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다. <첨밀밀>이 그랬다. 처음으로 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는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다.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다.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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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을 공동체'(서울에 핀 마을이라는 꽃)를 향하면서,
내가 바라는 마을의 한 풍경, 그리고 내 마음의 한 풍경.
이런 풍경이 마을 한켠에서 펼쳐진다면 참 좋겠다. 
스마트폰 대신 책이라면 더 좋겠고.  

아마도, 행복. 셋은 행복해 보인다.
특히, 여자의 다리에 기댄 개의 절묘한 모습.
그것은 어쩌면 행복의 또 다른 모습 혹은 얼굴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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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접하면.
"나는 어떤 왕도 섬기지 않는 세계 시민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 1784년 11월, 문예지 <라이니센 탈리아>.

나는 언제고, 저런 선언을 하면서 글을 쓰고 커피를 내릴 수 있을까? 

가령, 이렇게?
나는 어떤 자본도 섬기지 않는 세계 시민으로서 커피를 만드는 것이다.

허수경 시인의 말씀을 약간 바꿔서,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면서 아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 나는 실러의 저 명징하고 육중한 선언처럼 할 자신이 없다...
저 짧은 글에는 실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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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5일, 씨즈에서 주최한 사회적기업 관련, '비전 나눔 토크쇼'에 풍덩. 푸릇파릇한 청춘들의 세계를 향한 눈빛이 이글이글하다. 나야 흐리멍덩 동태 눈깔로 봤지만, 그들의 내뿜는 열기는 후끈후끈, 하악하악. 사회적기업이 빠질 수 있는, '좋은 일, 좋은 의미'의 함정. 암, 나도 저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봤다. 자가당착으로 빠지는 경우를 봤으니까. 그럼으로써, 과도한 노동, 잦은 구성원 교체, 민주적 운영의 상실 등 무늬만 사회적기업인 경우를 경험했으니까.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라지만, 지금 내가 보는 인증제도는 '독'이다. 사회적기업이 대체 인증을 받아야 할 이유가 뭣인가. 많은 이들이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아서 인건비나 딸려는 현실. 인증제도의 감옥에 창의와 혁신은 갇혔다. 박병은 트래블러스맵 이사가 지적한 것에 나는 완전 동의. '사회적기업 간판'과 '사회 혁신'은 동의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기업의 구성원이 모두 행복한가!
쿠바 독립의 아버지이자, 문인·정치가·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에 큰 영향을 줬다는 호세 마르티는 이리 말하지 않았던가.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올해, 사회적기업 혁신모델 탐방단이 역시 출동한다. 고민할 만하다. IT 및 SNS, 적정기술, 지역개발, 공동체 기업, 사회적기업을 위한 사회적기업, 대안소비.

나는 어떤 詩를 읊을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딸이 세계가 뭔지 물었을 때, 해주고 싶은 말이 계속 남는다.
"너도 세계의 일부고, 세계도 너의 일부란다. 그 다음은 네가 생각하렴.

아울러,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아버지(오다기리 죠)가 아들에게 했던 말도.
"네가 가족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음악이라든가 세계라든가."

아무렴. 사회적기업은, 세계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근데, 문제는 오다기리 죠가 저리 말하면 간지 작렬인데, 내가 하면 똥폼이 된다는 것.
아, 슬프다. 잘난 것들만 대접받는, 이 멋진 세상~
  



홍자매

홍은정, 홍은영으로 구성된 팀(홍자매)에 나는 홀라당 반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자신 없는 것을 자신 없다, 그러니 도와 달라, 고 말하는 이들의 숨기지 못하는 '진정성'은 자신감과 같은 단어로 규정할 것이 아니다. 패기만만하고 자신감 충만해 뵈는 여느 청춘들과 다른 빛깔. 나는 그 빛깔이야말로 사회적기업의 또 다른 가능성이라고 봤다. 아니, 그냥 그들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눈은 번쩍, 귀는 쫑긋, 입은 터억. 막감동, 완전감동, 폭풍감동.

'요행'을 바라지 말고 건강한 유기농 '여행'을! 이라는 테마를 건 그들의 여정이 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로컬푸드' 그리고 '좋은 먹거리'를 생각하고 있을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결합할 여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살짝 들떴다. 동지들을 만난듯하여. 분명 좋은 사람들이다, 확신까지 들 정도. 아름다운 자매다.홍자매.

