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문.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 남자. 이소룡이라는 신화 혹은 전설의 모태라니, 이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엽문1>은 그래서 봤다. 이소룡이라는 신화의 원천에 있는 무술(무예)을 전수한 사람. 그것은 이소룡(이라는 세계)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창이 될 것이고, 이소룡과 별개로 엽문이라는 어떤 세계에 대한 입문일 수도 있겠다. 더구나 이름을 직접 딴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면, 장삼이사로선 그가 구축한 세계가 궁금도 할 터.
<엽문2>는 <엽문1>의 결을 그대로 따른다. 말인즉슨, 좋게 말해서 내부 단결용 영화, 내 식대로 까발리자면, 중화민족주의 프로파간다(선동) 영화다. 1편이 반일감정을 부추겼다면, 2편은 좀 더 넓어졌다. 반서구다. '양코(극중에서 그렇게 부른다) 고홈'.
아, 오해말자. 당시 시대가 시대니만큼 반일이나 반서구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걸 드러내는 방식이, 만듦새가 후지다는 거다. 너무 직설적이다. 극 중의 서양인들은 아예 이마에 두르고 나온다. '서양은 악'. 생긴 것부터 어쩜 그리 악질적으로 생긴 놈들만 캐스팅을 했는지. 부러 표정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더욱 헐겁다. '나, 악당이요'하고 대놓고 내세우는 꼴은 선악 구분에 혼동될 관객을 위해서였드냐.
내용이라고 다르지 않다. 때는 바야흐로 1950년대. 극 초반 중국을 떠나 홍콩에 정착하고자 온 엽문(견자단)은 생계 때문에 도장을 차린다. 파리만 날리다,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돌(잘 생겼다!) 하나 받아들이면서 제자가 하나둘 늘어나나, 여기라고 텃세가 없는 게 아니다. 협회 비스무리한 것이 있어서, 용 나는 꼴 못 봐준다. 각 파의 사범과 겨뤄 실력도 인정 받아야 하고, 돈(협회비)까지 내란다.
엽문의 무예야, 말해야 똥구멍만 간지럽고. 돈은 외세로부터 지켜주는 비용이래나 뭐래나. 영화만 본 바로선, 홍콩의 무술협회장격인 홍진남(홍금보)는, 외세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양다리 내부 결속자로 파악된다. 뭐 홍진남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애비라고 영화는 슬쩍 비춰주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그림이다. 물론 이것이 엽문의 훌륭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들과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청렴결백 꼿꼿무예인 엽문이다. 갈등이 불거지지만 그는 깨방정 떨지 않는다. 중재하고 화해하고자 애를 쓴다. 영춘권이 중용의 무예라고 하더니, 고수 답다. 그의 무예는 예의가 있으며 개념이 있다. 멋지다. 더구나 실제 무예고수인 견자단이 만든 엽문의 몸놀림은 캬~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멋지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외세(서양)의 본격적인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국면 전환. 아니, 그 내부 갈등을 통해 흥미진진한 무언가가 도출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건 뭔가요~ 털이 복슬복슬도 아니요, 수북하게 쌓인 짐승 권투챔피언 트위스터와 비리 양코 경찰서장이 험악한 인상을 들이밀면서 영화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파르게 급전직하 한다.
영국의 위대함을 권투로 보여주려는 무식한 식민주의자들이 미개한(?) 피식민지인들의 무술에 시비를 건다. 문제는, 서양인들의 무식함을 너무 무식하게 드러냈달까. 또 중국 무술인들이 민족적 자존심, 무예인의 긍지 등을 내세우는데, 앞서 자기네들끼리 보여준 찌질함을 생각하자면, 놀고 있다. 깨방정 와르르르르.
더 이상은 굳이 얘기 안 해도, 안 봐도 비디오 되겠다. 티격태격하던 중국 무예인들은 하나로 뭉친다. 외부의 적 앞에 내부가 본의 아니게 하나되는 그 흔하디 흔한 경우. 홍진남이 먼저 나서서 KO 되고, 언제부터 홍진남을 진정한 무예인으로 인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엽문이 비장하게 영국에, 트위스터에 도전한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 엽문의 대역전극. 정해진 수순이다. 그들의 손발 오그라드는 반서구 중화민족주의가 아주 극강의 게이지를 친다.
