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 은 많은 경우가 '첫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뭔지 알 턱이 있나. 느닷 없이 사랑은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 알기로, 사랑을 방비(防備)하는 경우는 없다. 무방비다. 사랑을 배운 적도, 익힌 적도 없다. 사랑은 그렇다. 더구나 첫사랑. 느닷없는 감정의 파고에, 쩔쩔 맬 수밖에 없는 쑥맥인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 어쩌란 말입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다.
사랑 앞에 용기를 내느냐, 그렇지 않느냐. 아니, 그 전에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스스로 정의 혹은 최면을 내리는 것이 우선이겠지. 이젠 각자의 성격이 나온다. 풋풋한 시절(첫사랑은 대부분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더라!), 첫사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사랑대세). 말하고, 고백하고, 다가서는 사람, 사랑이 꽃피는 나무. 말 못하고, 고백은커녕, 뒷걸음질만 치는 사람, 사랑이 운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이런 말, 던져주고 싶다. 여기, 이십대의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만화가, 광수에게. 그는 후자의 인간이다. 사랑이 운다. 사랑에 운다. 좋아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쭈뼛쭈뼛, 엉거주춤, 머뭇머뭇. 답답해, 답답해. 물론, 남의 이야기니까. 어느덧 광수에게 감정이입 됐다. 누구에게나 그런 쭈뼛거린 첫사랑이 있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지현이(광수의 첫사랑)가 있었으니까.
'저건 내 얘기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칠 법한 사람도 있겠다.
'소리 없이 내 맘 말해볼까.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지막이. 가진 건 마음 하나로 한 없이 서 있소. 내 맘은 언제나 하나뿐.' 노래만 흥얼거리지.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을까. 썼다 지웠다, 애꿎은 편지지만 꾸깃꾸깃, 밤에 혼자 부풀어올랐다 아침이면 펑 터져버리는, 풍선 아니, 애드벌룬 같은 내 마음이여. 지현이에게 선물을 보내놓고도, 그게 나야, 라고 말 못하는 광수야, 광수야, 사랑이 아프다. 흙...
이 악물고, 마음 굳게 먹고, 고백하기로 한다. 거울 보고 연습했다. 대사도, 표정도. 꽃도 준비했다. 이제 말만 하면 된다. 연기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사랑은 미끄럼틀이다. 슝~ 친구면 뭐해. 내 마음도 몰라주고. 구일이 놈, 나쁜 쉐이. 숙자는 왜 또또또. 이 엇갈린 갈지자여. 아, 사랑의 미로야~~ 재수 없는 잘난척쟁이 민혁이는, 변칙성 작업과 느끼함으로 지현에게 다가가고. '광수 생각'은 깊어만 간다.
2006년11월 초연한 연극<광수생각>은 리콜(앵콜)을 거듭하며 롱런중이다. 롱런의 비결? 별 것 아니다. 누구나 가짐직한 첫사랑의 두근거림, 말하지 못하는 내사랑, 의 기억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맞다. 특별한 내용도 아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에 공감을 얻는다.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끄집어내는 '빨대'이기 때문이지. 돌쇠형 일편단심, 광수였든 아니든, 내 마음의 복고가 풀풀 날린다. 그러니까, 이건 정서의 문제다.
그 옛날, 만화 <광수생각>이 지난 정서가 그런 것이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 특별한 것도 아니,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내재된 마음과 기억 끄집어내기. 극중 무대와 인물이 바뀌는 암전, 만화 <광수생각>이 틈입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아하, 맞아 맞아. 광수가 어떻게든, 오해와 헤어짐을 거쳐 첫사랑과 다시 해후하리라는 것,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건, 이미 <광수생각>이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예견된 바다. 손발 오그라들어도, 첫번째 첫사랑은 그렇다.
'첫'이 주는 그 기묘하고 신비로운 마음의 각인. 광수가 역시나 오그라들게 한다. "한낱 떡볶이도 잊지 못하는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아무렴. 어.떻.게.에 방점 쾅. 잊을 수 있는 게 따로 있지. 어딜. 물론,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도, 모든 첫사랑이 똑같은 비중으로 있지 않다. 거기서도 첫번째는, 남다르다 하겠다. 나는 그날 맞닥뜨린 햇살의 온도까지도 기억한다. 그날의 풍속과 기압, 지구의 자전까지도. 떡볶이도 잊지 못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킁킁.
모름지기, 사랑 앞에 주저만 주저만 하는 것도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법.
사랑이라면, 2% 부족해도, 다가서라. 사랑한다면, 표현해라. 그것이 연인이건, 친구이건, 가족이건.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바빠서, 수줍어서 등의 핑계를 대는 것도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툰 사람이라는 것 알지만, 서툼이 언제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사랑을 놓치고 후회하느니, 말은 일단 꺼내놓고 후회하는 것이 747배쯤 낫다. 물론, 서툰 이들에겐 이것 쉽지 않다.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는 건 마음과 별개라는 것. 아, 입이 안 열려서 슬픈 짐승이여. 아우~~~
크게 기대할 건 없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등 기대고 옛 추억도 살포시 떠올리면서 광수를, 과거의 나를 만나라. 배우들의 연기도 등락이 크지 않다. 특히 조연들의 1인2역(1인다역)은 부족한 인원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같은 사람의 다른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 고백하건대, 광수의 동생, 현수 역을 맡았고, 간호사·교사로도 활약한 민수진에 나는 흠뻑 빠져있었다. 여신 포스! 알잖아~ 나란 남자, 여신 앓이. 끙끙. 같이 본 친구에게도, 민수진 알흠답지 않냐고 블라블라 호들갑(?)을 떨었더니, 인정한단다. 흠, 좋아한다 말할까?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고로, 나는 당신이, 참 좋다. 꺄아아아아아아~ 좋아해~~ :) 민수진 응원!
두 시인, 무슨 상관이 있을까마는, 고개를 갸웃할지 몰라도, 두 시인,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지구 정반대편에서 활동했다. 한 시인은 요절했고, 다른 시인은 사회주의 혁명의 좌절에 생의 끈을 놓아버렸다. 두 시인, 본명 아닌 필명을 썼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천재였으며, 뭣보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시대의 혈서를 썼다.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무기, 詩를 가졌던 사람들.
