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건희(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작자!)는 전혀 다른 세계다. 같은 성씨를 갖고 있지만, 누가 됐든, 한쪽은 화성인이다. 서로간의 거리? 아마도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정도? 건희 일가가 지배하는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을 주야장천 부르짖지만, 개소리다. 가족은 개뿔. 그건 그저 거짓부렁 상술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 해도 되겠다. 건희(개인이 아닌 계급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그리 일컫겠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불가촉천민. 내 입장에서 건희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총수님 되시겠다. 그와 나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건희가 멘붕(멘탈붕괴)된 금치산자(?)라는 루머 따윈 고려하지 말자. 쉽다. ‘돈’이다. 우리 둘은 화폐(의 많고 적음)로 갈라진다. 건희는 돈이 천문학 망원경을 끼고 바라봐야 할 정도로 미친듯이 길게 늘어서 있고, 나는 당장 눈앞에 돈도 안 보인다. 왜? 없으니까!

그런 우리, 서로에게 삼투할 수 있을까? 화해 가능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지구인과 화성인이 어찌 눈이 맞을 수 있단 말인가.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사이가 어찌 가까워질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우리를 만날 수 없는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됐든, 건희가 됐든, 누구든 레떼강(망각의 강)을 건넌다면 모를까. 우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래서 슬프냐고? 아니. 나는 그닥 슬플 것 없다. 애초 화성이나 안드로메다를 동경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건희가 슬플까? 아니, 그럴 리가. 진짜 멘붕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촉천민을 동경할 화폐는 없다. 우린, 만날 일도 없고, 서로를 동경할 일도 없다. 그러니 서로에게 삼투하는 건 건희가 삼성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확률과 같다. 나는 건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못 되 처먹은 삐뚤어진 놈이고, 건희는 나 따위의 인간은 없는 존재일 테니 우리는 어떻게든 만날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이 영화, <언터처블 : 1%의 우정>. 희한하다. 각자 1%의 위치, 즉 상위 1%와 하위 1%에 있는 존재가 서로에게 삼투한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교육이나 학습에 의한 주입이 아니다. 지금 1:99의 시대, ‘언터처블’한 관계가 ‘터처블’한 관계로 바뀌는 마술.     

영화의 제목인 ‘언터처블(Untouchable)’.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을 뜻하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뜻이다. 이 영화에서 언터처블을 꼽자면 드리스(오마르 사이)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섬이자 소외된 삶의 공간인 방리유(banlieueㆍ도시외곽지역)에 사는 흑인 하층민. 절도죄로 감옥살이도 했고,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인 삶이다.

반면 필립(프랑수아 클루제)는 가진 건 돈밖에 없다.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얼굴 부위를 제외한 전신불구가 됐다. 24시간 돌봐주는 손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백만장자. 그러므로 두 남자, 전혀 다르다. 딴판이다. 극과 극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 (돈으로 나눠진) 계급이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 것은 필립의 간호인을 뽑는 자리다. 드리스는 실은 그런 일, 관심 없다. 사회복지사들이 맡아야 할 영역 같은데, 그는 무일푼 건달이다. 복지수당을 타기 위한 사인이 필요할 뿐이다. 필립이 그런 드리스에게 보인 관심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경직된 채 빤한 대답을 내놓는 다른 간호인 후보자들과 다른 면모.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파국이 예정된 관계. 무거운 주제다. 그런데 드리스의 넉살이 이를 뛰어넘는다. 돈 때문에 고통당해도, 그는 돈 앞에 굽실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무언가를 동정하지 않는다. 전신마비의 장애인을 돌보게 일이지만, 그의 머리엔 동정이 없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내뱉고 행위 한다.

놀라울 뿐이다. 어떤 사회복지사도 할 수 없는 일, 그는 한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이론과 논리가 무색하다. 장애인을 다루면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 고용주에게 어떤 자세로 해야 한다는 복무규정도 없다. 그에게 필립은 그냥 사람이다. 돈 많은 고용주도 아니요, 전신마비의 장애인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농담과 유머는 어떤 악의도 없다. 순진무구함이라고 해도 좋고, 사려 깊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가 자연스레 혼재한다. 드리스의 눈에 필립은 욕망을 지닌 똑같은 사람이다. 다른 상류층의 행위 또한 그에겐 우습다.