물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실제 엽문은 훌륭한 무예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항일투쟁도 하고, 서구의 억압에 저항한 인물이 아닐까도 싶다. 당대 존경 받았고, 존경 받아 마땅한 스승이자 선대. 그러나 영화에서 그는, 그저 도구다. 아마 중국내 몰지각한 막장 개발과 천민 자본주의의 창궐로 내부 갈등 게이지가 높아지니, 이런 프로파간다를 통해 중화민족주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가? 이건 아니잖아~ 엽문만 불쌍해. 엇비슷한 내용을 담았지만, 만듦새가 훨씬 좋았던 <황비홍>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엽문은 그러니까,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없을 남자다. 영화는, 그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 '팍스 차이나'겠지만. 그 대망이 자꾸 위험해 뵌다. 영화도 찌질해지고.
그나마, 영화의 마지막이 가장 좋았던 이유. 이소룡이 마침내 등장했다. 13살의 꼬마 이소룡이 등장해, 은근히 <엽문3>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 이소룡 특유의 액션을 보여주면서 은근슬쩍 후속작을 흘리는 센스!
2010년은 야뵤오오~ 이소룡(1940.11.27~1973.7.20)의 탄생 70주년이다. 덩달아 엽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엽문3> 곧 나오는 것이냐. 다른 엽문도 만들어지고 있단다. 홍금보, 원표 등이 나와 엽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엽문전전>이 있고, 특히, 왕가위 감독. 장삼이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아파트 광고에 더이상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주신 우리의 현명한 여신 송혜교와 양조위가 주연을 맡아 엽문의 일대기를 재조명했다는 <일대종사>. 나는 왕가위니까, 송혜교니까, 무조건 기대! 아무렴, 왕가위가 '팍스 차이나' 깃발을 들 리는 없잖아!
이곳에 첫발을 디딘 청년은 휘둥그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변화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던 여행객이자, ‘까르페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순간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둔 그는, 사진 속 뉴욕이 제 눈앞에 펼쳐지자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말하자면, 뻑 갔다는 얘기다. 짧은 시간, 뉴욕에 사는 친구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곳만 다니고, 좋은 것만 먹고 마셨으니, 좋을 수밖에. 이방인에게 뉴욕은 더할 나위 없는 별천지였다. 뉴욕은 먹기 좋은 솜사탕이었다.
맞다. 인정해야겠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경험한 뉴욕이었다. 표백제로 말끔히 얼룩이 탈색된 뉴욕. 고작 여행을 떠나 잠시 스친 뉴욕에 내 로망을 던졌다. 물론 인정했다. 여행하는 이방인의 찰나적 도착증에 가깝다는 것. 정작 도시의 속살은 알지 못한다는 것. 휘황찬란함과 빛나는 문화예술 역시 노동자들이 지탱하고 있으리란 것. 그렇다고 그 로망을 압도할 순 없었다. 내 짧은 뉴욕은 ‘신자유주의의 중심 요새’라는 강박적 관념을 일순간에 날릴 정도로, 나를 휘감았으니까.
영화, 뉴욕을 만나다.
그해 겨울, 뉴욕으로 떠나기 전 읽은 책이 『안녕 뉴욕』. 저자 백은하(의 글)를 흠모했던 나로선, 그녀가 기자질을 털어내고 훌쩍 뉴욕으로 떠나 영화와 함께 한 408일이 참 좋았다. 그녀처럼 온전하게 털어내지 못했지만, 그 휴가의 끝물에는 털어내야 할, 아니 털어내기로 작정한 직장이 있었다. 영화로 뉴욕을 즐긴 그녀만큼은 아녔지만, 뉴욕의 여느 명소 따윈 필요 없어! 책이 말하는 곳이 곧, 나의 발걸음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잖아! 내 심장을 건드린 영화의 장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 그건 곧 영화가 다시 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과 동의어 아니던가! 아, 물론 아니면 말공. ^^;
뷰티풀 워킹 뉴욕데이즈!
뉴욕촌놈, 그래도 뉴요커였던 친구 녀석과 싸돌아다녔다. 녀석은 집과 회사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당시 나의 뉴욕행 덕분에 뉴욕을 함께 엿본 녀석이 더 놀랬다. 아니, 뉴욕에 이런 것이~ <세렌디피티>의 흔적을 찾아, <인 더 컴퍼니>의 사랑이 꽃피는 커피하우스 등을 찾아다니며 황홀했다. 그저 나는 여행객이었으니까. 나는 어떤 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을 휴가를 받은 상태였으니까.
아, 걷고 또 걸어도 아름다운 뉴욕의 날들이여. 그땐 그랬다.
