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마도, 봄의 끝-여름의 시작 무렵이었을 거야. 콘서트를 봤어. 노래가 흘렀고, 사람들이 환호했으며, 이야기가 넘쳤다지.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약속이 있었어. 무대로 한 쌍의 커플이 불려 올라갔고, 여느 무대에서나 볼 법한, 흔해빠진 프로포즈 타임이 펼쳐졌어. 남자가 사연을 보내서 채택이 됐나 봐. 사실 그런 프로포즈, 사랑 그 자체의 사랑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용 쓰는 투쟁 같은 측면도 있지만, 때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뭉클할 때가 있지. 이 날 이때가 그랬어.

정확한 사연은 기억나질 않아. 다만, 손발 오그라들었다는 정도. 블라블라, 이야기를 풀던 구애남이 마침내 던진 결정구는 이것이었어. "Will you mary me?"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줄래? 익히 예상했던 말. 더 나가보자면, 뻔하고 식상하며 상투적인 그 말.

그럼에도 아! 그 순간은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

주술이었을까. 그 구애남, 혹시 연애술사? 호잇~


여자는 이 프로포즈를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두 사람, 여길 오기 전, 사전 교감이 있었겠지. 두 사람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더니, 이 구애남, 준비라도 해 둔 양, 좔좔좔 보따리를 푼다. 연인과 꿈꾸는, 행해야 할 혹은 행하게 될 행위를 나열한다.

그건 약속이었어, 약속. 자신의 연인을 향한, 수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증명 받기 위한. 그 약속,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 탈색돼 버리거나 날아갈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염려를 퉁~쳐버렸다. 그 남자의 진심일 확률 99.587%. 여기는 곧, 그 연인의 약속의 장소.


모르긴 몰라도, 그 약속,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구애남의 삶 일부를 규정하는 무엇으로 자리매김했을 거야. 물론, 두 사람의 이후 행보는 몰라. 결혼을 했거나, 헤어졌거나, 아니면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약속, 지키고 있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졌거나.



약속은 때론 분명, 그럴 수도 있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무엇이 될 수 있지. 깨지라고 있는 것이 약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깨려고 하지 않아도 깨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약속이라면, 그건 거부할 수 없는 계시!!!

히로키에게도,
사유리는 그런 존재였지.


“사유리가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이 보였다.”


반짝반짝 눈이 부셔, 예예예예~♪

맞아. 내 또 다른 블로그가 품고 있는 그들이야. 사유리와 히로키. 그래서, 블로그 타이틀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을 그대로 딴. 얼마나 이 작품을 알싸하게 봤으면 타이틀을 그대로 붙였겠어, 그치? ^^ 넌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

모든 것은, 약속에서부터 비롯된 거야.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 사유리에게 던진 히로키의 약속. 언젠가 방과 후에 했던 히로키의 다짐.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여름이었구나. 딱히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한 작은 도시. 중학생 히로키가 절친인 타쿠야와 함께 매혹된 것은, 동경하는 것은, 츠가루 해협 사이에 국경너머로 솟아있는 거대한 탑이었어. 더불어 히로키에게 절대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유리. 아, 아름다운 소녀.

내게도 그때, 여름이었다.

모든 약속은 여름에 하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어쩌다가 여름이라는 계절이 맞물렸을 뿐이겠지. 노을, 가지를 내린 가로수, 가로등 불빛, 우리 마음을 비춰주던 그해 여름의 풍경. 아직도 난 기억해. 넌 그날 우리가 걷던 그 길이 그려지니.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 히로키에게도 그런 날이었어. “난 저 탑까지 갈 거야.” 다짐이었고, “너와 함께”는, 약속이었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 될지라도, 그때만큼은 진심이었어. 히로키는 늘 그 탑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매우 중요한 뭔가가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는 거기에 가야했던 거야.


하루키에게 그 특별했던 여름. 이곳에서 사유리와 함께 저 탑을 바라보며 했던 조그만 약속. 우리도 아주 조그만 약속이었어. 이루지 못할 무언가도 아니었지. 우리가 다시 돌아갈 그곳에서 만나기만 하면, 대수롭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물론 그 약속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때의 우리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됐겠지. 약속을 지키지 못함은, 두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의미하듯 말이야.  

하긴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약속이야 어쨌든, 그곳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으니까. 히로키에게도, 나에게도 그랬어. 약속을 하던 그 시절, 사유리와 세상은 얼마나 빛났던가. 사유리 하나로 세상이 빛날 수 있음을 확인한 이 중학생은 또 얼마나 조숙한 건가. 놀랍지 않나. 물론 그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지만, 그의 독백을 듣노라면, 그의 동경이, 그의 애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쉬이 짐작이 갈 거야.

“3천만 명 이상이 사는 이 도시에서 만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나 아닌 둘이 있을 때, 그리고 군중 속의 외로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는 깨달았나 봐. 이별할 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을 때, 위로랍시고 던지는 이 말들. 세상의 반이 여자라고, 세상의 반이 남자라고. 사실, 그건 위로가 되질 않음을 알지? 그 위로, 사실이긴 하지만, 진실은 아니잖아. 그 여자도, 그 남자도, 세상엔 단 하나뿐인 존재거든. 그 여자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여자도 없으며, 그 남자를 대신할 남자도 없으니까.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사유리.
어떻게 된 일이지? 사유리가 사라졌어.