이만하면 알겠지?
태어났던 시인은 김해경이라는 본명을 가진, '이상'(李箱,1910.9.23∼1937.4.17).
죽었던 시인은,리카르도 네트탈리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본명을 가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7.12~1973.9.23).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가 시대와 불화하고 거동이 수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그가 태어났던 해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일강제병합, 1910년 8월22일,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맺어진 조약.
그는 어머니 뱃속부터 분노를 전달받아 현실에서 어떻게 표출할지 연구했다,
고 나는 상상해 본다. 이상이 천재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식민지 현실에서 환멸과 저항을 에둘러 실험적으로 다뤘던,
가장 보통의 사람들로선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상의 전위적이고도 실험적인 파격.
고 김현 문학평론가는, 시인 이상에 대해,
"폐쇄주의적 비관주의의 시각에서 식민지 현실에 비순응한 대표적인 작가"라며,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신뢰감을 갖고 있지 아니하면서도 그가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세계인식 위에서 세계와 현실, 자아를 바라본 작가"라고 평했다.
그리하여,
스물 일곱, 그 요절은 아이러니하다.
그 자신의 미래를 혹독하게 거세당한 대신,
무수한 가능성으로 점철된 가상의 미래를 후세에 안겨주니까.
스물 일곱에 죽어도, 한 사회가 탄생 100주년을 기릴 수 있다는 건,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스물 일곱'은 요절한 천재들의 '상징' 같다! 희한!!)
지금 서울 혜화동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이상 탄생100주년 기념전시가 열리고 있다. ☞ '木3氏의出發 '(이씨의 출발) (이상의 詩, '차8씨의 출발(且8氏의 出發)'에서 따왔단다.)
이상의 활동기간이 7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면,
파블로 네루다는 달랐다. 그는 70여년을 살았고, 활동기간만 50년 이상이다.
어쩌다 보니,
이달 들어 11일부터 '칠레 3부작'(?)을 포스팅한 셈이 됐는데,
그 마지막 완결편, 혁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편.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일 포스티노>
파블로 네루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구구절절 썰을 풀어놓을 필욘 없을 테고,
1973년 9월23일, 그의 마지막 순간 무렵에 집중해보자.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네루다에게,
아옌데는 정치적 동지이자 칠레의 희망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딱지도 붙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던,
네루다의 희망, 곧 칠레의 희망을 실현해 줄 수 있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죽었다.
희망을 잃은 땅에서 늙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두 사람이 상호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일화 한 토막. 다큐 <피노체트 재판>에 나온 내용이란다.
피노체트 기소를 생각해낸 카스트레사나 검사에게 사람들, 물었다.
"왜 그런 귀찮은 일을 떠맡으려 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독재를 피해 50만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그때 칠레의 주스페인 영사가 배를 한 척 내주면서 "이 배에 태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영사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습니다. 그는 연대의 표시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사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칠레 당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죠. 그때 칠레의 보건장관이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였습니다."
또한 파블로 네루다는 아옌데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리 묘사했다.
아옌데는 탁월한 연설가는 아니었다. 지도자로서 그는 가능한 모든 통로를 통해 자문을 얻는 통치자였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처리했다. 아옌데 시대의 민중은 발마세다 시대처럼 어수룩하지 않았다.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강력한 노동자 계급이 존재했다. 아옌데는 집단적인 지도자였다. 아옌데는 민중 계급 출신은 아니지만 부패하고 정체된 착취 계급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저들은 살해 행위를 은폐하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미망인만이 불멸의 육신을 동행할 수 있었다. 공격자들의 말로는, 대통령
궁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자살의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 언론의 견해는 다르다. 공중 폭격 직후, 수많은 탱크들이
작전에 돌입했다. 단 한 사람, 칠레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노린 대담한 작전이었다. 아옌데는 불꽃과 연기로 뒤덮인 집무실에서 혼자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관총을 난사해야 했다. 시신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매장했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은 오직 한 여인, 전세계인의 애도를 한몸에 안은 여인이었다.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지음/박병규 옮김|민음사 펴냄) -
더구나, 네루다는 칠레 그 자체였던 사람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를 읊던 사랑의 시인이기도 했지만,
당대 칠레의 운명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칠레를 인민의 세상으로 바꾸고자 했다.
혁명의 시인은 이리 말했다.
"성숙한 작가는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다."
아울러, 그 시인이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라고 말한 것은,
숙명이다. 혁명적 시인은 그렇게 영원히 살 것을 다짐했다.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 체 게바라가 필서까지하면서 죽기 순간까지도 품고 있던 것이,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라는 사실은 당연해 뵌다. 그리고 다시 해석되고 이해되는 이 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사랑의 언어로 토해내던 네루다의 시가,
서정과 낭만에서 출발했던 네루다의 시가,
사회와 현실을 담고 시대와 민중을 품었다.
그의 시는 그렇게 변화했고 비로소 완성됐다.
그러나, 미국의 하수인 피노체트가 벌인 쿠데타는 '한 편의 절망의 노래'!. 고독에서 인민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혁명 시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인민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한다"고 읊던, '리얼리즘 그 너머를 꿈꾸던 리얼리스트'는 詩를 남긴 채 눈을 감았다.
9월의 칠레, 파블로 네루다를 떠올라 치면,
그의 시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놓자면,
남미의 붉은 태양처럼 살고 싶어진다는 누군가의 말이 딱 떠오른다.
9월23일,
이상은 태어났고,
네루다는 죽었다.
이상은, "멜론이 먹고 싶다"고 말한 뒤 숨을 거뒀고,
네루다는, "나, 간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시대를 품고 태어나,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문학으로,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서 투쟁하던,
두 시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 "작가(시인)를 찾습니다."
절묘하게 교차한 두 시인의 생사에 상상력을 덧입혀,
우리의 리얼리즘과 그 너머의 리얼리스트가 지닌 꿈을 자극할,
그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줄 작가, 어디 없수?~
나도,
사람에게 어떤 딱지도 붙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어서.
풍요함 따윈 약속하지 않고, 존엄성과 진정한 자유에의 희망을 약속하는, 세상.
애초 뉘들에게 어떤 철학조차 없는 '부강한 나라' 따윈 필요없어!
