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다. <첨밀밀>이 그랬다. 처음으로 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는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다.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다.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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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
그토록 애가 타게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혼자가 힘들어 곁에 있는 여자 친구가 이제는 사랑이 되 버렸잖아. 운명같은 여잘 만났어.
이제 나를 떠나 달라고, 그녀에게 말해 버리면 보나마나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그녈 다시 볼 수 없게 돼버리면 나도 역시 망가질 것 뻔한데...

- 쿨, <운명> 중에서 -

웬만해선 운명의 장난을 말릴 수 없다
 


그렇다. 운명이란 '넘', 장난을 무쟈게 좋아한다. 웬만해선 그 넘의 장난,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대개의 사람살이, 그 장난에 울고 웃는다. 운명과 맞장뜨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운명이 치는 장난은 다 받아줘야 하나? 운명을 거스른 자에겐 천벌이? 벼락이? 에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운명이 뭐길래?

그런데, 태생적으로 운명이라는 말, '닥치고 복무'를 내포한다. 즉, '따라야 할 무엇'이다. 때론 그 복무가 좋을 수도 있으나,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솔깃한 측면도 있다. 운명이랍시고, 질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뭐하다 안 되면 운명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넘, 실체는 불분명하다. 모호한 대상이다. 이 넘도 뜬금없이 덤태기쓰는 건 억울할 터. “지가 잘못해 놓고선 왜 나보고만 그래”하며 눈을 흘길 지도 모른다. 운명은 어쨌든 장난꾸러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은 장난에 넘어가지 말란 얘기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우연이 겹겹이 쌓은 운명

좋다. 질문하나 하자. 당신,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당신 사랑은 운명적인가, 아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체 운명이 무엇이기에?


운명은 필연이란 말과 통한다. 필연은 또 우연과 한껏차이의 한통속이다. 운명은 결국 우연의 중첩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야~”라는 말, 우연을 쌓아서 운명으로 치환하겠단 기대의 표현이다. 한편으론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겠단 의지다. 아, 거룩할 손, 장난에 아랑곳 않는 저 대범함. 


<세렌디피티>, 그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운명으로 치장된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주되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려선 안 된다고 속삭인다. 운명이란 넘, 앞서 얘기했듯 어떤 장난질로 우릴 당황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늘 운명의 어떤 장난에도 열려 있을 것!


7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 친 조나단(존 쿠삭)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당시 그들 귓가에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울린 것일까. 운명이 문을 두들긴다. 그들, 운명을 놓고 배팅을 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겹이 쌓인다. 물론 예상 가능하듯, 그 우연(들)은 운명을 위한 깔맞춤이다. 


이런 우연을 보자. 그 사람이 좋아했던 옛 영화 포스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붙는다. 동명이인이 자꾸 등장한다. 그 사람 이름을 담은 노래도 울려 퍼진다. 뭔가 작위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화는 우연을 중첩한다.

하긴 대개의 우리는 어떤 만남앞에서 그런 착각(!)을 부른다. 그저 우연일 뿐인데, 운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주술을 건다. 운명에 굶주렸다는 얘기다. 혹은 생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태어난 것도 운명이니, 그 정도는 애교겠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허나, 조나단과 사라에겐 각기 다른 사람이 있다.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들의 존재감이라는 게 그렇다. 조나단과 사라를 엮어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쉽고 대수로울 수 있으랴. 어떤 만남이든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비율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거기에 우연섞인 특별함까지 가미된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운명론자’ 사라와 ‘개척론자’ 조나단은 어떻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운명을 만들 것인가.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운수좋은 뜻밖의 발견’이란 뜻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운명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수단을 나열한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란 옛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데서 유래한 Serendipity. 영화에선 ‘운명의 사랑을 발견하는 능력’이란 뜻으로 포장돼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집중한다. 배팅 치고는 지나치게 센 것 같은데, 5달러 지폐와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동원된다. 전화번호가 그곳에 있다. 모험심, 참 충만하다. 기민 기고, 아니면 말고, 이거나. 나는 운명과 저런 배팅 못한다.

어쨌든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치고는 가혹하지만 그건 또한 ‘영화적 운명’이다. ‘우린 운명, 곧 필연’임을 확인하기 위한. 그래서 두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뺑이를 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불일치가 ‘이끌림’을 희석시킬 수 없듯, 운명적인 사랑을 찾겠다는데 그까이꺼 대수로울 거 없다는 자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몇 년 전, 뉴욕을 찾았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가 명분이었지만, 내 욕심 중 하나는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장)에 있었다. 왜 그곳이었냐고? 조나단과 사라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손을 잡는다. 스케이트를 탄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그것을 밟고 싶었고, 결국 밟았다. 내 영어 이름은 조나단(조너~선)이다. 사라. 하긴 그 이름.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영어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얘기해줬을 때, 그녀는 우리를 '운명'이라고 했었다. 하하.;;
 


<세렌디피티>. 가슴의 ‘끌림’을 ‘운명’으로 치환하기 위한 적재적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운명론’의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된다. 여느 만남이 날줄과 씨줄의 오묘한 엮임이 아니겠느냐마는, 특별한 이끌림은 분명 있다. 이때, 감정의 동요는 좀 더 격렬하게 수반된다. 세월이 꼭 망각과 결부되지는 않는 듯하다. <세렌디피티>는 그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그렇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각자 결혼식을 앞둔 조나단과 사라, ‘한 순간’을 잊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애교’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7년이 지난 영수증을 찾아 헤매는 조나단이나 친구를 억지 대동해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사라의 애처로움. 작위적인 우연이지만, 그 끈을 연결해주고픈 애틋함을 유발한다. (허나, 케이트 베킨세일 정도의 여자라면, 어떻게든 없는 운명도 조작하고 싶다!)