영화는 그래서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도 유쾌하게 꼬집는다. ‘구별 짓기’를 하고 싶은 1%들에게 날리는 드리스는 똥침이라고 할까. 최상류층이 즐기는 오페라에 함께 한 드리스는 우스꽝스러운 무대의상과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에게 한 방 먹인다. 그림은 또 어떻고. 고상한 단어를 써가며 펜팔을 하며 간을 보는 필립에게 드리스는 바로 전화를 걸도록 만든다.


쓸데없이 엄숙해서 숨 막힐 듯한 상류층의 예절 따윈 가라. 이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한가. 그런 틀에 사로잡힌 필립에게 드리스는 공기요, 산소다. 다친 이후 당최 맛볼 수 없었던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나눠 피는 장면. 누가 전신마비 장애인에게 담배를 나눠 피자고 할 것인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큰 일 날 것처럼 펄쩍 뛰겠지만 필립의 표정은 그 모든 것을 휘발시킨다. 그토록 행복한 표정이라니. 유리벽처럼 분리된 계층 간의 벽이 그 순간만큼은 허물어졌다. 명장면이다.

더불어 클래식 연주로 무장됐던 필립의 생일 파티. 드리스의 해석은 간단하다. 휴대폰 소리요, 광고이자, <톰과 제리>의 음악일 뿌니다. 이어 드리스의 MP3플레이어에서 나오는 ‘Boogie Wonderland(Earth Wind and Fire)’. 그 모든 엄숙함과 진지함을 뛰어넘어 모두의 춤을 이끈다. 필립에겐 피하고 싶은 생일파티가 새롭게 탄생했다. 드리스의 힘이다.

이 두 명장면, 나를 사로잡았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계급이 서로에게 삼투하여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상황. 그것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 하는 의심도 없었다. 그것이 설혹 판타지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만큼 건희와 나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너고 싶었다. 용매가 스며들면서 두 액체의 농도가 같아진다는 삼투현상에 나는 가슴이 시원하고 상쾌․유쾌했다. 재기 넘치는 진짜 우정. 

무엇보다 실화란다. 놀랍다.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낸 농담 같은 현실에 나는 그만 감동 먹었다. 터처블한 것이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 엄숙하지 않아서 좋다. 음악이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를 더욱 따스하게 감싸준다. 멋진 영화다. ‘언터처블’이 ‘터처블’로 가는 과정, 그것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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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 2명. 특히 한 명은 15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저자.
뭐, 스펙 하나는 끝내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합인 것 같다만,

그 잘난 이력 때문인지,
(의도한 바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번들번들하게 난 척이 되고, 멘토질 해대는데 공허하다.
그놈의 절친 타령은 뭘 그리 해대누. 그들과 절친이라고 눈도장이라도 찍으면 뭔가 달라져?

청춘멘토 김난도? 사랑멘토 곽금주?
그냥 잘났다. 그뿐이다. 감흥, 없다. 감동, 없다.

그 공허함 속에서도 유독 빛나는 존재가 있으니. 다행이지.

유진 박. 눈 앞에서 유진 박의 공연을 본 것은 생애 처음인데, 그만 뿅 갔다.

음악이 나오기 전, 수줍음과 서툶이 지배하던 유진 박은 음악과 함께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아니, 그는 악기다. 바이올린 그 자체다.



유진 박은 음악과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다.
약간 벌어진 입. 음악과 완벽하게 조응하는 몸짓. 관객들을 향한 소통.
감동과 감흥은 그런 것이다.


그를 보며, 서번트 증후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무대에선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을 연주하는 품새다. 온전한 몰입의 풍경. 



유진 박, 멋지고 아름답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들이 내뱉는 공허함보다,
유진 박의 텅 빈 음악이 봄밤을 감동과 감흥, 흥분으로 감싼다.