언제 어느때, 칠레를 배신한 그들마냥, 한국을 배신할지도 모를 뉘들이니까.
어쨌거나 한가위.
서울 돌아오니, 피 비해부터 물어보고,
어떨결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할 시절이지만,
보름달 보자니, 내 마음속 가장 서정과 낭만으로 분칠된 그해 한가위가 두둥실!
여러 사람 앞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내겐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지만, 내겐 오로지 그녀의 입만 보였던 그 어느해 한가위.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면, 결국 그 사람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렴. 누군가는 휘영청 보름달을 품고서, 이 말이 이뤄지길 소원을 빌었겠지.
그의, 그녀의, 그 소원이 이뤄지는 경이로운 순간이, 그 시간이 찾아오길.
비록 그를, 그녀를 모르고 알 수 없는 사이지만, 나는 바란다.
때론 누군가에게 저 말은, 거짓임을 알지만,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는 것.
그건 계속돼야 하니까.
안녕, 내 사랑.
“나는 안다. 이 경이로운 순간은 현실의 수레바퀴에 닳아 금세 사라져버리고 앞으로 고독한 밤들이 찾아올 거라는 걸.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고독한 밤들을 채워주는 경이로운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얼마 전,
한때 야큐계를 풍미했던, 구대성(이라 쓰고, 대성불패라 읽는다!)의 은퇴 경기.
아, '쿠옹'도 이렇게 떠나는구나.
우리의 한 시절도 이렇게 접히는구나. '대성불패(臺晟不敗), 안녕', 을 마음속으로 외치던 날입니다.
헌데 이날, 나를 '가장' 뭉클하게 만든 건, 한 여성팬의 피켓 문구였다지요.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가슴이 찡찡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극강의 상찬이 있을까요. 흑ㅠ.ㅠ
생을 송두리째 야큐에 바친 야큐선수의 은퇴경기에 피켓문구로서 가장 좋은 예.
'모태야큐'가 아니라면, 친구의 꼬드김이 아니라면,
야큐를 보고, 야큐장을 찾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 겁니다.
야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이가,
TV에서 야큐 경기가 펼쳐지면 '대체 뭐가 재밌다고 저런 걸 보나'싶던 이가,
어느 순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야큐에 빠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떤 특정 선수의 활약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고요.
그 여성에겐 그 대상이 '대성불패'였던 것이죠.
그 어떤 수치나 수상 경력보다 은퇴선수의 심금을 가장 울리지 싶은 저 말.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저요? 전 모태야큐, 모태노떼(자이언츠)였다지요.^^)
미안. 서론이 길었죠? ^^;
이 영화, <마루 밑 마루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The Borrowers). 보고선 쿨쩍훌쩍 했습니다.ㅠ.ㅠ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쿠옹의 은퇴에 최고의 상찬이었던 그 피켓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르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신상입니다. 메리 노튼의 소설 《The Complete Borrowers》(국내제목 :《마루 밑 바로우어즈》)가 원작이죠. 하야오 할아버지가 젊은 날 읽고, 품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40여년을 삭힌 내공, 과연 하야오 철학과 잘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기획과 각본만 하야오 할아버지가 맡았다는데, 지브리의 최연소 감독인 서른일곱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연출은 하야오 할아버지의 자장에 있습니다. '하야오'라는 이름이 여전히 각인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자, 옆의 이 초상이 바로 아리에티입니다. 보는 순간, 훅~ 갔습니다. 곧 '여신 포스'를 발산할 것 같은 요정 포스의 그녀는, 14살입니다. '아니, 14살짜리가 왜 저래?'하면서 같이 보던 친구에게 툴툴(?)거렸습니다. 성숙하다못해 섹시하다니. 요정은 저런 거야, 응?
물론, 그렇게 아리에티가 그려진 것은 다 이유가 있더군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전한 아리에티 탄생의 비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아리에티>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다음 프로듀서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처음 받은 주문은 아리에티를 아주
관능적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미소짓는다. 뚜렷한 로맨스 일화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이같은 분위기는 영화에 줄곧 첫사랑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하, 아무렴. 아리에티의 관능에 매혹되지 않는 자, 유죄!
아리에티는 10cm 작은 생명입니다. 현재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칠레의 33인 광부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 8.8cm의 구멍보다는 약간 큰 10cm. 그들은 크기만 다를 뿐, 사람의 형상과 똑같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죠. 그들에게 인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거든요.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도, 인간에게 존재가 '뽀록'났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일까요. 자신들의 종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리에티 가족. 걱정작렬하는 엄마, 아빠는 아리에티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인간에게 틀켜선 안 돼. 그리되면 우리 종족은 멸망이란다. 멸족 여부를 고민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니, 나는 인간(!) 땜시 멸족(멸종)한, 혹은 멸족 위기에 처한 생명(들)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숭악함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지구의 어떤 이들.
괜히 미안해집니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탈을 쓰고 있잖아요.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의 쥔장처럼 행세하는 인간은, 때때로 수시로, 기고만장에, 안하무인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말, 이 애니에서는 실감납니다. 작은 생명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은 한 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오롯이 '공포'라지요. 아,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에겐 공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요정, 아리에티의 눈으로 인간남자(소년) '쇼우'를 처음 봤을 때의 방식부터, 시계의 초침소리는 어찌나 큰지, 공포감 작렬입니다. 문 여닫는 소리도 천둥치는 것 같고, 작은 생명들이 부엌과 방, 테이블을 오갈 때의 거리감과 모험도 장난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죠. 익숙한 우리네 인간 세계임에도, '아, 저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것 참, 나쁘지 않습니다. 묘합니다. 짜잔.
그건 역시 지브리, 곧 하야오 할아버지의 대부분 작품이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관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어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숭악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성찰을 은연중에 요구하기도 하는.
아마, 이 애니를 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다보니 극중 악당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은 집사 여자를 통해서일 겁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일 그녀는, 딱히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캐릭터지만, 어느덧 감정이입이 된 아리에티 가족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탓에 그리 느껴지게 됩니다. 그녀를 통해 어떤 죄의식도 없이 다른 생명(심지어 같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아,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도 있어요. 아리에티와 그 가족이 인간에게 '빌리는' 각설탕, 티슈, 빨래집게 등의 '전리품'은 우리의 일반적인 용도와 달리 활용이 돼요. 아하, 세상 모든 것의 용도가 하나로 묶인 것은 아니구나.