생각해 봤어. 히로키에게 사유리 없는 세상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그 약속이 아녔을까. 히로키에겐 가끔 꿈에서나마 찾아야 하는 사유리였어. 어딘가 차가운 장소에 홀로 남겨진 사유리를 필사적으로 찾는 꿈. 그럼에도 결국 사유리를 찾지 못한 채 깨고 마는 꿈.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기분에 시달렸지. 그런 히로키를 버티게 견디게 해 준 것은, 지켜야 할 약속이었을 거야. 내가 그랬기에 말이지.


그래, 그때 내가 먼저 돌아왔잖아. 당신을 여전히 그곳에 두고. 당신 없는 이곳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당신과 내가 나눈 그 약속 때문이었던 것 알아? 아마, 모를 거야. 내가 늘 꿈꾸던 건, 당신과 나눈 약속이 지켜지는 순간이었지.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릴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착각을 하고 있었지, 나는.  

“이제는 이미 아득한 그날, 저 구름 너머에 그녀와 약속한 장소가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약속은 현실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어. 시간의 풍화작용에 깎이고, 얼룩도 지고 말겠지만, 어떤 순간에 내뱉은 약속은 그런 것들이 별반 무쓸모 아니겠어. 그건 어쩌면 격렬한 아픔이기도 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까 말이야. “어느 틈에 난 이런 아픔을 안게 됐을까”라고 되물어도 당최 답이 없는 현실도 있으니까.

사실 히로키가 부러웠던 건, 약속을 지켜서가 아니었어. “널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라는 약속 이후의 약속을 할 수 있어서도 아니었고. 아, 물론 그런 것들이 아예 없다고 하면 새빨간 뻥일 테지만, 그것보다 약속을 향해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어쩌면 그 기다림, 뼈가 피부를 찢는 듯 격한 아픔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어서 부러웠다.


내 가난했던 영혼을 채워주었던 당신. 그런 당신과 했던 약속. 그 약속이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미제’로 남은 순간을 나는 기억해. 그저 박제되고 봉인되고 만 그 약속. 그래, 기약 없는 기다림 때문에 바람 빠진 자전거처럼 흐느적거리진 않아도 되지만, 대신 자전거 핸들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순간. 줄곧 당신을 향하던 자전거가 갈 곳을 몰라 휘청거려야 했던.

어디에서였더라. 이런 말이 있었어. “나는 한 줄 책에 실린 글귀에 위안을 받고, 퇴근하는 저녁 길에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 불과했다.” 알다시피, 나 역시 그런 사람이잖아. 한 줄의 약속에 위안을 받고, 매일같이 퇴근길, 약속의 장소를 떠올리며 하루를 지탱했던 나는, 구름의 저편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어. 

그래도, 사유리와 히로키는 내게 또 하나의 ‘약속’을 알려줬어. “약속의 장소를 잃은 세상이라도, 그래도 앞으로 우린 살아갈 것이다.” 잃어도, 그것이 내가 아닌 세상에 의한 것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히로키가 사유리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에 가능한 게 아녔을까. 두 소년과 한 소녀의 염원이 담긴 비행체 ‘벨라실러’는 그런 생의 욕구를 에너지원으로 삼았던 것은 아녔을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던 우리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지만,
우리가 했던 변치 않을 약속은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에도 고마워하면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 사회의 취약한 곳과 소외된 세계에 닿았던 당신의 몸과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벨라실러를 타고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또 다른 약속. 나도 히로키를 따라. 당신을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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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빠바바바 바 바바, 빠바바바 바 바바... 하고 사운드가 기어나올 때,
나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런 감격이 있나, 허. 눈물까지, 시큼.

<대부>를 필름으로 첫 대면하는 그 순간.
이제야 필름 스크린으로 알현하게 된 송구스러움도 꾸물거리고,
지금에라도 필름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도 꿈틀대고,
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엔 내 필력이 딸릴 뿐. 띠바.

<대부>가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빌어먹을 가족 서사는 지금에서도 충분히 현실을 향한 사유를 가능케한다.
하긴 어느 시대에든, 이 서사가 사유와 흥분을 멈추게 할 리는 없지.


아울러, 말론 브란도가 아닌 돈 콜레오네는 상상 불가능.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탓해도 어쩔 수가 없다. 된장.

그가 떠난지 6년.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돈 콜레오네가 쓰러질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부>에선, 시쳇말로, 브란도의 미친 존재감!이 캐작렬.

말론 브란도를 그렸다.
지난 1일이 6주기였다. 아래 기고문은 그래서 나왔다.

p.s. 지난 5월에 개봉한 <대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은,
아직 극장(씨네코드 선재)에 걸려있다. 놓치지 않길 권한다.
특히, 필름으로 아직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오는 30일 팡파레를 울리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 서울!

그 바캉스 시즌에 <대부>가 역시 껴 있다는 즐거운 소식.
8월8일(일) 김영진 평론가의 씨네토크와 함께 펼쳐지는 <대부> 박항스~
13:00다. 엔간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



말론 브란도,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부정한 이름
예술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지난 5월 <대부>가 재개봉했다. 국내 개봉이 1977년(미국은 1972년)이니, 33년 만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이번 버전은, 향수와 함께 바뀐 세대의 스크린 경험을 위한 것이겠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부>는 그렇게 다시 왔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난 <대부>는 위엄 있고, 웅장했다. 경건함과 비장미까지 갖춘 고전적 서사의 재등장이었다. <대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후광효과에 기댄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대부>는 표피만 놓고 보자면, 마피아 협잡극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오해가 되겠다. 마피아로 포장됐을 뿐, <대부>는 당시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관된 문화적 산물이자 서사였다.