부디, 똥파리가 들러붙어도 잘 떨어트리길. 파리채는 내가 책임진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홍자매팀은, 몇해 전 무농약 귤농사를 짓기 시작한 아버지를 계기로 '규격 외 농산물 활용과 지역관광을 통한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이다.
지역관광의 사례학습, 규격 외 농산물의 이용현황과 활용가능 사례, 지역농산물의 2차 가공품 사례와 판로모색을 주제로 일본을 탐방했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요리기술을 배우는 등 조용하지만 차근차근 사회적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쿠바
1월1일의 쿠바. 나는 여전히 그것을 그린다. 1953년 7월26일부터 전개된 쿠바혁명은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냄으로써 혁명의 깃발을 꽂았다.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가 꽂힌 건, 바로 쿠바(인들과 음악). 이토록 관능적인 포스터하곤. 딱 보면, 숨 막히지 않나? 나? 말초신경 돋는다! 'Must-See 필름'.

책도 질렀다.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 반성장 복지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내게 <치코와 리타>를 보여주면, 그 어느 해 1월1일 혁명기념일에 맞춰 쿠바로 갈 때 데리고 간다! 무슨 재주로? 사회적기업은 가능하다. 쿠바에도 커피가 나거든! 크리스탈 마운틴. 나와 함께 관능의 볼레로를~



김광석

자정 넘은 이 시각 1월 6일, (김)광석이 형 16주기.

고딩 때 한 소녀가 수줍게 건넨 녹음테이프의 B면 첫 곡이 '사랑했지만'.(A면 첫 곡은 퀸의 'Love of my life') 그런 시절, 있었다. 그때 처음 '김광석'을 알았고, 그때 이후 '김광석이라는 노래'를 줄곧 좋아했다. 탁한 듯 맑았고, 노래는 세상을 품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 '이등병의 편지'는 또 얼마나 불러 제쳐댔던가. 저주 받은 이 군댈 나가면, 광석이 형 콘서트 보러 대학로 학전블루로 가야지 맘 먹고 있던, 제대 100일이 채 남지 않았던 1996년의 1월6일. 광석이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TV의 미친(?) 소리에 멍~하던 병장 이준수. 서른 즈음엔, 담배 뻑뻑 피면서 '서른 즈음에'를 주야장천 들었었다.

비록 사회적기업가들과의 약속 때문에 오후 8시에 펼쳐지는 16주기 콘서트 ‘김광석 따라부르기 2012’에는 못 가지만, 술 들이키고, 광석이 형 노래나 불러 제쳐야지.

광석이 형, 잘 있는교? ㅠ.ㅠ



배짱

1년여 전에 처음 봰 한 출판사 대표님이 "배짱 많게 생겨서" 날 기억하고 있다고 얘길 건넨다. 기억해 주신 것, 참 고마운데, 그 말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 좋은 말이겠지?ㅋ 사실, 난 그 대표님 기억을 못했거든. 아, 어쩜 좋아. 미인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뇌 구조라.^^; 오늘, [내 마음을 만지다] 참 좋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詩를 꺼낸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 원래 우리 각자 안에 시인 있거든.
우리 자체가 원래 詩거든.
그러니, 이런 질문, 당연하다.
"나는 어떤 詩가 될 것인가?"

광석이 형은 그래, 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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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넘어 혁명을 꾀한 사진예술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멕시코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영화, <프리다>.

섹시한 배우로 각인됐던 셀마 헤이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프리다 칼로를 표현함으로써 화제가 됐었다.

프리다에 가렸지만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다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가 아니다. 극중에서 프리다와 춤을 췄던 여자. 자유분방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사진가로, 애슐리 주드가 연기했던 티나 모도티.

나는 <프리다>처럼 <티나>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가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사랑의 화신이었던 티나 모도티를 다룬. <프리다>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듯, 티나를 다룬 영화는 그녀를 되짚어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되짚어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혁명. 닥치고, 혁명!


티나 모도티, 독립적이면서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에드워드, 부드럽게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오늘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여기 홀로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오. 에드워드,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는지! 아침까지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베고 누워 있었답니다.

그런데 날 깨운 게 그것의 희미한 향기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서 발산되는 듯한 당신과 내 욕망의 혼? 그래요. 어떻게든 달성하고픈 욕망에 취하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고 미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겠지요.