뭣보다, 아리에티와 그 가족의 생존방식인 '빌리기'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감탄했어요. 찌리릿. 커피 한 잔 찐~하게 마시고 싶더라고요. 애니의 원제, 원작의 제목을 잠깐 볼까요? '빌려서 생활하는(더부살이)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혹은 '빌려 쓰는 사람들(The Borrowers)'.
아리에티와 가족은,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훔치'는 행위를 '빌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것을, 아주 조금씩 빌려 가면서 생존을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인간에게 큰 손해가 닥치는 것은 아니죠. 있는 둥 없는 둥,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들에게 나눠주는 형국입니다.
이런 빌리고 빌려 주는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혹은 세계가 지닌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 빌려 쓰는 주제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존재인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어떤 생명들로부터도. 작은 생명이 인간에게 그러하듯, 인간은 자연(지구)로부터 그러하지요. 인간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아리에티 가족과 자연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인간들.
김혜리 씨네21 기자는 또한 그것을 '이삭줍기의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회 구성원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남아도는 재화를 공짜로 취해 생존을 유지하도록 용인하는 세계가 <아리에티>의 이상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빌리는 일과
훔치는 일이 다름을 수차례 강조한다.… 한데 ‘빌리기’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아리에티>는 문명의 이기가
필요없는 수렵과 채취의 야생으로 돌아간 소인 소년 스피라를 통해 쓸쓸한 대답을 제시한다."
솔직히 나는 의심해요. 지금 이 시대, 더 이상 '빌리기'와 '이삭줍기'가 힘을 발할 수 있을까. 한 예를 들어볼까요? 한때 우리에게도 '대지의 여신'이 있었잖아요. 여신의 뜻을 받들고 자연의 힘을 빌어 먹을 것과 살 곳을 빌려서 살았죠. 그런데 지금 시대는 여신을 경멸하고 아예 겁탈을 했죠. '소유'라는 명목으로 빌리기가 아닌 훔쳐 버리고야 만 시대.
그리고 다르다 싶으면 무조건 박멸하고 내쫓고야 말지요. 집사 여자의 행태처럼.해충박멸 회사까지 불러들인 그녀를 보면, 기업(자본)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른바 '문명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집시 추방 조치를 보세요.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닐까요. 날짜만 바뀌었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직 20세기일지도 몰라요.
많은 것이 사라졌으며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소년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잔인하게 대놓고 말합니다. "너희는 곧 멸종할 거야. 그건 섭리야." 그런데, 그 말이 꼭 인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들린 건 왜일까요. 그 말을 내뱉은 인간소년 쇼우야말로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잠깐 <마루 밑 아루에티>의 결말에 도달해서,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이 애니는 인간의 위협으로부터 아리에티 가족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해피 엔딩' 구조를 취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더라고요. 이 애니는 느슨하게 뻔한 이야기 공식이 아닌 나름 반전(?)의 형태를 가지거든요.
자, 생각해 볼까요. 인간이 아닌 작은 생물의 세계를 그나마 긍정하고 함께 살기를 바랐던 쇼우. 하지만 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이미 생의 의욕을 잃은 조숙한 아이입니다. 아리에티 가족이 '인형의 집'을 새로 얻게 되지 않을까, 허술하게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쇼우의 집을 아예 떠납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빌리기'를 거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연주의적, 생태주의적 삶을 사는 듯한 스피릿을 따라간 것을 보면 말이죠.
인간과 공존하기보다 자신들만의 종족과 뭉쳐 살기를 선택한 아리에티 가족. 결과적으로 인간이 그들을 내쫓은 셈이죠. 그나마 공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인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멸종 운운하다가 던진 이 말. "죽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야." 어쩌면, 이는 지브리가, 혹은 하야오 할아버지가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희망으로 포장된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말자고 건넨 말 아닐까요. 죽는 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야. 된장, 식빵~
하지만, 절망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희망이 그렇듯.
대성불패 쿠옹을 맨 처음 꺼낸 이유도 이젠 말씀 드리죠.
아리에티 가족이 새로운 곳에서 자신들의 종족을 만나 잘 정착했는지, 쇼우가 수술을 잘 마쳤는지는 모릅니다. 이 애니는 그것까지 펼쳐 보이질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이 불친절함(?)이 외려 좋았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니"라며 인간소년 쇼우를 옹호하던 아리에티의 말에서 '절망의 구'에서 탈출하려는 소수의 모습을 봤다면,
떠나는 아리에티에게 쇼우는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아리에티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
죽기로 결심한, 죽을 것을 예감한 누군가도 아주 작은, 10cm에 불과한 생물의 존재에서 힘을 얻을 수 있구나. 8.8cm의 지름도 33인을 살게 하지 않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당신이 잘 볼 순 없지만, 당신 옆의 하찮은 무엇일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속물이자 평범한 악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길" 바란 그녀의 말이었듯 말이죠.
쇼우가 수술을 잘 마치고 살아있을까,를 내게 묻는다면, 음, 고개를 도리도리흔들 것 같아요. 매정하고, 냉정한 답변일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아리에티가 수술을 앞둔 그에게 준 '살아갈 용기' 덕분에 그저 맥없이 눈을 감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몰라도 좋을 것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 작은 존재가 준 선물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아울러 아리에티 가족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종족들과 계속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아리에티가 멸망 운운하던 쇼우에게 했던 이말처럼 말이죠.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아리에티 가족을 보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잘 보이진 않아도, 자그만 생물들이 지구상에는 무지하게 많고 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구나. 잘 빌려주고 잘 빌려야겠구나. 우리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꾸준히 돌아가는구나.
아, 혹시 멀쩡하게 있었는데, 없어진 게 있다면 아마 바로우어즈가 빌려간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효~ 아, 애니를 본 뒤 후유증이라면, '내 심장의 일부, 아리에티'가 침대 밑에 혹은 의자 밑에 행여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는 건데, 아파트는 바로우어즈가 살기엔 참 좋지 않은 환경이에요. 된장.
* 참, 장난감에 숨을 불어넣은 픽사의 <토이스토리3>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픽사와 지브리, 미국과 일본, 더 크게는 서양과 동양의 어떤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2.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
기타와 노래로 쿠데다와 불의에 저항한 칠레의 가수.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자였다.