마리아 푸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로 우선 각인돼 있다. 재능 있는 신예 감독에서 이 영화로 거장 대열로 성큼 올라선 코폴라의 연출력이 <대부>를 만신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마피아 세계를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류학적으로, 뭣보다 누구도 자유롭기 힘든 가족서사로 <대부>는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돈 콜레오네였던 사나이


그 핵심에, ‘돈(비토) 콜레오네’가 있다. 가족과 패밀리의 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오해받는) 가부장, 돈은 <대부>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말론 브란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제임스 딘도 선망했던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그는, 당시 전성기가 지난 처지로, 제작사는 그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다. 코폴라의 고집이 위대한 <대부>를 만들어냈지만, 돈을 스크린에 현현시킨 것은 전적으로 브란도의 공이었다.



여기, <대부> 카메라 테스트에서의 일화. 브란도는 구두약을 머리에 발라, 비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설 속 인물이 불도그 같이 생겼으니, 화장지를 입안 양쪽 볼에 집어넣었다. 늙은 얼굴과 염색, 어눌한 말투까지 곁들여 우리가 아는 비토, 대부는 창조됐다.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편으로 브란도가 비토를 맡은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이나 스크린에서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연기는 노동자 계급의 것에 가까웠다. 앞선 남자 배우들이 도덕군자와 정의의 사나이에 붙박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그는 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그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 <아가씨와 건달들> 등을 통해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반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는 당대 미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50~60년대 젊은 미국에게 어울리는 배우였다.


침체기였다고는 하나, 그런 반영웅이 선택한 <대부>는 의외였다. 말하자면, 돈 콜레오네는 가부장의 화신이다. “내 말이 곧 법”인 마피아의 절대군주로,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 아버지. 세월에 굴복한 것일까, 그도 늙은 것일까. 아버지가 만든 기성의 규율에 반항하고, 투쟁했던 그가 전성기 이후에 택한 배역이 아버지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거친 짐승 같은 그가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그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반항 기질과 퇴폐적인 매력은 불혹의 나이에도 어딜 가지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짐승을 어찌하겠는가.


파리에서의 한 가지 표정, 브란도


<대부>의 선택이 아버지의 규율에 편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다. 브란도의 다음 선택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졌다.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얼굴. 부성의 체화가 불러온 반발이었을까. 신랄하고 퇴폐적인 폴로 변신한 브란도의 무기력한 정사가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정사를 나누면서 그는 외친다.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세상에 지치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폴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하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허무가 감싼 폴의 얼굴. 그것은 또한 브란도의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증명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개봉 즉시 논란이 됐다.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신 등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것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폴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 그 표정은, 1970년대의 어떤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혁명의 시대가 지났거나, 실패로 끝난 혁명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에 남은 흔적은, 곧 당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끝난 혁명의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던 그 표정.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녹슨 해방구만 남았고, 파멸을 친구 삼아야했던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고.


내가 가장 강렬하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때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파리지앵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자취 때문이 아니었다. 68혁명의 도시를 가고 싶다는 욕구도 아니었다. 숱한 사상과 혁명을 잉태했던 커피하우스에서 향미를 맡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폴의 표정을 잉태한 파리가 궁금했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가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파리에 가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건 브란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배역과 한 몸이 되고 표정으로 말하는 ‘말론 브란도’를 볼 순 없다. 6년 전, 2004년 7월1일, 향년 80세, 그는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무명 시절, 돈을 벌려고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매부리코를 얻었던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이라기보다 반항을 일삼는 터프가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시대를 열어젖혔을 때도, 그는 쉽게 투항하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의 자세였다. 연기에 대해 늘 회의했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불평했지만, 그는 연기했고, 천생 배우였다. 오직 하나였던 배우. 그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죽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일.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일. 그것이 버르장머리 없는 반항아의 파괴적인 일탈일지라도 시도해보자. 예술 안에서 당신안의 짐승을 깨워보자.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7·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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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우리에게, 그렇다.
피 묻은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항쟁이 있었고,
분노와 슬픔을 이끌어냈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다.
반 세기도 넘은 과거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6월을 얘기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것. 월드컵.
현재 진행형인 월드컵도 2010년 6월의 대한민국을 달구겠지만,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에서 이같은 광경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으며, 들은 적도 없었다.
일상의 굴레를 훌훌 던지고 빨간 색으로 국토를 뒤덮은 붉은 악마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자동차 경적과 응원의 함성, 초원을 질주하듯 녹색구장에서 터질 듯한 율동을 선보이던 육신의 황홀했던 순간들… 대한민국은 이 낯선 풍경을 경험했다.

그해 6월, 놀라고 뜨악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축제가 가능할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역주의, 안보반공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 거부하고 싶지만 일상과 밀착된 굴레를 그 축제동안 무시하고 ‘해방구’를 찾아 일탈을 감행했던 기억.
한마디로 짜릿하면서도 무서웠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했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광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고 사소한 취향과 쾌락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축제의 핵심이 몰입이듯, 그냥 즐겼을 따름이다.

