'는 없다. 이 세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니, 힘 없고 약한 자를 보듬고 비를 맞지 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알았던 것이 국가였는데, 국가는 스스로 의무를 내동댕이치고, '너희들을 이제 지키지 않겠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19세기의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데뷔작이었던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떠오른 이유다. 랭보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진희는, 고아가 아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우리는 목격했으니까. 그러나 진희는, 고아다. 아버지는 그를 버렸고, 그는 고아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아무리 고아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진희는 명백하게 지금의 우리를 은유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우리들은 지금, 고아다. 국가가 있으나, 그 국가는 우리를 버렸다. 국가는, 최소한 엄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우산인줄 알았다. 그러나 MB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의 비열함과 엄혹함은,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주기는커녕 더 세찬 비를 뿌리고 있다. 19세기 열다섯 천재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21세기에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한다. 진희의 항변이 더욱 세차게 나를 때린 이유였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니까. 이게 대체 말이 되냐고.

진희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여행자>는,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동했다. 어쩔 수 없다. 진희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새 옷도 사주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아버지였으니까. 고아원은 그저 아버지가 잠깐 다른 볼 일을 보기 위해 진희를 맡긴 곳이었을 거다. 고아원 원장이나 아이들이, 너는 고아야, 라고 말해도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다른 아이들과 난 달라. 아버지가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희의 방황(!)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지켜주는 국가의 존재를 믿고 싶으니까. 진희는 고아원에 차츰 적응한다. 절친도 생기고, 나름 고아원 생활에 익숙해져간다. 진희는 그런 아이다. 다리가 부러진 새를 살리고자 애를 쓰는. 그런 한편으로, 그는 아직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돌아오고, 새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는.


하지만, 고아원의 절친이 하나둘 떠나고,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이다. 새는 결국 죽었다. 선의와는 무관하게 진희는 새를 죽인 셈이다. 이렇게 기댈 곳 없는 아이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까. 불안과 공포. 그것이 진희의 마음에 똬리를 깊게 틀었던 걸까. 외국인들이 고아원 아이들을 위해 사온 인형을 뚝뚝 부러뜨린다. 절친이었던 숙희(박도연)가 입양되자, 진희는 방망이로 이불을 두드리며 슬픔을 달랜다. 같이 외국으로 가자고 했던 숙희였다. 같은 고아로 마음을 나눴던 숙희였다.

진희는 다시 혼자가 됐다. 땅에 흙을 판다.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했다. 아니, 무덤을 파고 있는 게 아닌가. 흙을 파서 그 속으로 들어가 눕고야마는 진희. 뭐랄까. 절망의 끝?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무덤을 파고 그 속으로 침잠하고픈 아이의 행동이 가슴에 밟힌다. 꾹꾹.

우산이 없으면 내리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진희는 결국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포자기 혹은 체념. 입양에 관심 없이 뚱하기만 하던 진희였지만,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이젠 입양을 받아들인다. 친구들이 불러주는 작별을 들으며 뚱한 표정으로 떠나는 진희가 그것을 알려준다. 기다림 끝에 다른 길을 찾았다.

그 작은 아이, 혼자 떠난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간다. 혼자 비행기에 올라, 타국에 도착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 아버지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믿음 때문에 현실을 거부하고 도피도 했지만, 결국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진희가 프랑스에 내려섰을 때의 표정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어려운 감정을 보여준다. 현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 그 깊은 눈망울. 어떤 표정도 담지 않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아이의 눈물. 잊지 못할 그 라스트신.

애잔하고 아프다. 우리도 결국 이 현실을, 이 엄혹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부모로부터, 국가로부터, 아이들이 그렇게 우리 곁을, 여행을 떠났겠구나 하는 미안함과 죄스러움도 그렇지만, 어버이 없이 현실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우리도 결국 고아구나, 하는 현실인식 때문에.

<여행자>는 그렇게 가슴으로 더욱 울게 만든 영화였다. 랭보는 「고아들의 새해선물」에서 “어머니의 꿈, 그것보다 더 따뜻한 침구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건 아마 지금의 우리에게도 명백하게 적용되는 문구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남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이나 만행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 이에 도취해야 하는 뮌히하우젠 심드롬(Munchausen Sydrome)에라도 빠져 있어야 하나.

공항에 도착한 진희의 미래가 어떻게 열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 상처 입은 마음은 또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지. 어쨌거나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진희 역시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이길 포기한, 국가이길 포기한 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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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월4일.