반란 허수아비 피노체트군에 의해 노래를 멈췄다.
1973년 9월16일, 아옌데 대통령이 죽은지 불과 5일 후였다. 지난해, 사후 36년 만에 부검을 했다. 30발 이상의 총격을 받았다.
그리고 산티아고 묘역에 재안장됐다. 수천 명의 칠레인이 함께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 뿐 아니라 연극 연출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모든 사람은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이상을, 그는 노래에 담았다.
칠레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칠레뿐 아닌 라틴아메리카를 돌며 자유를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인민의 삶을 달래주고 사회에 적극 참여, 변혁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품었다. 'Te recuerdo Amanda(당신을 회상합니다, 아만다여)',
'Cancion del arbol del olvido(망각수의 노래)',
'일하러 나갈 때',
'선언' 등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벤세레모스(Venceremos·우리 승리하리라)!
책, 2년 전 개정판으로 나온《빅토르 하라》. 과거에는 《끝나지 않은 노래》로 나왔다지?
빅토르 하라의 부인이자 무용가인,
조안 하라(Joan Jara)의 비망록.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
칠레(인)와 자유·평등을 향한 열정. 핫, 뜨거뜨거!
커피는 따뜻하고, 음악은 뜨겁다.
펼쳐든 책은, 《빅토르 하라》 혹은 《마리아 칼라스》.
영상을 튼다면, <칠레 전투> 혹은 <칼라스 포에버>. 아, 행복하다. '소셜 카페'로 오세요. :)
세 여자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또한 나를 낳고 키운 곳에서 그들은 학교를 다녔다. 우연하게도 한 시대를, 한 공간을 공유했을 거라는 짐작.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더욱 눈이 갔고, 마음도 그를 따랐다.
<땅의 여자>의 세 여자, 강선희, 변은주, 소희주 씨는 스스로 농촌에 발을 담았다. 농사꾼(농민)이 됐다. 어떤 로망도 자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의지의 결정체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학창시절, 농활이나 운동 등을 통해 그들에게 자리 잡은 정신적 근력이 그들을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선택은 운동에 의한 관성도 따랐을 것이다. 농민운동을 통해 새겨진 사명 같은 것. 그런 한편, 애초 그들에게 허울 좋은 귀농이나 전원생활은 그림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작당하고 뛰어들 도시 여자(들)는 흔치 않다. 사명감이면서 꿈. 도농 간의 벌어진 간극을 메우며, 농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의 일부를 바꾸고 싶었을.
하지만 어떤 결단이든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강고한 의지나 결정도 현실 앞에선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십 년을 훌쩍 넘어선 세월, 견고한 일상은 그들을 이미 삼켰다. 햇살은 맑고, 논밭에 일렁이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탐스럽다. 그녀들의 모습 또한 같을까. 마냥 그렇진 않다. 멀찍이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달리 그녀들의 표정에선,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 자연은 그녀들에겐 때론 형벌일 테니.
그게 무엇인지,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이라면 감지할만하다. 일상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의지 이상이다. 누군가의 며느리요, 아내이자, 어머니, 이웃이기까지. 관계는 생의 동력이면서도 생을 버겁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들이라고 처음 발을 디딜 때부터 하나였을까. 품은 뜻은 같았지만, 각자 처한 현실은 미세하게 틈을 벌려놓기 마련이다. 때론 그들은 서로에게 비수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요, 일상이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는 명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때론 굴레다.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그들이라고 왜 없었을까. 소희주 씨가 여성 농민들을 만나러 나가는 밤. 그녀의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땡깡’을 부린다. 그걸 뿌리치고 나가야 하는 그녀의 선택. 차 안에서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렇게 떼어놓고 가면 애들한테 안 좋겠지?” 아, 어쩌란 말인가.
남편이라고 눈이 곱지 않다. 뜻 맞아 함께 살 붙이고 사는 남편이라지만, 아내가 외부 일에 더욱 신경을 쓰니,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서운한 눈치다. 변은주 씨는 공동체를 꿈꾸며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 하지만 시댁은 이를 반대한다.
뭣보다, 강선희 씨가 그토록 죽이 잘 맞던 시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일상과 관계의 강고함을 느낀다. 농사는 기본이요, 가족을 지탱하는 와중에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역 정치활동에도 열심이던 그녀. 병든 남편의 수발까지 함께다.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새로운 정치적 역량을 불어넣고자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떨어진다. 결정타는 남편의 죽음. 며느리를 믿고 밀어주던 시어머니는 그 지점에서 멀어진다.
솔직히 나는 그 일상이라는 존재가 버겁다. 밤이 되면 무심코 내려놓기도 하는 일상의 무게이건만, 그건 모르핀이다. 아주 잠깐의 안도. 이런 일상을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생각했다손, 막상 맞닥뜨리는 일상의 강퍅함은 다른 문제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이 다큐는 기본적으로 이런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들은 희열과 마주대하며, 일상적 행복에 유기농 미소를 지운다. 그들은 일상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뚜벅뚜벅 자신의 선택에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갈 뿐이다. 아, 저들 역시 내가 아는 많은, 가장 보통의 존재. 그렇기에 이것은 긍정의 현실이다. 세상과 싸우고 때론 고됨과 아픔, 상실에 노출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감내하는 법을 안다. 그야말로 도망가지 않고 맞장 뜸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선물.
이 영화, ‘순도 100% 유기농 다큐’라는 카피가 붙어있지만, 유기농에 대한 환상은 없다. 생태주의적 삶을 다루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가장 보통의 존재가 삶을 꾸리는 현장을 본 것이다. 학창시절의 앳된 얼굴은 세월의 더께 앞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의 훈장이다. 나이듦이 자연스러운, 더구나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 여느 농촌의 아낙네가 된 그들의 말간 얼굴이 주는 청량함. 땅의 여자다.
여성을 말할 때, 늘 여신이나 선생님 타령이나 해대는 가장 보통의 수컷에게, <땅의 여자>는 또 다른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여신 포스가 아니라도, 선생님 포스가 아니라도, 땅과 바람과 햇살과 일상과 노동의 시간이 만들어준 장삼이사의 포스.