축구라는, 전 세계가 공히 즐기는 단일 스포츠종목의 힘은 유사종교나 마찬가지였으나, 종교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교리따위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연대가 엄연히 존재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약자들의 반란이 즐거운 이유

그때 그렇게 우리를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 ‘한바탕 대동굿’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6월을 주도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변방에 있던 한국, 세네갈, 터키 등이 돌풍의 주역이 됐던 것도 즐거웠다. 약자들의 반란이랄까. 약자가 승부나 우열을 뒤집는 쾌감이란, 경기 그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소림 축구>가 그랬다. 그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힘없고 버림받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세상을 놀래키는 승자로 변모하는 ‘깜짝쇼’였다.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주성치’다. ‘희극지왕’이란 타이틀을 가진 홍콩영화계의 주춧돌, 주성치가 축구를 다뤘다.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국 관객들에게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유치짬뽕이거나 혹은 재기발랄. 주성치(영화)의 매니아들은 말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소림 축구>는 예상치 못한 웃음과 애수를 동반한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였으며, 관객을 한 순간에 자지러지게 만드는 황당무계함은 ‘판타지’나 다름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영화속 이야기가 고단한 현실과 오버랩될만 하면, 이내 딴죽을 피우며 농담을 건넨다. 그 예측불허의 기지는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한다. 장르도 뒤죽박죽 섞인다. 뮤지컬, 홍콩 느와르, 서부극, 전쟁극 등 그 변신 한 번, 기발하고 재기 넘친다. 축구를 소재로 이렇게 다양한 서브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랍도다. 한마디로, 예사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

사회적 약자들에겐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어떤 재능과 능력을 지녔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또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약자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실패는 뭣보다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씽씽(주성치)도 그런 면에서 돌연변이다. 소림사 여섯 사제중 한 명인 그는, 쿵푸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꿈꾸는’ 몽상가 청년.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쓰레기더미를 나르는 루저. 아무도 초라한 젊은이의 꿈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꿈에 동반자가 생긴다. 젊은 시절, 페널티킥 실축으로 스타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황금발’. 그 역시 한 번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 쿵푸와 축구의 접목을 원하는 씽씽에게 황금발은 축구팀을 만들자며 떡밥을 던진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현실 속에 침잠한 나머지 소림사 사형과 사제를 찾아 함께 꿈을 찾자고 설득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축구팀이 탄생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홍콩 영화지만, 그건 우리네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이권의 문제에서 어디 자유로운 곳이 얼마나 있으랴. 음모를 통해 탈취한 돈과 권력으로 약자를 깔보고 짓누르면서 자기 잇속만 고스란히 챙겨먹는 축구계의 불한당은 미디어를 조작하고 대중을 농락한다. 버려진 약자들만 고통을 ‘전담’한 채 쓸쓸한 정서를 덮어쓴다.

잠깐 잊지마라. 이 영화, 선전포고 했듯이, 판타지다.
축구라는 판타지를 통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쓸모없다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꾸린다. 굴욕을 당해도, 환멸속에 있어도, 그들은 참고 견디면서 있는 놈들에게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린다. 황당해도 짜릿한 쾌감이다.


그 와중에 끼어드는 씽씽과 무이의 로맨스는 가난한 연인들의 자화상이다. 묘한 울림이다.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와 이를 기우는 사랑의 모습. 사랑에도 스펙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랑은 조건으로 짜집기가 되지 않는다. 씽씽과 무이는 알려준다. 눈물젖은 만두와 함께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판타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소림 축구>를 판타지로 보는 명분은 명확하다. 범접할 수 없는 철통같은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현실은 약자 편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 이미 고정된 신분과 계급의 세습은 ‘질서파괴’라는 죄목으로 역전의 드라마를 어지간하면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구색을 갖추고 전복을 막기 위해, 개구멍 정도만 열어놓고선 ‘세상은 노력하면 이렇듯 살만해’하며 극소수를 받아들일 뿐이다. 선심 쓰는 척 한다.


<소림 축구>가 그런 약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법.
현실에선 뛰어 넘으려다 바지가랭이만 찢어질 일들을 태연자약하게 이뤄낸다. 판타지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 환멸을 참고 견디는 방법. 얼지 마, 죽지 마, 아마도 부활할 거야.


어쩌면 그것이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단한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마약과도 같은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왔었던 판타스틱한 축제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에겐 다시 축제가 열렸다. 신나게 외치며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자유.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으로 다시 편입된다. 축제도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뒤의 허망함을 우린 경험해야 한다. 하루둘 추스리며 생활속으로 편입된 사람살이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판 신명나는 잔치가 ‘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만 뇌리에 박힐 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소소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것. 혁명이든, 전복이든, 뭣보다 우리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에 따라 꿈을 꾸는 것. 그리하여,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어보는 것. 아마도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하며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려 할 것이다. 국운융성이니 국격 상승 등의 아리송한 수사를 써가면서. 국가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는 지도자분들의 근엄한 표정따위는 ‘헐리우드 표정연기’로 치부하라.


지금 필요한 건 뭐?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우리들만의 축제!