뉴욕, 한국을 삼키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뉴욕은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채색되고 있었다. 그건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뉴욕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유령(?)도 배회했다. 한국 사회까진 몰라도 적어도 내가 발 디딘 서울은 그렇게 뉴욕에 목을 매고 있었다. “현란한 형용사에 매혹당한 한국 사회는 뉴욕의 창조성, 예술, 문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에만 취해 있다.”(p.8)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뉴욕에서 좋은 기억만 품고 온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도 며칠 가봤는데, 뉴욕 정말 좋더라.” 내가 뉴욕의 속살을 제대로 맛보기라도 했어야지. 관념이야 뻔했다. 뉴욕 역시 먹고사는 게 전쟁이며, 각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겨울 거라는. 안타깝게도 내가 헤매고 다닌 뉴욕의 거리와 시간은 내게 그런 삶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보질 못했다. 나라고 다를 바 있었겠나. 나는 고작해야 뉴욕의 빛나는 문화예술의 현장을 목도하고 싶은 이방인이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첼시의 화랑, 타임스광장, 센트럴파크, 소호 등. 월스트리트 정도만 빼고는 내게 뉴욕은 뷰티풀, 판타스틱, 어메이징 시티였다.
‘시크한 디즈니랜드’, 뉴욕.
그럴듯한 묘사다. 어른들의 로망이랄까. 시크함이라는 표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 뉴욕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최소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쩌면 나도 그 스타일 소비에 작게나마 일조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꼭 가보라며, 주위를 선동하면서 환상을 주입한 죄! 뉴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뉴욕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면서. 나는, 반성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뉴욕은 ‘하이퍼뉴욕 hyper-New York’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대중문화․잡지와 신문을 통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뉴욕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의 과정은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것처럼 “기원의 흔적을 철저하게 은폐시키며, 그것들을 생산해낸 노동과정이나 생산에 내포된 사회적 관계들의 흔적도 모두 은폐시킨다.”(p.29)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미덕은 이렇다. 스타일로서만 존재하던 뉴욕에 어떤 피가 흐르고, 속살을 벗기면 어떤 아픔이 있는지, 무엇이 진짜 뉴욕을 지탱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 들렀을 때, 그 표피에 압도당한 탓에, 나는 몰랐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커피를 뽑아주는 사람, 커피를 건네주는 사람, 커피 값을 계산해주는 사람, 그들도 나 같은 노동자임을. 그들은 투명인간이 아니었다. 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행복 하고 싶고, 꿈을 꾸고 가꾸면서 하루를 버티는 노동자. 어디 매장이나 식당을 들러도 역시나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노동자들.
진짜 뉴욕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뉴욕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뉴욕의 속살을 볼 수 있다. 고난의 시절을 거쳐 뉴욕에서 잘 나가게 됐다는, 가령 한국인의 뉴욕 유수의 투자은행(IB) 입문기였던
《서른 살,
꿈에 미쳐라》와 같은 성공 서사로 포장된 뉴욕 소유담, 아니다. 꿈도 아닌, 어떤 목표에 도달한 것을 놓고선, 성찰이나 세계에 대한 고민 없이 ‘나처럼
따라하면 돼’라고 읊조렸던 어이없던 기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생한 뉴욕. 눈에 띄지 않지만, 뉴욕을 진짜 지탱하는 것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다. “…소비자본주의 시대 한국에서는 뉴욕에서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한국인 뉴요커의 도전과 좌절, 성공과 실패, 자아 찾기 식의
서사가 많아졌다. 아이비리그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꿈과 노력이 부각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p.261)
브런치의 사회적 의미를 아는가.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브런치. 우리가 ‘아점’이라고 부르던. 그런데 브런치라고 호명함으로써, 그것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른바 ‘구별 짓기’가 이뤄진다. 아점을 먹는 사람과 브런치를 먹는 사람 사이. 생각해보라. 그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웃긴 거다. 브런치는 하나의 뉴욕 라이프 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그러나 저자는 브런치가 뉴욕의 보편적 문화도 아니요, 중간계급 이상의 전문직업인, 예술가, 대학생 등 충분한 여가시간과 경제적 능력을 가진 계층이 선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브런치가 곧 뉴욕, 아니올시다.