나를 돌아봤다. 나는 농부의 손자다. 하지만 시티 키드로 태어나 자란 내게, 이십대까지 농촌은 도시문명보다 한참 뒤떨어진, 그닥 발 딛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농활 한 번 제대로 가질 않았다. 아니 가기 싫었다. 어린 시절, 농촌은 내게 심심함과 무료함, 고된 일거리만 가득한 공간이라는 경험 때문에. 죽도록 일만 하시면서도, 그만한 대우나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보면서, 학교나 어른들의 말씀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농촌이 우리의 젖줄이라느니, 농부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메아리치는 박제된 언어였다.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공허함.
지금의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내게 가르침과 울림을 안겨줬던 분들 덕분이다. 이분들은 하나 같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공동체를 꾸리거나 자연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등 '다른' 삶도 있음을 보여주고 알려주셨다. 나는 어느덧, 서울을 떠나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아직 낭만이자 로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이고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나는 이말에 동의한다. “농사꾼으로서의 삶이란 도시의 그것보다 더욱 꽉 찬 일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도시보다 꽉 찬 삶,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씩씩한 언니들의 이야기는 좀 더 강력한 의지와 실천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그리 사는 그들이 좋’았고, 차츰 나를 달궈서 ‘땅의 남자’로 살아가는 나를 꿈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한다. 세상은 그런 장삼이사들이 밀어붙이는 노동에 의해 굴러간다. 살아야겠다. 버티고 견뎌야겠다.
과거. 얼마되지도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땅의 기운을 믿고 땅이 생명의 근원임을 알았다. 그래서 땅에 대한, 대지를 향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물론, 지금은 그 과거를 배신(?)했다. 땅은 그저 재산증식의 일환이자, 투기적 대상이다. "돈이 최고다"라는 화폐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그 시대를 거슬러 땅의 진짜 기운과 만나고 싶다. 커피 역시 땅의 힘이 절대적이다.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 땅을 존중하고 경외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세간의 기준에선 루저인 나도 그래서, 당당하게 말하련다.
“나는 이래 사는 내가 좋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녀들처럼 걸어가고 싶다.
인생 뭐 있나. 그냥 경운기의 속도로 가면 되는 거지.
몸 생각해서 유기농 찾아서 먹는 당신,
마음 생각한다면, 이 유기농(영화) 찾아가서 섭취하면 딱 좋겠다.
건강해진다. 장담한다. 아니면, 손해배상 청구하시라.
<씨네21> 763호의 피쳐기사인,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를 만나다 ① -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무척 흥미롭다. 세 명외에 정성일, 허문영 씨까지 해서 다섯 영화문필가들이 나누는 대화는, 흥미진진한 탁구경기를 보는 것 같다.
뭐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니고, 좀 엉뚱한 거다. 피쳐기사의 첫 장면에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사진을 보자마자 팡~ 터졌다. 김혜리 여사님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에 비해, 사람남자 둘의 포즈와 표정은 뭐랄까. 뭔가,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
사진은 여러모로 재미난 대비를 이룬다. 시소를 놓으면 사람남자 둘 쪽으로 기울어야 할 듯 싶지만, 구도 등 여러가지를 봐도 왠지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희한하기도 하지. 뒤에 있는 나무들을 봐도 그렇고. 참 재미난 사진이다.
김영진 씨는 몇 년 전, 그가 <필름2.0>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는 기억 못하겠지만) 목소리 좋고, 글 좋고, 무게감 짱이다. 이동진 씨는 광화문의 커피스트에서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고, 몇 번 그가 초대된 행사에 간 적이 있는데, 의외로 유머가 좔좔좔. 그의 글과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사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본인들은 어찌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봤다. 전설처럼 제목만 설핏 들었던 그 영화. 당최 뭐라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내겐 없다. 이동진 씨가 그 자리에 함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였구나. 괜히 반가웠다. 나는 빠돌이까지는 아니지만, 고레에다 감독 작품을 참 좋아한다. 특히, <원더풀 라이프>. 이동진 씨도 참 좋아한다고 했다. 괜히 또 반가웠다.
<환상의 빛>은, 동명의 원작에 나온 구절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좋겠다.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시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p.12) 그날의 기록이다. <환상의 빛>이 내 마음에 틈입했던 기록.
“다만 삶의 하중荷重이, 그 무게가 불현듯 어깨를 짓누르고, 일상의 생의 부담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들면 홀연히,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뿐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질박하다면 그런대로 또 질박하다.”(『도깨비 본색, 뿔난 한국인』, p.251)
물론,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 알 것이다. 스스로 꿈결처럼 사라지고 싶은 욕망. 아니,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저,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 걸어도 걸어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주무주주(住無住住)’라고 했던가.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머무름이라고 했던. 바람이 분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떠남은, 분명 그런 것이다. 이 자리에 있고도 없어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
안타깝다. 어디서 본 표현이었을까. 출처를 미처 적어놓질 못했다. “사슬을 풀고 구름이 되고 싶다. 연줄을 자르고 안개가 되고 싶다. 연관의 고리를 부수고는 물 흐름이 되고 싶다. 우리는 그러기를 바라는 존재다.”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공기인형> 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인 「환상의 빛」을 읽고, 퍼뜩 메모해놨던 이 표현이 틈입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혹은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의 마음이 아녔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미코. 남겨진 사람. 남편이 훌쩍 그렇게 떠난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당최 알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불쑥불쑥 침입하는, ‘왜’를 지울 순 없다. 생은 그렇잖나. 바삐 길을 가면서 모퉁이를 돌다, 전혀 예기치도 않게 첫 번째 첫 사랑을 만날 수 있듯,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아니 10년을 떠올리지 않다가도 느닷없이 한 순간을, 생각을 만난다. 하물며, 어떤 이유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에게서야.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온다. 허무함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감내해야 하며, 느닷없는 슬픔을 만나야 한다. 마침내, 삶에 덕지덕지 묻은 부조리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먹먹했다. 내겐 달리 표현할 방도도, 필력도 없다. 적어도 내게, 그 빛은 환상적이진 않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식상하고 진부하다. 내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을 뿐. 어둠과 빛을 등가로 놓는 감독의 시선에 마음이 때론 덜거덕거렸다. 특별하고 유별난 삶을 다룬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를 직접 비춘 것도 아니었다. 인물을 묵묵히 따라갔을 뿐인데, 그 카메라엔 삶이 묻어났다. <원더풀 라이프> <죽어도 죽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형이라. 