(《티나 모도티》, p.86, 티나 모도티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에드워드 웨스턴이 찍은 티나 모도티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는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 사진에 입문했다. 1919년이었다. 앞서 그녀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로보와 사랑했었다. 로보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만나 예술과 사회, 인문을 습득했던 그녀였다. 멕시코 문화를 보길 원했던 로보가 현지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는 웨스턴의 모델이자 조수가 됐다. 이어,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으며 티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멕시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혁명 후기 멕시코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나게 해준 이도 티나였다. 당시 프리다는 티나를 숭배했던 소녀였다. 문화계 모임에서 티나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했다. 허나 웨스턴은 결국 그녀를 떠났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드워드가 떠난 뒤, 멕시코에서 사진의 길을 걷고 있던 1928년. 그녀는 쿠바출신의 망명정치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연인이 된다. 티나는 특히 멜라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사랑이 인도한 길을 자연스레 따랐다.

로보가 알려준 예술,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 안토니오가 제시한 혁명. 그 모든 것이 티나의 것이 됐다. 티나는 사랑 덕분에 존재했던 것일까. 티나를 사랑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듬해, 안토니오는 정적들로부터 암살당했다. 티나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도 악의적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을 향한 세상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었다. 한 번은 “미국에선 美가 모든 것의 기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오의 저격은 그녀에게 팜 파탈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미지의 저주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혁명을 향한 전진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과 혁명은 그래서 통한다. 사랑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티나 모도티, 운명과 싸워 혁명을 꾀했던 여인

티나는 언제나 주어진 운명에 싸워야했다. 그녀의 외모에서 덧씌워진 부당한 이미지도 그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봉부터 시작했다. 연극․영화에도 몸을 담았고, 사랑을 통해 예술가․작가들과 교류했다. 주어진 대로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이 혁명을 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티나의 예술세계에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였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멕시코에서 그녀의 예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티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를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는데, 티나의 작품은 그런 도덕적 감정을 동반한다. 다큐멘터리적 요소 없이도 클로즈업해서 찍은 ‘손’시리즈. 그것은 예술과 혁명을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에 거주한 1923~1930년에 찍은 250여 컷에 잘 형상화돼 있다. 멕시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시기, 그녀는 그런 시대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에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첫 개인전.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혁명이 계속 꽃피진 못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6주 후 돌아온 것은 멕시코 정부의 추방 명령이었다. 그녀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혐의를 벗었지만 그녀는 멕시코를 떠났다. 사진에 우호적이었던 독일이 다음 행선지였다. 케테 콜비츠, 게오르그 그로츠 등과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회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치가 있는 독일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사용하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선 라이카 카메라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가 찾은 곳은 모스크바였다. 그녀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혁명동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도 나눴다.


혁명은 여전히 그녀의 오브제였다.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도 활동했지만,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녀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그녀는 사진을 접었다. 자신의 혁명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2년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다.


티나 모도티.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빈 여인. 그녀에게 사진은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내용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은 사후 더욱 큰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의 소더비 경매. 그녀의 작품 <장미>는 16만5000달러에 팔렸다.


시절은 점점 더 노동자에게 각박해진다. 99%의 피눈물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예술과 혁명의 접점을 본 티나 모도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에게서, 혁명을 되짚어보자. 행동하자. 점령하자.

사랑과 혁명은, 각자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문화예술 크리틱저널 뷰즈 21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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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첫
어쩌다 그렇게 겹치는 날이 있다. 온전히 우연이지만. 
채식레스토랑에서 한 송년회. 첫사랑, 언제였느냐고 묻는다.
내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지만, 안다. 묻는 것은 첫 번째 첫사랑.
스물 셋. 첫 번째를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니까. 안녕, 내 사랑.