혹자는 '4'가 두 개 겹친다고, 재수 없다고 할진 몰라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간을 보니, 오호~ 오후 4시4분이로다.ㅎㅎ)


기분이야 그렇든, 아니든 이토록 화창한 봄.
온몸으로 봄이 꿈틀꿈틀, 스멀스멀. 

그런 오늘,
미국의 인권·흑인해방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생각하며, 커피 한 잔.

비폭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민권 운동을 펼친,
1955년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백 분리주의 철폐를 요구하며 집단 버스 승차거부를 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주도한, 그 사람,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는,
68혁명이 프랑스에서 5월에 본격 발기하기 전,
4월4일 미국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을 당했다.


그로부터, 42년이 흐른 오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리는 건, 그의 말 때문.
그가 건넨 말이 커피를 만드는 내게도, 어떤 공명을 줬기 때문이지.
내가 마시는 커피 그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에 앉아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수확한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 사람들이 재배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재배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는 일터로 나가기 전에 벌써 세계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세계의 누군가에게 신세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커피 향미가 더욱 짙게 다가오는 시간.

참, 어떤 커피를 마셨냐고?
홍대 부근의 '살롱 드 팩토리'에서,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까만 에스프레소에 하얀 우유거품을 살포시 얹은 흑과 백의 조화.
세상이 그렇게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게 되길 바라는 어떤 어설픈 마음에서?ㅋ

참고로, 마끼아또(Macchiato)는,
얼룩지다, 점찍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그렇게, 커피 한 잔의 고마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에 진 신세.

그 어느해 4월4일,
그렇게 당신의 마음과 함께 에쏘 마끼아또 한 잔 마시고 싶어...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이 세계를 공유하면서...

'마틴 루터 킹' 보다 프로야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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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직장인의 태도 혹은, 노예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한 자세

[리뷰] <그린존>



21세기라고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혹시나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역시나. 그렇다. 전쟁 말이다. 9.11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는 큰 야만을 들이대지 않아도 된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천안함 침몰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끌어들이는 세력의 선동을 목격하고 있다. 준전시상태, 맞는 말이다. 더구나, 전쟁과 시장.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속성을 지닌 체제의 속살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냉전도 사실상의 전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냉전 체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덧칠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체제다. 냉전 체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조차 국가의 적으로 모는 자본 독재 체제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작동하더라도, 매카시즘이라는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반공과 국가 안보의 폭력과 고문,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의 권력화, 이들 정보기관이 지목하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과 감시가 지속되는 체제다.”(《리영희 프리즘》, p.73)


오늘, 제주 4.3항쟁 62년을 맞은 날. 역시나 전쟁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할 만큼 평화와 인권이 찾아왔냐고 묻는다면, 도리도리. 매일 같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일상을 맞닥뜨리는 우리들이다. 스크린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린존>도 그 중의 하나다. 본시리즈로 새로운 액션을 선보인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이 만난 전쟁의 기억.


<그린존>, WMD사기극의 재구성


<그린존>은 줄곧 한 단어를 끄집어낸다.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대량살상무기. 2003년 무렵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익숙한 이 말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지만, 아니 효력을 잃었음에도, 관객을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어간다. WMD라는 말 하나로, 전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를 친 부시행정부의 그 협잡극 말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 협작극의 숨겨진 진실을 찾거나, 전쟁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사기로 밝혀진 마당에, 숨겨진 진실 따위가 다 무언가. “전쟁은 언제나 단순한 군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리영희 프리즘》, p.63) 감독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린존>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 영화를 보러 간 많은 관객들도 아마, 액션 혹은 스릴러로서의 쾌감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 기대만큼 빠르고, 현란하다.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 조합에서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건, 본 시리즈일 테고, 영화는 그런 시각적 긴장감과 속도감으로 가득하다. 2003년 3월20일(한국 시각)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한 날부터 영화가 시작되고, WMD를 재잘대도 스크린속의 전장은 어디까지나, 액션활극이나 스릴러로 치환될 뿐이다. 생생하게 전장을 묘사할수록, 그것은 휘황한 스펙터클일 뿐, 눈앞의 현실로 전쟁을 체험시키진 않는다. 아마도 부시행정부가 꾸민 사기협잡극의 재구성 정도?