명백한 인장이자 징표가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영화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난 7월13일, 서울 낙원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상영회였다. 원작인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지음/송태욱 옮김|서커스 펴냄) 출간 기념. “미야모토 테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박명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고 추천사를 썼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혈 팬인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름답고 쓸쓸한데, 장면 몇 개를 잘라서 벽에 걸어두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 한편으로 (그렇게 하면) 한 달 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웃음)” 지금부터 이것은, 그와 관객이 함께 나눈 기록의 일부다. 그 옛날, <원더풀 라이프>에 흠뻑 빠졌던 나는, 그 역시 이 영화의 신봉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무척 반가웠다. After Life…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맺은 인연
“저는 동시대 외국 감독 중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하면 <원더풀 라이프>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의 경험 자체가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매우 깊은 정서적 충격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경험을 선사한 사람에 대한 원초적 끌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말하자면, ‘고빠(고레에다 히로카즈 빠돌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에 특히 좋아한다다.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 근작인 <공기인형>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환상의 빛>을 찍기 전까지 TV다큐멘터리 등을 찍다가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늦둥이인 셈인데, 이 영화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 중에 처음 본 것은 <환상의 빛> 아니고 <원더풀 라이프>(1998)다. 과할 정도로 좋아한다. 고레에다 감독 필모 중 가장 잘 만든 것은 <걸어도 걸어도>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나 <원더풀 라이프>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 간 이동진 평론가. 이런저런 시놉시스를 훑어보다가 재밌겠다 싶었던 것이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신인인가? 그런데, 이건 뭔가. 영화를 다 본 뒤, 다리가 꿈쩍을 않는다. 감동 먹어서, 영화에 취해서. 별 수 없이 관객과의 대화까지 지켜보게 됐다.
여든 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캐나다에서 오셨다는 할머니가 손을 들고 영화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뭐랄까, 묘했다. <원더풀 라이프>에 나오는 할머니를 언급하면서, ‘나는 오늘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며 예찬을 했다. 그리고선 고레에다 감독이 말을 시작하는데, “아, 저런 사람이니까 이런 영화를 찍는구나 싶더라.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도 감동을 받았다.” 감동 두 배. 이동진이 고레에다에 빠진 날.
그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더풀 라이프> 상영됐다. 극강이었다. 이동진 가라사대. “여태껏 내가 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GV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GV였다.” <공기인형>이 개봉했을 때, 주연배우였던 배두나와 인터뷰를 했다. 배두나가 던진 진담 혹은 농담? “고레에다 감독이 무척 멋있어서 미혼이었다면 프러포즈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유부남만 인기 좋은 더~러운 세상.
물론, 아무리 좋다손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아쉬움, 왜 없겠나. 완벽한(?) 감독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 그러니까, 네(사)가지까지는 아니고. “꽤 많이 만나본 감독 중 하나고, 고레에다 감독도 날 알게 됐다. 그의 영화는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는데, 세 번째 영화인 <디스턴스>만 없다. 만났을 때, 그 얘길 하니까, 반색을 하며 보내주겠다는 거다. 주소를 적어줬는데, 1년이 지나도 안 오더라. <걸어도 걸어도> 국내 상영 당시에도 인터뷰를 했는데, 끝나면서 이 얘길 하니까, 너무 미안해하면서 다시 주소를 받아갔다. 지금, 1년 반이 지났는데...(웃음) 그거 하나만 빼고는 완벽하다.” 고레에다 감독님, 들리세요? 줄 건 주셔야죠. ^.~
환상의 빛, 책과 영화 사이
<환상의 빛> 원작이 번역 출간되면서, 추천사 얘기가 들어왔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 때문에 책을 들었다. 그의 데뷔작을 잉태한 원작은 어떨까.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깜짝 놀랐다. “어떤 면에선 소설이 (영화보다) 더 훌륭한 면도 있다. 플롯으로 읽는 소설이 있는데, 이 책은 문체로 읽는 소설이었다. 표제작인 「환상의 빛」은 중편인데, 문장을 보니 활자에서 소금기 같은 냄새가 났다. 짠 내. 문장이 워낙 좋아서 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을 또박또박 적어나간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남성 소설가가 여성을 화자로 서간체로 풀어나간다는 점이었다. 시쳇말로 ‘삑살이’도 없을뿐더러, 여성 작가도 써도 이렇게는 못 쓸것 같을 정도. 번역도 상당히 좋았던 데다, 예상 외로 소설이 무척 좋아서 기분 좋게 추천사를 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설은 영화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내용을 최대한 줄이자고 작심한 듯 영화를 풀어나간다. “소설에서 유미코가 다미오에게 시집가는 날, 기차 안에서 재일교포 여자를 만난다. 상당히 좋다. 그런데, 영화에선 생략됐다. 또 영화의 첫 장면. 유미코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집을 떠난 뒤 ‘아들이 죽여서 구들장에 묻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경찰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들장을 파본다. 물론 없다. 소설에 있는데, 영화에선 묘사가 안 돼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원형 같은 부분이 역시 있다. 이야기가 될 만한 부분을 거세하고 길을 거닐거나 노동을 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특히,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고레에다 감독은 대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데, <환상의 빛>은 원작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머릿속 꼬마전구가 ‘반짝’했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비유적으로 ‘박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엷을 薄, 빛 明. 일기로 말하자면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순간, 두 번이다. 두 번의 시간이 중요하다. 가장 인상적인 이 시간을, 영화는 프레임을 세로처럼 쓰면서 보여준다. 가로 프레임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문이나 벽을 이용하는데, 열린 문 사이로 좌우 벽을 보여주고 내부를 어둡게 보이게 하면 흡사 세로 프레임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세로 프레임에 애착이 많다. 이 영화 그런 게 많다. 고레에다 감독이 좋아하는 앵글 중 하나가 실내는 어둡고 바깥은 밝은 거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찍는. 근경의 어둠은 실내, 원경의 빛은 실외인 장면을 애호한다. 나는 그것이 폼 잡기로서의 애호가 아니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드러내는 징표라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삶은 어둠이자 실내에서, 빛은 저 멀리 바깥에, 작은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에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눈빛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진단한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이 영화에도 첫 장면부터 있으니까.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그렇듯.