뭣보다 브런치를 내놓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하나의 계급적 상징이자 남과 구별 짓기 위한 기호로 쓰이는 브런치. 그 우아하고 맛있는 브런치를 내놓기 위해 누군가는 일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서만 추구되고 충족될 수 있다.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정리하거나 레스토랑에서 물을 따라주고 가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 네일숍에서 손발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칠해주는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뉴요커의 삶은 결코 있을 수 없다.”(p.46)
브런치의 가격이 비싸지 않은 이유가 있더라.
다른 도시보다 임대료가 높은 뉴욕임에도 레스토랑의 브런치 혹은 식사료가 다른 도시와 비슷하거나 낮은 이유는 바로 저임금 이주노동자 때문이다. 이들은 물론 뉴욕의 화려한 때깔과 매끄럽게 다듬어진 풍경 뒤에서 보이지 않는다. 디폴트임에도, 모두에게 쉽게 인식될 수 없는 비극. 그들이 자취를 드러내면, 브런치는, 뉴욕(스타일)은 없어지는 모순. 젠장, 일하는 사람들의 고단함이란.
커피노동자인 내게도 그것은 어쩌면 슬픔이다.
커피를 볶고 추출해서 손님에게 건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 커피 생산자들의 노고와 자연의 고마움을 인식하고 있지만, 나의 고단한 노동은 아마 베일 속에 가려있을 것이다. 커피 한 잔에 담긴 노동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종종 커피 한 잔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커피가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커피 노동의 보람과 행복을 찾지만, 그것이 이 팍팍하고 부박한 현실의 삶을 바꾸진 못한다. 그저 그것은 버티고 견뎌야 하는 일일 뿐이다.
‘워킹푸어’가 떠올랐다.
뉴욕이나 서울, 이 커다란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는 삶. 일하고 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일할수록 가난의 덫에 더 강하게 묶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외로운 존재. 뉴욕이든 서울이든, 그곳이 제공하는 많은 삶의 기회는 그런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월스트리트의 부와 타임스광장의 대중문화, 소호와 첼시의 예술이 뉴욕을 활기차게 만들지만,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이 없다면 뉴욕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p.65)
이 말은 분명한 현실이기에 아프다.
“이제 부지런히 일하던 이들이 도시의 주인임을 주장하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한때 사회민주주의적 도시를 경험했던 노동자들은 지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다.”(p.66) 저임금 노동자들이 없으면, 한 도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함에도, 누구나 이에 동의할 것임에도, 누구도 그만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 뉴욕에서도 그렇겠지만,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뉴욕의 속살을 보면서 한국의 도시를, 당신과 내 노동의 실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뉴욕은 그래봤는지 몰라도, 노동자가 한국에서 어느 한 도시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다. 하긴 지금은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비극은 그것. 워킹푸어 혹은 가난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한 사회의 지탱 혹은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도, 그들의 행복은 사회 전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건 정혜윤의 말인데, 뉴욕의 저임금 이주노동자나 이 땅의 저임금 노동자에게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지방선거가 있었다.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는 뉴욕에 어느 시장이 들어서는가에 따라 변화된 모습, 즉 뉴욕의 역사와 감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려준다. 흥미롭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도 책은 수정해줬다. 줄리아니가 범죄적 뉴욕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발붙이고 사는 서울을 생각한다. 이곳의 시장은 앞선 4년 전과 같은 사람이다. 아마 삽질은 계속 될 것이다. 노동자를, 워킹 푸어를, 청년을 생각하지 않는 건 매한가지일 거라고 예단(!)하고 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 정부도 가난을 구제하고 약자를 지켜야하는 책임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책임이 회복되지 않을 4년을 속단(!)하고 있다. 편파적인 생각이라도 어쩌겠나. 지난 4년의 학습효과다.
실은 걱정이다.
커피 노동자면서, 서울 시장이랑 니 삶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묻는 당신에게, “당연히 상관있다”고 말하겠다. 지금 서울은 내 삶의 터전이고, 내 삶의 질은 도시 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좌우된다. 르네상스 시장의 재등장은 기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정치적 기획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들끓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뒤로 미뤄졌다.아마, 커피 노동자로서의 내 삶은 서울을 지탱할 의무가 없음에도 서울을 지탱하는 작은 한 축이 될 것이며, 내 삶을 향상시켜줄 의무가 있는
서울시는 언제 그런 의무가 있었냐는 듯이 말간 얼굴로 삽질을 계속할 것이다.
‘새로운 서울 만들기’라고?