생각하는 직장인의 표상, 로이 밀러

 

다만, 내가 본 <그린존>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이는 한마디로 ‘직장활극’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로이 밀러는 충직한 직장인, 그 자체. 말하자면, FM (직업)군인이다. 우리가 아는 군인의 임무에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대량살상무기팀의 팀장으로서, 이라크가 숨겨놓은 WMD를 찾아내는 명령을 받고 복무한다. “무기를 찾아 사람들을 구해야죠.” 군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복무정신이 드러난 대사만 봐도 그렇다. 



그런 그를 희롱(?)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쟁이다. 아니, 앞서 언급한 전쟁의 본질에서 엿볼 수 있듯,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 ‘믿을만한’ 제보자의 말에 따라, 그의 팀은 몇 차례 수색에 나섰지만, 웬걸. 있다는 WMD는 없고 허름한 변기공장이나 공터만 덩그러니. 아니 변기공장에서 분출한 암모니아(!)가, 살상용 화학무기라는 거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픈 충직한 군인에게, 자꾸 허탕만 치게 만들다니.


의심 혹은 의혹은 당연하다. 회사(군대)에서 하달한 명령에 따라 충직한 직장인(군인)의 임무를 다하고 싶었건만, 이거 뭐가 잘못된 거지? ‘직장인’ 밀러가 돋보이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 엄혹졸렬한 시대. 직장에 붙어있기만 해도 감지덕지지, 생각은 무슨 생각, 이라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직장(의 명령)을 신성한 것으로만 여기고, 특히 군대의 특수성을 들어, 그 명령이 신성하다고만 말한다면, 굳이 당신을 인간으로 취급하진 않겠다. 조건반사의 토끼나 파블로프의 개이거나 그저, 노예일 터이니. 아마도 그렇다면, 신성한 것에 의심하는 것은 ‘죄’가 될 터이고, 복종만이 남아있겠지.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하자면, 인간의 기본 전제가 아니던가.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마르퀴 드 콩도르세는 인간을, 생각하는 자와 믿는 자로 나눴다. 인간에 대한 두 계급. 주장(생각)하는 계급, 즉 주인계급과 그 주장을 믿는 계급, 노예 계급으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지배세력이 강제 주입한 의식을 내면화한 ‘믿는 노예’와 ‘생각하는 인간’.


충직한 직장인 로이는, 선택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직장인(군인)으로. 어쩌면 그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한 선택이다. 직접 단서를 찾아 나서는 로이. 왜 믿을만하다는 일급정보가, 왜 자꾸 삑살이가 나는지, 그는 궁금하다. 그의 일부 부하는, (군인이) 명령에만 따르면 되지, 왜 나서냐고, 반문하지만, 그는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생각하는 직장인이다. 덕분에, 꿍꿍이 많은 국방부 간부 파운드스톤(그렉 키니어)이 제동을 걸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상사가 아니고, 직업(의 임무)이다.


그러니 단지 생존만을 위해 직장에 흡착해야 한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다. 직장 없는 설움과 비굴함을 강요하는 더러운 세상이지만, 실재 ‘전장’이라는 무자비한 곳에 있는 로이도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가 본 <그린존>은, 기자들마저 정부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현실도 꼬집지만, 생각하는 직장인이 무엇인지, ‘개념’을 심어줬다. 여전히, 미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천안함 침몰사태와 거듭되는 반도체 공장의 의문사(!)와 악어의 눈물을 흩뿌리다 위기를 들먹이며 다시 제왕 자리에 복귀한 작자(‘이거(뭐)뉘’하는 어처구니없음과 ‘돈 거뉘’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에게 아무 말 않고 복종하는 주류 미디어와 별셋 임직원의 모습을 지닌 우리네 풍경이 참으로 씁쓸하다.


리영희는, 인간의 반대말, 부정을 ‘노예’라고 일컬었다. 생각하는 것이 자유를 가져오며, 자유가 인간의 전부라고도 했다. 노예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이다. 수백 만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도 집에선 아내와 자식을 아끼고 사랑했고, 상부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직장인(노예)이었다. 이를 보고 ‘악의 평범성’을 들먹인 한나 아렌트는 그랬다.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닌 ‘의무’라고. 충직해야 할 것은 상부나 상사의 명령이 아니라, 직장이나 직업이며,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할 때 우리는 노예가 아닐 수 있다.


가장 보통의 직장인, 아니 어쩌면 보통보다 약간 못한 직장인으로서, <그린존>은 그런 영화였다. 지금 여기의 직장인들, 특히 입 닫고 묵묵히 있는 천안함 관련 국방부 관계자들이나 삼성 임직원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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