“이건 감독의 인장 같은 거다. 오우삼의 흰 비둘기 같은 거. (웃음) 스타일면에서 이런 특성이 있는 한편, 이야기 측면에서도 그런 게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보면, 저밀도잖나. 드라마틱한 얘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얘기라면 아내가 한 대 후려친다거나 남자를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관습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없다. 재혼도 자연스럽고. 그게 원숙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p.47)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남은 여자. 이동진은 여자의 마음을 따라 간다. 첫 아이를 낳고 3개월, 그러니 생활력도 왕성할 즈음, 아침에 시시덕거리며 출근했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 왜, 왜, 왜!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나. 영화엔 안 나오지만,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다. 그런데, 이 남자가 죽은 거다.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깡촌으로 시집을 가고. 끝까지 해답을 주진 않는데, 영화는 소설보다 조금 더 나간다.”
그것이 클라이맥스였다. 여자가 지금의 남편과 바닷가에서 대화하는 장면. “좋긴 한데, 과하다고 생각한다. 환상의 빛, 바다의 유혹, 죽음의 유혹 같은 건데,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타나토스에 대한 근원적인 유혹이랄까. 살아야겠다는 유혹도 있지만, 스스로를 소멸하고픈 욕망도 있잖나.” 삶과 죽음 사이의 외줄타기. 연인 사이에만 ‘밀당(밀고 당기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밀당이 있다. 생사, 그 다르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그 무엇.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p.60)
남겨진 사람,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
그는 그리하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을 들먹인다. 이유를 찾고 싶은,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생각해보라. 셀러브리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신문은 방송은, 어떻게든 ‘왜’를 규정짓고 싶어 안달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이유가 단순하게 하나일까. 그럼에도 신문의 사회면은, 인간이 해답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을 증명하듯, 불쑥 내뱉는다. “폭음을 한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나. 사실은 90%가 알코올 중독이라서 마신다. 그런데도 이유를 댄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니 뭐니 하면서, 사람은 이유를 갖다 댄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p.59)
다시 돌아가, 이 영화는 고레에다 영화가 그렇듯,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초지일관 남겨진 사람 혹은 던져진 사람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영화, “남편이 왜 죽었을까, 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질문했을 때, 답이 주어질리 만무하잖나.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살아야 하잖나. 그것이 <환상의 빛>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뒤집어 말하면 의미가 애당초 없었을 때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데, 텍스트가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든 예는, 여자가 지하실 계단을 닦는 장면. 오랫동안 여자는 계단을 닦는다. 한참 그것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자가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따라간다. 그때, 남편을 생각했다고 가정한다면, 근원적인 질문은 그렇게 느닷없이 삶에 틈입한다는 것.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끊임없이 그 문제만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남자는 왜 죽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부재와 쓸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여자의 재혼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팬티 하나만 입고 교태부릴 때의 행복도 있다. 그저 현재 생활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는 거다. 그것이 끊임없이 삐죽삐죽 삐져나와 틈입한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영화고 소설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p.80)
이어 이동진 평론가와 가진 질의응답 시간.
영화 첫 부분에 미스터리처럼 죽음을 몰고선 풀려나갈 것처럼 가다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죽음이후 남겨진 시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레에다 감독은 왜 끝까지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만 얘기하는가. 동기나 이유가 궁금하다.
전제할 것은, 내가 고레에다 감독은 아니다. (웃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만약 이 텍스트에 반전이 있어서,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거나 ‘재혼남이 그 남자의 환상이었다’고 하면 이 텍스트는 완전히 깨지겠지. (웃음) 고레에다 감독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는다. 나는 고레에다 감독이 아직은 완성된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도상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볼 땐, 방법론적 회의론자 같은 측면이 있다. 장편 7편이 스타일 등이 다 달라서 같은 사람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환상의 빛>에서 롱쇼트와 롱테이크로 찍은 감독이, <원더풀 라이프>에선 전반은 다큐처럼, 후반은 극영화처럼 찍었다. <디스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찍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정해진 각본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배우의 미세한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찍었다. 연기부터 카메라, 편집까지 철저하게 가장 지독한 일본감독이 찍은 것처럼 만들었다. <하나>는 장르영화로 사무라이 코미디이며, <공기인형>은 한국배우를 데려다 만들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찍었던 베드신을 찍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직도 뭔가를 시도해보는 단계인거 같다. 흥미롭고 당분간 이렇게 할 것 같다. <하나>처럼 삑살이를 낼 것도 같지만, 현재 생각으론 끝까지 좋아할 것 같다. 좋은 영화는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고레에다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감독이 완성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완성된 감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고레에다가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의 온화해 보이는 영화들은 의외로 세상이나 삶 자체와의 철두철미한 마찰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에서 촬영 스타일까지, 전부 다르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아마도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끝까지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씨네21 763호, <영화가 맺어준 친구들, 언어의 힘을 생각하다> 중에서)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왔는데, 유미코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어떻게 봤나.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거기다. 유미코가 앙탈을 부리듯이 ‘왜 전부인을 사랑했는데, 나랑 결혼했냐’ 하면서 수습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불쑥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장면을 영화는 떼서 맨 뒤에 붙였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그래서 과하다싶은 장면을 만들었다.
남자(다미오)도 그 못지않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삶의 길이 남은 거고, 두 사람은 그 길에서 만난 동반자인 거지. 그 장면은 리얼한 앙탈이면서 장면으로서도 좋다. 그런 부분을 덜어낸 것도 좋고.
고레에다 감독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영화를 찍고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이 허우샤오시엔이고, 대만까지 가서 이 영화를 보여줬다더라. 딱 보고 스승님 왈, 영화 참 좋다. 근데 너는 모든 걸 미리 결정하고 찍었구나. 고레에다 감독이 머리에 한방을 맞은 것 같았다더라. 소설엔 강박이 없는데, 영화는 좋고 아름답지만 내 느낌엔 강박 같은 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지. 형식이 먼저 결정된 것 같은. ‘멀리 관조적으로 찍을 거야’와 같은 강박이 있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