그러면서 만든 구호들은 붕붕 떠다닌다. ‘세계 디자인 수도’ ‘명품도시 마케팅’ ‘한강 르네상스’ 등등. 그런데, 그게 좀 웃긴다. 서울에 사는 보통 사람들, 노동자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이 없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겠단다. 브랜드 가치는 뭐고, 경쟁력은 또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삼투압할 건데? 그저 성과를 자랑질할 수 있는 수치에만 죽도록 매달린다.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서울 시민도 서울이란 도시에 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다며 자신의 비전을 정당화하지만, 어떤 파리지앵이고 뉴요커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도시 마케팅에 수천억을 쏟아 붓고, 한강 인공 섬을 만드는 데 9백억을 들여 서울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010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이뤄냈다.”(p.262)
광장이 필요해.
뉴욕의 광장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1910년대의 유니언광장. “우리는 혁명을 하기 위해 모였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유니언광장에서 말할 권리는 우리가 땀 흘려 버는 빵보다 더 중요했다.”(p.163) 광장에서 말할 권리와 개방성. 광장의 정신은 ‘Let It Be’라고 했다. 그런데, 당신과 내게 있는 광장에는 그 정신이 없다. 우리의 것도 아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권력의 조급함과 강박증만 느껴진다.… 정치적 야심을 위해 만들었건 건축학적으로 실패작이건 시민들에게 주어져야 비로소 ‘광장’이 된다.”(p.170)
물론 뉴욕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이윤과 분리주의에 입각한 공공장소의 개방성 축소문제. “이런 현상은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어떤 특정한 인구를 끌어들이고 다른 특정한 인구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친다. 소비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개방적이지만, 저항하러 오는 자들에게는 닫혀 있다. 돈 미첼은 공공장소에 대한 위협은 단순히 “공공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고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을 줄이는 관리와 디자인의 방식이다.”라고 주장한다.”(p.167)
다시 뉴욕을 생각한다.
지난 뉴욕 방문에서, 나는 ‘뉴욕’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뉴욕을 만드는 노동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특정 시공간과 인간 사이의 구체적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뉴욕 스타일에만 현혹됐던 게다. 상품화된 라이프스타일, 즉 교환가치를 가진 기호에 홀딱 넘어가면서 뉴욕의 속살을 살펴보고 사유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뉴욕을 낭만으로만 인식했던 허약한 사유체질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뉴욕을 간다면, 스타일이 아닌, 생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은 미국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말했고, 뉴욕 스스로도 그렇게 선언했다. “소설가 폴 오스터는 어느 인터뷰에서 “뉴욕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 도시국가가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뉴욕에 애정을 가진 많은 이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아메리칸’보다는 ‘뉴요커’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제국의 국민보다는 관용이 살아 있는 뉴욕의 시민이 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민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pp.342~343)
그러나 지금은 뉴욕이 그 뉴욕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다움’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한 공연에서 부시 행정부를 풍자하던 코미디언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뉴욕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욕이 점점 아메리카처럼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오래된 농담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뉴요커로서의 자부심과 미국인으로서의 자괴감이 뒤섞인 씁쓸한 웃음이었다.”(p.343) 관용은 휘발되고 법과 처벌을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재하고 추방하는 현실. 내가 있는 이곳의 지금이라고 다른가.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제목이 품고 있듯, 여기 나온 뉴욕도 뉴욕의 모든 것이 아니다. 편파적 보고서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지 않았던가. 모든 뉴욕은 모두 편파적이다. 그게 뉴욕이다. 너의 뉴욕, 나의 뉴욕, 그들의 뉴욕. 저자는 뉴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상인으로서 뉴욕을 전해줬다. 이방인이자 여행객으로 뉴욕을 살짝 맛보고 온 나의 뉴욕이라고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벗겨보지 못한 속살을 남겨뒀을 뿐. 그 속살의 일부를 저자가 전해줬을 뿐. 간혹은 그가 전하는 뉴욕의 흔적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뉴욕은 여전히 내 기억의 숲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게다. 내게 한 뼘 정도는 넓어진 뉴욕, 언젠가는 그곳에 내 일상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아마 내 세계는 두 뼘 정도 더 넓어지고, 내 우주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때도 여전히 나는 노동자로서, 뉴욕을 지탱하는 저임금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내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는 날, 당신에게도 그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월드컵을 즐기지 않아. 돈 잔치라거나 축구공에 담긴 불편한 진실 혹은 한 방송사의 독점 횡포 등과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라규! 축구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는 것, 알아. 팽팽한 근육끼리의 충돌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몸의 향연! 그것이 왜 싫겠느냐마는, 한국팀 경기는 왠지 좀 불편해. 때론 끔찍해. 그 한 목소리 때문이야. 대~한민국. 일사불란함을 유도하는 그 함성,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것 같애. 그곳에 개인은 없지. 오로지 군집만, 무리만. 대~한국인들만.