나는 그것이 '혁명'이었으면 좋겠다.
축제 같은 혁명.
좁은 뜻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그런 체제 전복적 혁명보다 더 넓은,
혹은 상상력이 가미된 진짜 일상의 혁명.
아, 그런 혁명이 어떤 것일지, 당신과 함께 상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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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많은 또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아니, 내가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주입된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무슨 꿈이 있는지.

대신 그들은,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얼만큼 오르고 떨어졌고, 누가 어떤 집을 샀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뭣보다, 아이들 얘기 빠지지 않는다. 자랑이든 아니든 하나 같이 전문가 나셨다. 특목고가 어떻고, 영어 유치원이 어떠하며, 이 땅의 교육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도 챙기신다. 오, 놀라워라. 더구나 자신의 격한 희생을 강조한다.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 토닥토닥.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철없음의 동의어다. 아이들, 놀게 하면서 자라게 하라, 고 할라치면, 결혼도 않은 철부지의 응석(!)으로 치부한다. 니가 뭘 아냐, 이거다. 가장 보통의 존재도 그때만큼은 가장 철부지로 위치이동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들도 가장 보통의 존재다. 지배세력이 조작하는 욕망에 많이 좌우되는.  

내가 아는, 지금의 많은 제도권 학교는, 격한 말로 ‘사육장’이다. 사람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을 들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이 구축한 세계에 어떻게 투항하는지 알려주고, 지배세력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의심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주입한다. 특히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친다. ‘경쟁 천국, 연대 지옥’.


경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틀 로얄>은 그 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경악할만한 상상력으로 피로 도배질한 학창시절의 풍경을 다룬다. 극단으로 몰고간 미래상이자,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른들이 구축한 악행의 뒤틀린 결과물이 토해놓은 난장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충격적이다.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 80만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 1,200명.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에 자신을 잃은 어른들은 위협을 느끼고 정부는 배틀 로얄(Battle Royale : BR)법이라는 무식한 법률을 제정한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법률은 전국을 통틀어 일년에 한 학급을 무작위로 선발, 무인도에서 3일동안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내용.

겁나게 살벌하다. 학살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강한 어른’을 만든다는 명분이다. ‘세상 = 정글’이란 방정식을 내놓고, 학생들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으로 내몬다. 학생들도 얼떨결에 이 수작에 휘말린다. 복불복이다. 여기, 수학여행길에 나섰다 얼떨결에 무인도로 끌려온 42명의 학생들이 황당한 현실에 직면한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 끔찍한 살인극의 무대에 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바이벌 게임의 아이콘으로 등장해야 하는 그들에게 친구는 없다. 친구는 곧, 장애물이다. 친구의 선택마저 조정하려는 지금의 많은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치도록, 아이들의 감정마저 조절하려는 어른들.



비정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독한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는 그들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다.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섬뜩한 영화 카피가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순간이다. 자, 죽일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하나다. 대체 뭐 이런 것이 있냐고 싶겠지만, 그것은 우리 현실에 이미 내재된 풍경이 아닐쏘냐.

그러니 이런 설정, 익숙하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를 폭력과 피가 뒤범벅된 판타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한 어른들은, 생존 역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서바이벌 게임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없애야 하는 게임.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 주어지는 ‘승자(Winner)’의 작위는 곧 생존에 따른 권리이자 선물. 승자 독식의 세상. 패배하는 자는 영원히 낙오되고 죽어야 하는 세상.


현실의 정글은 피나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경쟁사를 눌러야 우리 회사가 산다. 동료를 제쳐야 승진이 보장된다. 연대나 협력은 사치다. 모든 것은 승리와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체제다. 말이 좋아 ‘윈-윈’이지, 상생의 방법을 익히지도 습득하지도 못한 포악한 사회구조는 경쟁의 승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패자? 그들은 존재 가치도 없는 잉여일 뿐이다. 승자 독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사회, 너무도 흉악하고, 흉포하다.


더 꺼내볼까. 회사 생존을 볼모로, 무조건 돈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임을 내세우는 고용주, 사고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피고용인. 돈에 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많이 버는 것이 미덕이요, 최선의 가치다. 함께 사는 법? 되물을 것이다. 혼자 잘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함께 잘 살아? 관계 맺는 법을 모른 채, 경쟁자로 타인을 인식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비극

경쟁 체제는 이미 현대 사회의 습속이 됐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왜 우린 끝간데 없는 경쟁 구도에 편입된 채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까. 개발독재시대의 성장위주 사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지배세력에게 무한경쟁 구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다. 어차피 그들은 출발선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들과 다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권력과 지배력은 세습돼야 한다.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솎아내면 아랫것들은 불만이 없다. 그저 부모를 탓할 뿐. 


<배틀 로얄>은 물리적으로 더 가혹한 방법을 쓴다. 그것을 통해 생존의 법칙을 주입한다. 극중 선생(기타노 타케시)은 말한다. “모두 필사적으로 싸워라. 그래서 살아남는 자가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가치 있는 어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내 가치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만 가치가 정해줄 것이라는 어른들의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단다. 즉, 경쟁에서 이기란다. 친구를 죽여야 한단다.


<배틀 로얄>은 경쟁 체제를 극한의 폭력으로 포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 더욱 폭력적일 수 있음을.