그리고 최지우. 몰랐는데, <귀천도>에 캐스팅됐다가 낙마했단다.
귀천도. 귀천도애. 영화 못 봤지만, 노래 주야장천 듣고 읊었다. 맞다, 표절.
상관 없었다. 이미 노래가 파고든 뒤였으니까. 그런 내가 세뇌를 한 까닭일까.
그녀, <귀천도애>와 다른 한 노래를 가끔 원했다. 그녀, 원한다면 나는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주크박스. 추억 돋네. 하늘로 돌아가는 길의 슬픔, 歸天道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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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알싸하게 차가운 날씨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까지 꼭 쓰고 싶은 책이 떠올랐다. 사랑.
매우 거대하고 넓고 깊은 주제라, 사실 난망한 것이 사실이나,
아는 만큼, 알고자 최대한 노력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혹한의 칼바람을 맞아서 화들짝 놀라서겠지. 그래도, 사랑.
너는 나고, 나는 너 자신이야, 우리는 한 사람이야.
온 삶을 걸거나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든가, 사랑.
참, 미칠듯이 매혹적인 주제다.
지금처럼 비루하고 천박하게 쓰일 단어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판타지라고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냉면
겨울의 맛은 역시 냉면.
오늘, 4대천황의 하나로 꼽히는 필동면옥이었는데,
장충동 평양면옥의 슴슴한 담백함에 비해선 아쉬운 감이 있다.
어쩌면, 누구와 함께였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평양면옥에선 사랑이 앞에 있었을 때니, 그 맛이라는 게 얼마나 감질났겠는가.
쩝, 그리 생각하자니 좀 슬프군.
계절의 맛보다, 더 진한 것이 사랑의 맛인가 보다.
아, 나는 맛칼럼 같은 건 쓰기 글렀다.


원 데이
어쩜 이리, 한 마음을 한 순간에 홀라당 빼앗는 영화포스터가 다 있는가.
포스터 하나 때문에 이 사랑을 만나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앤 헤서웨이! <브로크백 마운틴>때부터 알아봤다. 된장, 이토록 알흠답다니.
Twenty years, Two people... 내용이야 어쨌든 닥치고 관람.
혹시 실망하더라도, 포스터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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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
그토록 애가 타게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혼자가 힘들어 곁에 있는 여자 친구가 이제는 사랑이 되 버렸잖아. 운명같은 여잘 만났어.
이제 나를 떠나 달라고, 그녀에게 말해 버리면 보나마나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그녈 다시 볼 수 없게 돼버리면 나도 역시 망가질 것 뻔한데...

- 쿨, <운명> 중에서 -

웬만해선 운명의 장난을 말릴 수 없다
 


그렇다. 운명이란 '넘', 장난을 무쟈게 좋아한다. 웬만해선 그 넘의 장난,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대개의 사람살이, 그 장난에 울고 웃는다. 운명과 맞장뜨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운명이 치는 장난은 다 받아줘야 하나? 운명을 거스른 자에겐 천벌이? 벼락이? 에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운명이 뭐길래?

그런데, 태생적으로 운명이라는 말, '닥치고 복무'를 내포한다. 즉, '따라야 할 무엇'이다. 때론 그 복무가 좋을 수도 있으나,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솔깃한 측면도 있다. 운명이랍시고, 질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뭐하다 안 되면 운명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넘, 실체는 불분명하다. 모호한 대상이다. 이 넘도 뜬금없이 덤태기쓰는 건 억울할 터. “지가 잘못해 놓고선 왜 나보고만 그래”하며 눈을 흘길 지도 모른다. 운명은 어쨌든 장난꾸러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은 장난에 넘어가지 말란 얘기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우연이 겹겹이 쌓은 운명

좋다. 질문하나 하자. 당신,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당신 사랑은 운명적인가, 아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체 운명이 무엇이기에?


운명은 필연이란 말과 통한다. 필연은 또 우연과 한껏차이의 한통속이다. 운명은 결국 우연의 중첩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야~”라는 말, 우연을 쌓아서 운명으로 치환하겠단 기대의 표현이다. 한편으론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겠단 의지다. 아, 거룩할 손, 장난에 아랑곳 않는 저 대범함. 


<세렌디피티>, 그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운명으로 치장된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주되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려선 안 된다고 속삭인다. 운명이란 넘, 앞서 얘기했듯 어떤 장난질로 우릴 당황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늘 운명의 어떤 장난에도 열려 있을 것!


7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 친 조나단(존 쿠삭)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당시 그들 귓가에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울린 것일까. 운명이 문을 두들긴다. 그들, 운명을 놓고 배팅을 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겹이 쌓인다. 물론 예상 가능하듯, 그 우연(들)은 운명을 위한 깔맞춤이다. 


이런 우연을 보자. 그 사람이 좋아했던 옛 영화 포스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붙는다. 동명이인이 자꾸 등장한다. 그 사람 이름을 담은 노래도 울려 퍼진다. 뭔가 작위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화는 우연을 중첩한다.