맞아. 지금은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월드컵 시즌. 슬슬 달아오르고 있네. 곧 후끈해지겠지. 어딜 가나 월드컵이 덤벼. 싫건 좋건, 이벤트를 비롯해 각종 광고를 맞닥뜨려야 하고, 어딜가도 화제로 꺼내지. 그러고 보면, 월드컵은 일견 우리 사회를 멈추게 하는 마취제 같지 않아? 어떤 사유도 허락되질 않지. 다른 목소리와 다른 이슈도 납작 엎드리지. 아무리 소리쳐도 삐져나올 구석은 없어. 감히 월드컵 앞에. 으르렁. 물론 나라고 과거가 없었겠니. 나도 한 때는 그 한 목소리에 파묻혀 지랄발광했더란다.
때가 때이니만큼 지금 다시 사람들이 월드컵을 화제로 꺼내. 별 관심 없다고 답하면, 허허, 완전 의외라는 눈초리 찌리릿! 별종 취급을 당하지. 약간 과장하자면. 어디 외계에서 왔니? 감히 월드컵을, 대~한민국을 외치는 않는다고? 넌 우리와 같은 족속이 아니구나. 월드컵을 앞둔 한국인의 방침에 어떻게 따르지 않니. 똑같은 생각만 하라는 무의식적 강요. 그러니까, 어느 편인지 답해야만 하는 구조. 다른 생각이라고? 넌 ‘틀린’ 놈이다. 나가 죽어라. 흑.
맞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저 함께 즐기자는데, 뭘 그리 까칠하게, 까탈스럽게 구냐, 응? 음, 그러고 보면, 그것도 맞아. 즐기지 못하는 놈이 바보지, 뭐. 전체가 원하는데,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그런데, 그게 좀 무서워. 거칠게 말해,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든. 오버지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무의식의 유령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도 했더란다. 나, 아마 월드컵에 대해 삐딱한 생각, 불온한 생각 한다고, 끌려가지 않을까. 국가적인 시책에 동조 안 하니까. 한국인 아닌 거야, 그런 거야?
그래, 나는 이미 ‘틀린’ 몸. 그냥 포기할래. 응원하고 싶어도, 즐기고 싶어도, 그 한 목소리가 여전히 무서워. 앞서 우리를 들끓게 했던 천안함, 교원노조 명단 공개, 지방선거 등에서도 사회 일각에서는 ‘니가 어느 편인지 커밍아웃해’라고 깨방정을 떨더라. 지들 높은 양반들 생각과 다르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며 윽박이나 지르고 말이지. 나, 한국인이긴 한데, 월드컵 때 꼭 한 목소리 내야 하는 거야? 어느 팀인지 꼭 밝혀야 되는 거야? 다른 팀 응원하면 안 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드래곤 길들이기>가 기가 막혀~
그런 찰나에 만난 이 영화, 짜잔. <드래곤 길들이기>. 결론부터 말할게. 나, 위로 받았어. 바이킹과 용(드래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빚어낸 앙상블이 와우, 완전 죽여. 아니, 정확하게는 용맹한 바이킹의 못난(?) 자손, ‘히컵’이 드래곤을 통해 바이킹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완전 감동이었어. 한편으로 꼭 지금의 우리네 풍경을 풍자하는 것 같아서 감탄도 했다규. 저 멀리 할리우드(드림웍스)에서 만들었는데, 어쩜 우리네 모습을 대입해도 저리 어색하지 않을까. 신기신기~
아니, 뭘 어떻게 봤길래, 그리 호들갑 떨고 있냐고. 좋아 좋아, 한 번 들어봐. 호들갑 한 번 신나게 떨어볼게.
이 영화가 실재 바이킹(족)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긴 그건 상관이 없겠다. 여기 버크섬에 살고 있는, 내가 본 바이킹만 놓고 말하자규. 이 바이킹의 모토는 ‘용맹’. 그 옛날, 반공을 국시로 했던 대한민국마냥, 버크섬에서 용맹은 족시야. 그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 드래곤과 싸워서 이겨야 해, 죽여야 해.