학생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투입되자마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친구라고 부르던 이의 목을 화살로 꿰뚫고 낫과 도끼를 휘두르며 총을 쏘아댄다. 심지어 성숙한 육체를 살육을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여학생도 있다. 어른들이 행하는 패악을 그들은 그대로 따른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 학생들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죽어가던 한 소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난 단지 빼앗는 쪽에 서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서늘한 한마디.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생존을 체득한 소녀. 그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준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같은 비극에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만만치 않다. 살인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을 듣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열 다섯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시 70대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살인의 현장을 담담하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개한다. 사실적인 폭력 묘사는 섬뜩함과 동시에 그 비극의 기원을 되짚어보게끔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인이 된, 후카사쿠 감독이 <배틀 로얄>을 통해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게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슈야와 노리꼬. 그들은 ‘실패한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Run’이란 말을 건넨다.

영화의 질문은 그랬다.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고 더불어 사는 친구의 존재를 지우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세상은 다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 그것을 희망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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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갈대', 금강님이,
나으 등쌀(?)에 밀려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
(그렇다고, 불법 사찰이나 협박을 한 것은 아님ㅋ)

<브로크백마운틴>에 대한 리폿을 보자니,
맞다, 게보린~!

요즘 나으 뇌주름 일부를 마비시키고, 일부 짜증 이빠이 감정을 부르는,
어떤 주변 상황들에 대한 현명한 매듭 풀기. 


(결별과 재결합 등을 거쳤고, 지금은 연인 사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니퍼 애니스톤과 결별할 당시 존 메이어의 이너뷰 기사 중 일부라고 했는디.

메이어는 그간 그들의 결별에 대한 악성 소문에 대해 "거짓도 속임수도 아무것도 없다"며 부정했다. 그는 또 "그녀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하고 세련된 여자"라며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다르며 각자 다른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며 "홀로 있고 싶어 관계를 정리했다. 어떤 게 옳지 않다면 누군가의 시간을 소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마, 이왕 찢어진 거 부욱 확실히 찢어졌으면 좋겠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띠바, 물론 내가 속속들이 그 사정을 아는 건 아닌데,
나한테까지 악영향이 미치는데다, 나의 이해까지 필요없겠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을 깎아먹고 마음 다치면서까지 억지로 지탱할 이유들이 있나.

메이어의 말,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 아냐?
아예 다른 공감대, 즉 서로가 상대의 성감대를 더 이상 자극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잖아. 혼자 오랄한다고 지랄 빨아봤자 목석인데 어쩌라고.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하고 소비하는 건, 죄가 아니더냐!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것까지도.

구닥다리 꼰대들의 이런 말씀, "다른 사람들 어떻게 볼래?"
띠바, 다른 사람 눈치만 보고 살라는 말씀?
자기 머리속 타인의 시선에만 평생 끌려다니라는 허튼소리?

물론, 며칠 전에 씨부렸듯,
사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의 선택이 되어야 하고,
이별도 역시 당사자의 선택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한 번 사는 건데, 그렇게 남만 배려(?)하시고 생각하다가 뒤질 건가.
그래도 살겠다문 쫌 제대로 살던가.
<브로크백마운틴>도 못 봤으면서...(맥주맛도 모르면서?...)   

띠바, 좀 욱~했다.
십장생! 시베리안허스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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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서사의 힘은 의외로 세다.
아마, 로맨스와 그 합을 겨뤄본다면, 로맨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족이 맺는 정서적 관계 등 가족간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히나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천륜(天倫)이란 인식도 작용할테고, 부성애(父性愛)․모성애(母性愛)에 대한 신화가 강건하게 구축된 영향도 있을 테다. 당장 당신이 본 영화만 떠올려 봐라. 부모와 자식 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 꽤나 있을 거다.

내 메신저에 등재된 사람들의 닉네임만 봐도, 이 가족 서사는 일상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곧 아빠가 된다고 대문짝하게 걸어놓은 지인, 낳은 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지인, 아이들 이름을 나열해 놓은 지인 등등. 솔직히 그걸 보면 저리도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아버지(어머니)가 된다는 것.
‘새가 자유롭다는 건 날지 못하는 자의 편견’이라는 말마따나,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자에겐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그런 명제가 아니다. 여태 자식의 삶만 꾸려온, 내리사랑의 수혜만 받던 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종족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내가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겠지만. ^^;

 ‘아이 낳기’를 시대적 사명으로, 국민의 의무로 강요(?)하는 지금 이 시대. 결혼도 못한 노총각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국가시책이 된 ‘아이 낳기’에 대해 많이 회의하지만, ‘자식이 태어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찬양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강보에 쌓인 핏줄을 향한 애틋한 심정은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이기보다 본능에 가까우리란 생각은 든다. 그 본능이 DNA유전자의 종족번식 염기서열에 의해 작동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고기 부자는 어떤가.
픽사의 <니모를 찾아서>를 따라가 봤다. 이 영화,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들 찾아 삼만리를 떠난 아빠의 성장사다. 불의의 사고를 아내를 잃은 홀아비 물고기 말린. 지나치게 소심하고 대양(Big Blue Sea)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심쟁이 아버지다. 니모는 그런 말린의 유일한 혈육. 그러다 보니, 말린이 인간 세상만큼이나 험한 바다 속 생존게임의 장에서 니모를 과잉 보호하면서 울타리를 쳐두는 건 일견, 이해도 된다.