하긴 대개의 우리는 어떤 만남앞에서 그런 착각(!)을 부른다. 그저 우연일 뿐인데, 운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주술을 건다. 운명에 굶주렸다는 얘기다. 혹은 생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태어난 것도 운명이니, 그 정도는 애교겠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허나, 조나단과 사라에겐 각기 다른 사람이 있다.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들의 존재감이라는 게 그렇다. 조나단과 사라를 엮어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쉽고 대수로울 수 있으랴. 어떤 만남이든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비율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거기에 우연섞인 특별함까지 가미된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운명론자’ 사라와 ‘개척론자’ 조나단은 어떻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운명을 만들 것인가.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운수좋은 뜻밖의 발견’이란 뜻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운명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수단을 나열한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란 옛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데서 유래한 Serendipity. 영화에선 ‘운명의 사랑을 발견하는 능력’이란 뜻으로 포장돼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집중한다. 배팅 치고는 지나치게 센 것 같은데, 5달러 지폐와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동원된다. 전화번호가 그곳에 있다. 모험심, 참 충만하다. 기민 기고, 아니면 말고, 이거나. 나는 운명과 저런 배팅 못한다.

어쨌든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치고는 가혹하지만 그건 또한 ‘영화적 운명’이다. ‘우린 운명, 곧 필연’임을 확인하기 위한. 그래서 두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뺑이를 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불일치가 ‘이끌림’을 희석시킬 수 없듯, 운명적인 사랑을 찾겠다는데 그까이꺼 대수로울 거 없다는 자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몇 년 전, 뉴욕을 찾았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가 명분이었지만, 내 욕심 중 하나는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장)에 있었다. 왜 그곳이었냐고? 조나단과 사라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손을 잡는다. 스케이트를 탄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그것을 밟고 싶었고, 결국 밟았다. 내 영어 이름은 조나단(조너~선)이다. 사라. 하긴 그 이름.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영어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얘기해줬을 때, 그녀는 우리를 '운명'이라고 했었다. 하하.;;
 


<세렌디피티>. 가슴의 ‘끌림’을 ‘운명’으로 치환하기 위한 적재적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운명론’의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된다. 여느 만남이 날줄과 씨줄의 오묘한 엮임이 아니겠느냐마는, 특별한 이끌림은 분명 있다. 이때, 감정의 동요는 좀 더 격렬하게 수반된다. 세월이 꼭 망각과 결부되지는 않는 듯하다. <세렌디피티>는 그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그렇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각자 결혼식을 앞둔 조나단과 사라, ‘한 순간’을 잊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애교’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7년이 지난 영수증을 찾아 헤매는 조나단이나 친구를 억지 대동해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사라의 애처로움. 작위적인 우연이지만, 그 끈을 연결해주고픈 애틋함을 유발한다. (허나, 케이트 베킨세일 정도의 여자라면, 어떻게든 없는 운명도 조작하고 싶다!)


우연과 운명은 다른 빛깔이 아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잘 짜인 각본의 무대에서 시간의 흐름이 상정한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각본을 미리 엿볼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둘 끼워 맞추고 “운명아! 덤벼라 내가 간다”며 큰 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도 사람살이의 재미니까. 옥동자는 외친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그러니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며 연말연시다. <세렌디피티>의 시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 시즌이라야 이 영화는 산다.
이 작위와 상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오직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니까.

참, 어쩌다 보니 남자3호가 됐다. 세렌디피티다.
무슨 말이냐고? 글쎄... 세렌디피티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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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1년 만난 여자들 중에 가장 예쁜, 아니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를 봤다. 올해가 며칠 남았지만, 글쎄, 바뀔까? 그리 된다면 물론 좋지만, 보는 순간, 속으로 우와~ 했다. 동공은 커지만 귀는 쫑긋, 심장은 빠담빠담. 물론 속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고, 다른 이들도 함께 한 자리라, 그저 외모와 아우라가 모든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1년 동안 봤던 모든 여자를 압도하는 지성과 아름다움.

美, 그 자체. Beauty, PSO!

허나, 내게만 치명적이라면 그녀가 결혼을 했단다. 우르르르, 하늘에 구멍이 뿡~ 뚫리고 있었다. 이른바, 나이 먹은 여자들이 불평 혹은 불만을 내지르곤 한다. 세상의 멋진 남자들은 이미 다른 여자들이 채갔어. 그때 내 심정이 그랬다.

아,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 美는 이미 다른 남자들이 채갔구나. 저런 여자와 사랑하고 결혼하려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해야하는 거지? 결혼이라는 제도는 참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구나. 스쳐지나가며 놓친 것들도 때론 얼마나 소중한가 말이다. 2011년, 그렇게 간다.