포악하고 사나운, 하늘을 날고 입에서는 불을 뿜어대는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말이야. 바이킹이 되려면, 즉 바이킹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드래곤을 포획하고 죽이는 ‘사명’을 품고 전사로 살아야한다는 거지. 그 옛날, 간첩이라면 곧장 신고하고 북한이라면 쳐 죽여야 할 주적으로 간주해야 대한민국의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바이킹의 방침, 대한민국의 방침(아 물론 정확하게는 권력자의 방침).
어린 바이킹들, 어른들로부터 주입된 그 방침, ‘받들어 총’이야. 전사가 되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씩씩대더군. 진짜 바이킹이 돼야 한다는 미명 하에, "드래곤과 싸우는 것 그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명제를 고스란히 주입받는 아이들. 예쁜 미소녀 바이킹, 아스트리드도 거침 없이 말해. "바이킹이라면 용을 마땅히 죽여야 해." 무셔워, 무셔~
문제는 이것. 일생을 바쳐 용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데. 가공할 공격력과 습격을 일삼는다는 용들 때문에 만나는 즉시 죽여야하는 규율이라는데. 사실, '왜'인지는 모르겠다는 거. 드래곤을 불안해하고 보면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왜 드래곤과 주야장천 싸워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만나면 죽여야 한다는 것도 대대로 내려온 한 목소리일 뿐.
그런데 ‘히컵’은 여기서, 좀 별종이야. 사실 참 어렵게 살지. 왜냐고? 아버지가 바이킹 족장이거든. 허나, 히컵은 아버지의 풍채와 호기를 물려받질 못했다네~ 근육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치기만 잔뜩 가진 허약체질 어린이. "위대한
바이킹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라면서 용은 쓰는데, 사고만 치지. 바이킹 사회가 요구하는 전사의 조건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발버둥은 치나, 마음만 앞서지, 몸은 영... 드래곤 훈련도 받아보지만, 적성에도 안 맞고, 전사 기질도 없음을 확인할 뿐이야. 위대한 바이킹 전사의 아들로서 가지는 스트레스, 오죽했겠어.
녀석은 아버지에게 말도 해보지. “빵 굽는 바이킹도 있어야 하고, 하수구를 뚫는 바이킹도 있어야 하잖아요.” 드래곤 잡는 ‘전사’ 바이킹만 있어야 하는 법은 아니라고욧! 전사가 되지 못하는 녀석의 변명 같지만, 아 난 그만, 그 말이심장에 콱! 나도 외치고 싶었다규. 꼭 붉은 악마가 돼야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한 번만 더 되씹어봐. 대한민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잖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이 세상에 말이야. 17등 하는 한국인, 36등 하는 한국인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기자 말고그냥 다른 사람 커피 만들어주는 사람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어쨌든 그런 히컵. 말하자면, 버크섬 바이킹 사회의 루저. 어떻게든 인정투쟁도 해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해. 칼 찌르고 도끼 휘두르는 건 젬병인걸. 그랬던 그가 부상당한 드래곤, 특히 바이킹의 드래곤 교본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신비함과 두려움의 존재인 나이트 퓨어리, ‘투쓰리스(toothless)’와 만나는 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우연한 시발점이더라.
녀석은 부상당한 투쓰리스를 죽이지 못하는데. 우연하게도 바이킹 역사의 한획까지 긋게 되지. 짜잔~ 300년 만에 처음으로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는 바이킹의 탄생!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어린 그리고 완전 새로운 바이킹. 바이킹의 방침에 어긋나는 뉴 바이킹의 탄생. 브라보~ 신인류여.
히컵과 투쓰리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지. 한쪽을 죽여야 사는 줄 알았는데, 어라 그게 아니네~ 서로 알지 못했던 존재들이, 각자의 취향도 알게 되고, 조금씩 자신을 보이면서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 참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어떤 현실의 풍경이 떠올라 짭쪼름하더라. 아예 등 돌린 채, 이전보다 더욱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남조선과 북조선. 오해를 거두니까, 서로를 알게 되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히컵과 투쓰리스는 보여주더라, 이 말씀.
우리에게도 히컵이 필요해
딱 나오더라. 날 때부터 바이킹의 DNA에 박혀 있던 것으로 알았던 ‘드래곤 죽이기’는 ‘바이킹 길들이기’의 과정에서 심어 놓은 사육의 결과! 사실 바이킹 꼰대들도 몰라. 자신들이 드래곤을 진짜로 알고 있는지. 그저 자랄 때부터 싸워서 죽이라는 것만 배웠고, '왜'라고 묻지도 않았으며, 드래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거야. 드래곤을 오해하고 있으니 만나면 죽여야하고 두려워했던 거지. 자신의 아이들에게 알려준 정보도 그렇게 갇힐 수 밖에 없는 정보일 뿐. '적'이라고 하면서 진짜 그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야.