말린이 니모에게 하는 호언장담. “아빠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줄게.” 오호,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그 마음, 부성애. 당연히 진심이겠지만, 공허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생각해보라. 세상은 아무 일없이 자란 아이에게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에서 의당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가장 보통의 아버지인 말린이 무슨 재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준다는 말린의 말은, 허풍일 뿐더러 아이를 망치는 길처럼 들린다.

아니나다를까!
유일한 혈육을 품안에서만 키우다 학교에 보내놓고선 말린은 안심을 못한다. 니모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아이 말은 그냥 무시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결코 부모의 마음대로만 자라진 않는다. 호기심 충만하고 파파보이 소리를 듣기 싫은 니모. 아빠 말을 뿌리치고 세상을 유영한다. 물론 좋지 않은 일, 생길 수 있다. 니모는 열대어를 수집하는 스쿠버 다이버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젠 <니모를 찾아서>가 본격 펼쳐진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찾기 위한 아빠의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뛰는 모험담. 소심한 새가슴 말린이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상, 그 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양 속으로 들어가 ‘아들 찾기’의 깃발을 높이 든다. 짜잔~ 이럴 때 으레 등장하는 동반자.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주위 산만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읽는 도리가 이 험한 여정에 동참한다. 말린과 도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인간까지 넘어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상은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소심한 물고기였던 말린. 세상을 몰랐던 말린. 장애물도 많고 굴곡도 많은 아들 찾기는 한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우물 안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빛깔을 본다. 바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하나둘 지혜를 터득하고 깨우침을 얻는다. 대양(세상)의 광활함 속에서 다양한 개체들과의 조우하면서, 니모의 마음에 한걸음 한걸음씩 접근한다.

니모와 함께 있을 땐 안온한 공간이었는데, 떨어져 있는 동안 바다의 다른 모습도 봤다. 아니 그렇게 바다가 거대한 벽으로 작용할 줄도 몰랐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다의 모습조차 몰랐던 게다. 숱한 위험이 닥치지만, 이런 장애물들이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린의 의지를 막을 순 없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의 재회는 디즈니 월드의 전제이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바뀐다.
재회의 순간, 말린은 니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의 말이 옳았어.” 겁쟁이로, 우물 안에 갇혀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거다. 아이라고 어른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때론 어른을 일깨우는 것도 아이다. <니모를 찾아서>는 그렇게도 말한다. 아빠(엄마)의 세상을 그대로 주입하고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능력을 믿으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행여나 일이 생길까 손만 꼬옥 잡고 있기보단 그 손을 놓는 순간 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빠(엄마)의 성장통도 때론 아이와 함께 자란다. 니모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린이 대양을 누비고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왔을까. 애 키우는 기쁨은 아마도 그렇게 세상을 넓히는 경험에서도 비롯되겠지. 이 영화의 감독, 스탠튼은 다섯 살배기 아들을 공원에 데려갔다가 내내 잔소리만 하는 자신을 보고 문득 이런 가슴 속 소리를 들었단다. “넌 아들과 지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그 후 그는, 겁이 많으면 좋은 아빠가 되기 힘들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니모를 찾아서>를 구상한 계기가 됐다.

그러면 ‘아이 없는 삶’은 어떤가.
아이 없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이른바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이나 결혼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둘이서 살아가는 것(<네 번째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주인공들은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다!)도 하나의 선택이자 가치다. 결혼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폭력이다.

나는 가능하면, 결혼한 사람을 만나도 아이 여부를 묻지 않는다. 본인이 먼저 말하면 모를까,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 ‘아이 중심’이다. 나는 그게 불만이다. 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로 찍힐 정도로 이 땅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절대선이자 완고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선택, 즉 ‘아이 낳기’가 선택일 수 있는,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

한편으로 거북하다.
후세를 위해 존재한다거나 핏줄을 잇기 위해 애를 낳는 일. 무엇보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나, 아이가 아닌 부부(혹은 동반자)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는 일도 꽤나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고? 종족 번식? 조까라 마이싱이다. 언제 그렇게 종족과 인류를 생각해 왔다고 그러나. 웃기는 짬뽕들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쨌든 아빠(엄마), 그리고 아이. 그 천륜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끝이 없을 거다. 이 영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가 뼈대인데, 말린과 함께 다니던 도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자식 없이 사는 삶에서 친구를 만나 대양을 누빈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도리와 같은 독특한 캐릭터라면 충분히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어때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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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독자와 저자가 만나는 자리에 꼽사리를 끼곤 하는 나는,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표정이 확확
다르단다.
좋고 싫음(옳고 그름이 아니다!), 즉 호불호.
그래서일까, 후기의 밀도 역시 갭이 크다.

그건, 당연한 거다.
좋은 걸 어떡해, 싫은 걸 우짜노.
그게 바로 나다. 그렇게 생겨 먹은 거니까.
그렇다고 굳이 나한테 잘 보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이 자리.
최종규 작가(전은경, 사름벼리)와 '사진책 함께 보기'.
내가 그렇게 좋아서 히죽거렸단다. ^_______^
좋은 티가 표정에서 확확 드러났단다.

역시나 당연, 정말, 좋았으니까.
최종규, 전은경, 사름벼리(두 사람의 딸이다).


최종규, 전은경, 사름벼리가 내게 건네준 이 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꾸 되씹었다.
뭉클뭉클, 울먹울먹.