역시, 음악의 힘은 세다.
당신에게도, 유진 박을 권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놓치지 말고 만나길 바란다.
왜, 유진 박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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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러더라. 살아서 지옥을 맛보는 것, 그게 바로 배우자의 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배우자 없는 나로선, 끔찍할 것이라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가니>를 보곤, 하나 덧붙였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살아서 지옥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데도 그것은 생지옥. 
내가 직접 당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아프고 아팠다. 
성폭행. 강간과 폭행.
그것도 권력과 위계에 의해 저항조차 불가능했던.
더구나 그 권력은 타인의 장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았다. 개새끼, 아니 개새끼보다 더 못한. 

나는 꽤나 극장을 찾는 편인데,
극장에서 그렇게 많은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온 것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서 겪어야 하는 지옥에 대한 공감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도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후벼팠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진짜 모르고 있었던가. 

<도가니> 개봉 직후 이른바 '여론'이 들끓었다. 그것은 공분.
실재 사건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그 지옥을 방조·방치한 것은 물론 지옥을 조장한 세력과 협잡 아닌 협잡을 한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그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고 있냐며 미친듯이 들끓는데, 나는 그것이 더 불편했다.
삐딱한 성정 때문이겠지만 씨바, 지들이 사는 곳은 다 천국이가 사는 곳인가? 
진짜 몰랐단 말인가?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것은 아니고? 내 것만 후비느라 제쳐놓은 건 아니고? 

<도가니>. 단순 장애인 성폭행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과 구조,
그것이 어떻게 약자에게 지옥을 조장하는지 보여준다. 

교육청과 시청은 사건이 벌어진 시간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책임을 미룬다. 당장 내게 닥칠 비판과 책임이 두렵다. 그러니, 그들에겐 은폐가 유일한 능사다. 
경찰은 교장(교사)와 짜웅하고, 돈독(이 오를대로 오른 끈적)한 관계를 유지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는 '지역사회 발전'을 들먹이며 가해자를 두둔한다.
교회라고 다른가. 사탄의 무리 운운하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강인호(공유)와 아이들에게 돌을 던진다. 돈이라는 신종 예수에게 죄를 씻은 죄 없는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변호사? 그가 변호하는 건, 지옥이다. 물론 있는 자들에겐 천국. 

동물농장이요, 동물의 왕국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동물들의 리더는 동지 운운하지만 실은 그 동지 동무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이요, 내게 돌아와야 할 이득이다.

<도가니>의 그 어이 없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학교장, 교사라는 권위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사랑의 매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법과 질서의 유지는 또 어떤가. 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그저 이름을 달리한 자웅동체다.
이른바 '뿜빠이(N분의 1)'의 논리가 물밑에 흐른다.
힘 없는 99%의 약자가 대면해야 하는 것, 결국 지옥이다.

들끓는 여론에서 또한 불편한 것은 처벌('도가니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 왜 그것에는 처벌만큼 비중을 두지 않는가.

당연히 도가니법의 제정(장애인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대책)은 <도가니>가 가져온 성취이자 긍정적인 영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처벌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양 착각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왜 그렇게 치유에는 인색한가? 
향후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당한 사람은 치유가 되는가? 지옥을 맛본 것이 희석되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서 지옥을 맛본 사람, 개인에 대한 치유 아닌가. 사회적인 치유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방을 위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선적인 치유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회적 시스템의 구멍과 불합리로 지옥을 맛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치유이며,
그것이 가능해야 정상적인 사회다.
그들이 맛봐야 했던 지옥은 혼자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옥이요, 우리의 수수방관이 빚어낸 무간지옥이다.


치유부터 신경쓰자.
용서는 지옥을 맛본 아이들의 부모도, 할머니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는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트라우마, 그들이 겪은 지옥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
정혜신·이명수 선생님의 '와락(http://thewarak.com)'이 아름다운 이유다.
물론 당연하게 그것은 개인들의 몫이 아닌 국가와 공동체의 몫이어야 한다.
개인이 그렇게 나서도록 하는 것, 역시 이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분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표적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 가해자들에게만 향해선 안 된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본디 시스템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단순히 선거에서의 승리로 끝낼 게 아니다. 시스템과 세계를 갈아 엎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래봤자 기득세력, 민주통합당도 아니다. 처벌도 신통찮지만 치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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