히컵은 분명 다른 존재야. 바이킹이면서 전혀 바이킹스럽지 않은. 그들 사회에서도 혀를 끌끌 차게 만들던 존재였지만, 그의 진짜 재능과 능력은 다른 곳에 있었던 거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어른 바이킹들은 그야말로, 아둔한 꼰대들. 죽여야 할 드래곤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드래곤임을 알아챈 히컵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바이킹이었던 거야. 적을 대하는 자세부터 어른 바이킹과 다른. 드래곤의 생태를 알게 되면서 오해를 풀고 두려움까지 거세하고 종국엔 함께 공존하는 기틀을 다지는. 멋지다, 히컵~ 한 목소리에 풍덩 빠지지 않았다는 것도. ^.^
어른 바이킹들은 왜 드래곤이 자신들에게 포악하고 사나운지,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거기서 반짝! 다른 타인을 배척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모습과도 오버랩. 누구 편인지 물어보고, 내 편인지, 남의 편이지 갈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상대를 무력으로 무너뜨려야 제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적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고 죽이는 것이 만사지탄이라고 여겼던 가치. 뭔가 떠오르지 않아? 해석이 약간 지나칠지 몰라도, 대한민국을 헤집고 떠돌아다닌 그 유령. 아직도 잔재가 남아 심심찮게 떠돌아다니기도 하는 유령.
“너희들에 관해 우린 전부 틀렸어.”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드래곤을 제압했던 히컵의 유레카(바로 이거야)! 어쩌면 우리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타인을 이해는커녕 인정하려는 노력도 않고, 우리가 틀린 것도 모른 채, 관행처럼 관성처럼 과거의 맹목에 끌려 다닌 것은 아녔을까.우린 제대로 저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지, 우리에게도 히컵이 필요해. 사회가 요구한 것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난 얼마 전, 쥐소굴에서 흘러나온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어.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할 생각이 없다.” 세상에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지금의 통치자 입에서 나올 소리야? 전쟁이 어떤 것인지 뜨겁게 데여본 나라의 통치자가 전쟁이 두렵지 않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쟁을 해야 유지되는 나라니? 대한민국 누구보다 샤우팅을 사랑하는 동혁이 형아~ 좀 혼내주쇼잉~
꼰대 바이킹들과 똑같은 소릴 해대는 저들은 아직 드래곤을 제대로 몰라. 그저 학습된 잘못된 정보에 의해 조건반사처럼 움직일 뿐. 꼰대 바이킹들도 나중에 히컵에게 사과하던데, 글쎄, 선거결과를 놓고 저들은 제대로 사과할까? 2년 전 반성한다고 했던 것을 하루아침에 반성의 주체를 뒤집었던 쥐새끼는 또 어떤 변덕을 부릴까. 저어기 파란 쥐들이 이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어. 물론 본다고 이해할까마는. 당최 불안한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아서 그걸 사전에 잡아족치려고 삽질부터 하고 보던 현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에게도 권함. 우린, 드래곤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러니. <드래곤 길들이기> 보고 정신 쫌 차려, 응!!!
(아 근데, 이런 불온한 애니를 국내에서 개봉하게 하다니, 쥐세이 니들 참 아무 생각이 없었구나, 그치? -.-;)
아, 그리고 진정 이 이야긴 네게 꼭 해야겠어. <드래곤 길들이기>의 활공 장면! 히컵이 부상당한 투슬리스의 비행을 돕는 기구를 만들어 부착해 주면서 시작한 비행은, 암석 사이를 투과하는 곡예 비행을 거쳐, 아스트리드를 태우고 활공할 즈음이면 그건 짜릿함의 극치야. 롤러코스터를 타고 하늘과 바다를 오가는 쾌속의 쾌감이었달까.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짜릿했었어. 그런 비상 쾌감. 그리고 석양이 비춰올라치면 그건 거의 극점에 가까운 아름다움. ^_______^
아, 나도 드래곤이랑 함께 살고 싶어. 그의 등에 올라타 그 짜릿한 비상 쾌감을 느끼고 싶어. 물론 여자친구도 태워야지. 앙, 드래곤 드래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니. 몰랐다~얘~~ 정말, 드래곤과 함께 살고 싶어질지 꿈에도 몰랐다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