이 사람들,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느끼게 한다.
"아,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맞다. 나는 그렇다.
한 줄 책에 실린 글귀에 위안을 받고,
퇴근하는 저녁 길에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에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다.

최종규 전은경 사름벼리가 말한 이날의 사진은,
사진에 대한, 책에 대한 고민을,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김훈의 독서론과도 비슷한 맥락.
책을 읽는다는 것, 책 읽기의 무서움.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길을 본 적이 없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말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는 거다. 나와 자식, 친구, 이웃 사이에 길이 있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이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혹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김훈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쓰는 사람은, 정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웃음)”

책을 읽으라는 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김훈은, 다독이냐 정독이냐, 한 달에 일 년에 몇 권을 읽느냐는 별 의미가 없단다.

책을 읽는다는 그 자체보다,
그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자신을 어떻게 개조시키느냐의 문제.
책에 의해 자기 생각이 바뀌거나 개조될 수 없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

책은, 세상을 아는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지만,
책 속에 길은 없다! 길은 세상에 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에.

고로, 책을 읽으면,
책 속에 있다는 그 길을 세상의 길과 연결시켜서,
책 속의 길을 세상의 길로 뻗어 나오게끔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아,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사람(들)을 만났을 때처럼.

(연애에서도, 그런 연애가 최강임을 경험으로 알지만,
연애가 마냥 어디 그런가. 그냥 훅~ 빠지니까, 그게 연애지. ㅋㅋ)

쨌든 결론은, 버킹검이 아니라,
고맙습니다. 최종규 전은경 사름벼리!

p.s... 아임 헝그리.
난 여전히
좋은 사람 만나는데 배고프다.
내 악행의 자서전을 지울 수야 없지만, 집필 속도를 늦춰야지.

좋은 당신,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을, 보고 싶고,
나도 그 언젠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음 좋겠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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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순한 이치임에도 어떤 작자들은 잊고 사나봐.
특히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경우라면 더욱.
혹은 연예인이라면 쌍심지를 켜기도.

사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

뭔 말이냐고?

조안과 오만석, 그리고 박용우.

오지라퍼들, 뭘 그리 입방아를 찧어대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들이 무슨 지구위 모든 사랑의 재단사라도 되는 양.
아예, 사랑하려면 뉘들의 검증을 받으라고 말하라.
꼴불견에 토나와. 뷁.

그들 각자 사랑하고 이별하게 내비두삼.
너나 잘 하든가. 쯧.

조안 & 오만석, 힘내세효~
나도 당신들 잘 몰라도, 두 사람 사랑한다면,
못된 오지라퍼들 때문에 포기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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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 전화(http://hotline.or.kr).

력피해여성들을 지원하고 여성인권을 위해 일하는 여성인권운동단체.

인간수컷인 내가 '여성의 전화'에 오르내리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

분기별로 낸다는 '베틀'이라는 소식지에, 글을 싣고 싶단다.


와, 희한한 경험이겠다 싶어, 넹~ 좋아효, 했다.

그리고 내 손에 들어왔다. 씨익. ^.^

흠, 여기저기 잡문을 기고하는 날품팔이지만,

이건 색다른 경험.

어쩌다, 거참. 신기할지고.

여성들에게 가능하면 죄 안 짓고 살아야할 터인데...^^;

아, 무셔.


고료? 돈 대신 인상적인 기념품 하나 받았는데,

뭐 나쁘진 않아!

또 하나, 홍보담당자에게 확인 하나 받아뒀다.

오는 10월6일부터 9일까지 진행되는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

티켓 하나 주신단다. 우왕ㅋ굳ㅋ




☞ 2010/06/02 - [메종드 쭌/무비일락] - 상대방을 무너뜨리지 않고 손을 잡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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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프로코프(Le Procope).

프랑스 파리 최초의 커피하우스라서가 아니다.

프로코프는, 만남.
 
당신과 나, 그렇게 우리가 만나는.
사랑하는 우리가 눈빛을 교환하는.

프로코프에서 피고 지는 사랑의 흔적.

나는 그렇게 당신의 만남을 담는다.


오랜 연인을 위한 오래된 카페,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카페 르 프로코프’

카페 르 프로코프는 1686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 세월이라니! 세월만큼이나, 그곳의 단골들의 목록은 길다. 몰리에르, 라신, 발자크, 볼테르,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그리고 그곳에 다음과 같은 수줍은 이름도 있다. 쇼팽과 그의 연상의 애인 조르주 상드. 천박한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파리에 와 남장을 하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소설을 썼던 조르주 상드는 자유분방한 연애로도 유명했는데, 그녀의 가장 유명하면서도 애처로운 애인이 쇼팽이다.

그들은 1836년, 쇼팽이 스물여섯 살 때 만나 1847년, 그가 서른일곱 살 때 헤어진다. 그리고 2년 후 쇼팽은 세상을 뜨게 된다. 일생 동안 폐결핵을 앓았던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모성적인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쇼팽을 만날 당시 서른둘이었던 상드는 자신에게는 없는 면모 때문에 쇼팽을 좋아했으나 결국 "그는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하며 어린아이다운 순진함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상투적인 틀 안에만 갇혀 있다"라고 인정하게 된다. 

 


 내가 프로코프를 꿈꾸는 이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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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수 없는, 버려져선 안되는 생의 사랑 by 필감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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