남인사십
서울 사는 몇몇 고등학교 동창들. 송년회랍시고 어제 모였다. 얘길 나누다, 내년 사십이 된단다. 맞다. 내가 그 얘길 꺼냈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 한 녀석은, 누군가는 사십이 되는 새해 첫날, 온몸의 마디마디가 다 쑤시고 몸부터 달라진다는 얘길 꺼낸다. 우스개였는데도 녀석들 눈빛이 후~하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그들의 거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교육)와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혹은 출세·승진).

뭔 말을 하다가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을 슬쩍 꺼냈더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구박만 날아든다. '기본 소득' 얘기도 좀체 통하지 않는다. 나의 절망과는 다른 자포자기다. 그들은 이미 세상의 진보와 꿈따윈 사치처럼 생각하는 세대가 됐다. 슬픈 일이다. 사십이어서 슬픈 게 아니라, '나'는 지워지고 가족위주로만(가정적인 것이 아닌!) 사고하면서 세상을 사유하지 못하는 샐러리맨들이어서. 슬픈 내 동창들의 추억이여.

슬퍼도 다시 한 번 오지 않을, 사십이여. 사십, 그냥 이 쇼를 즐겨라(Just enjoy the show!). 인생은 미로 같고 사랑은 수수께끼 같으니까. 잘 얻어먹었으니, 녀석들에게 건네는 나의 선물, < The Sh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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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의도한 바는 아니나, 12월이 주는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나이 얘기가 꼭 들이민다. 그저께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누군가는 오십이라서, 누군가는 사십이라서. 이십대 중반부터였나. 얼른 나이를 잡숫고 싶던 나는, 

아직 여전히 그렇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나이듦은 뭔가 감투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이듦을 꿈꾼다. 물론, '제대로' 나이듦. 사십,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에, 나는 어느덧 사십줄을 바라보는 나와 내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그 나이를 이야기한 내 오래된 친구들에게.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슬픈 것이다. 

'한 사람의 나이-누군가가 내게 가장 슬픈 단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죽음이니 가난이니를 다 제쳐두고 나이라고 말하겠다. 그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어쩐지 스무 살이라는 말도 슬프고 서른 살이라는 말도 그것대로 슬프다. 쉰 살은 쉰 살이어서 여든은 여든이어서 슬프다.

어떤 세상 없는 부모 형제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이까지도 모두,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우치는 데에 어떤 사람은 이십 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사십 년이 걸린다. 또는 영영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일찍 깨우치는 사람들은 그래서 슬프고, 끝내 깨닫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또 그래서 슬프다..."                                  

                                                                - 김한길, 《눈뜨면 없어라》중에서


요리
오래된 친구들과의 식사. 하하호호. 웃고 떠든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때론 그렇다. 서로를 신뢰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연놈들, 결혼 연식도 좀 됐고, 아이들도 숭숭 큰다. 인생이 그렇듯, 결혼도 언제든 업다운이 있는 법이지만, 그 결혼이란 게, 그냥 안주하고 있는 느낌.

그들에게도, 여느 부부가 그렇듯, 결혼이 감정을 죽이고 사랑보다 일상이 강해진 그런 것이 됐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고 대신 정이 둥지를 텄다고 하겠지만, 좀 안타까운 면도 있다. 그 빛나던 사랑이 으스러진 것. 다시는 빛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은 그저 오래된 기억일까? 지금, 사랑하냐고 물으면, 웃으며 툭 던진다. 에이, 그냥 가족이야, 하하호호. 그 웃음이 왠지, 나는 아쉽다. 사랑의 지지고볶기 보다는, 그저 일상이 강해진 풍경.

그러다 그들, 으레 결혼얘길 스윽~ 꺼낸다. 결혼, 어떡할거야? 떼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누. 허나 분명한 것은, 나는 꼭 커피를 포함해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다짐한다. 《요리 본능》에선, 화식, 즉 요리가 성별 분업을 가져오고, 요리는 여자의 것으로 규범처럼 굳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더 자주 부엌에서 요리하리라. 장석주의 詩가 아니더라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는 남자만큼 멋있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하긴, 내 친구도 결혼 전에는 그랬다. 하하.  

그러니까,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마구마구 불러 일으키는 여자, 그런 여자라면 나는 첫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은 늘 첫사랑, 모두 첫사랑. 일상보다 강한 사랑을 위해, 나는 당신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 자, 오늘은 어떤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리할까요? *^.~*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으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 장석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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