우연과 운명은 다른 빛깔이 아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잘 짜인 각본의 무대에서 시간의 흐름이 상정한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각본을 미리 엿볼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둘 끼워 맞추고 “운명아! 덤벼라 내가 간다”며 큰 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도 사람살이의 재미니까. 옥동자는 외친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그러니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며 연말연시다. <세렌디피티>의 시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 시즌이라야 이 영화는 산다.
이 작위와 상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오직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니까.

참, 어쩌다 보니 남자3호가 됐다. 세렌디피티다.
무슨 말이냐고? 글쎄... 세렌디피티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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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이전, 내겐 <오세암>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그닥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 이 애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카우보이 전쟁광의 온당치 못한 침략전쟁이 일단락됐던 시기였다.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은 ‘끝’이란 단어를 쉬이 허용하지 않을 터이지만, 당면했던 전쟁의 포성은 멎었다(고 여겨졌다).

21세기에도 야만이 계속되고 있음. 그것을 증명하는 건, 언제나 전쟁이다. 명분이야 그럴듯해도, 결국엔 이권을 위한 다툼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이권과 폭력.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길지 않았다. ‘꽃보다 아름답고 픈’ 바람도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부르짖음도 공허한 메아리이자 거짓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자위할 순 있어도. 

문명의 발전이 곧 인류의 진보를 보장하거나 확언하지는 않는다. 문명이랍시고 시작돼 늘 그래왔듯, 세상은 가혹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세상을 조장하거나 혹은 세상에 공조해 왔다. TV브라운관을 통해 나타나는 전쟁이후의 혼란상을 보자니, 상반된 감정들이 파편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끝난데 대한 안도감. 그리고 오만한 카우보이 매부리코를 꺾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 혹은 아쉬움.

당시 나는 전쟁을, 파병을 반대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목소리를 냈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른 방향이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자잘한 메아리들이 희망의 지푸라기를 부여잡게 해 줬지만, ‘힘’과 ‘다수’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현실은 존재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나마 전쟁의 포화가 멎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내 마음의 야비함.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평온함을 갈망했을 뿐인 이기심.

궁금했다.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 천인공노할 무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나의 무력함.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라크 아이들의 상처입은 눈망울을 향해 눈물밖에는 짜낼 게 없는 허탈함. 분노와 슬픔은 관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구호와 시위 속에 던져졌지만, 그것은 평화와는 무관했다.

그리고 그 피흘림이 채 마르기 전에 우린 '핵'이라는 위험에 직면했다. 어디 하나 마음 편히 둘 곳 없이 불안을 품고 살아가야 할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역시나 하는 마음의 교차로는 위태로운 사람살이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줄 따름이다.

그렇듯 마음의 위무가 필요한 시기. 위태롭게 출렁이는 현실의 강 위에서 무엇이 평정심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런 힘을 가진, 차가운 금속성의 첨단 무기들이 박힌 시신경에 따스함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런 상상의 세계가 그리워지는 나날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시절을 위로하듯, 그땐 고 정채봉 동화작가의 따스한 감성을 담은 동화 《오세암》이 스크린에 부활했다. 작은 위안이나마 얻을까하고 담채화 같은 풍경을 눈에 넣었다.


영화 <오세암>은 남매의 엄마찾기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얼핏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시킨다. 맞다. 엄마를 찾아 길 떠나는 길손이와 감이의 여정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슬픔’을 동반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야하니까. 문득,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엄마아빠를 잃은 이라크의 아이들이 중첩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세암>의 동심은 ‘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소재로 그리움을 덧칠한다. 다른 이름도 아닌, 엄마니까. 다섯살배기 개구쟁이 길손이와 눈 먼 누나 감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오누이. 그들의 여정은 이미 슬픔과 신파를 동반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상황을 보자. “하늘처럼 생긴 물이 꼭 보리밭처럼 움직인다”며 바다의 모습을 길손이가 묘사하면, 누나는 귀를 통해 이를 형상화하면서 세상을 마주대한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이런 형용모순의 순간. 

그러나 뭣보다 감이는 엄마를 보는 것이 소원인 길손이에게 차마 불길에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떠돌던 오누이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설정스님을 따라 절간에서 겨울을 나기로 한다. 개구쟁이 길손이는 절간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고 악동짓을 해댄다. 그것이 결코 밉지 않다. 그 천진난만한 동심에 깃든 애틋함이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길손은 그것이 궁금하다. “자신보다 나쁜 아이들에게도 있는” 엄마가 자기에겐 없다는 것. 마음의 눈을 뜨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스님의 말에 길손이 혹하는 건 당연하다. 설정스님을 따라 길손이 암자로 들어가는 건, 눈 먼 감이가 엄마를 보고도 놓쳐버릴까 걱정이 돼서다.

문제는 거기서 또 발생한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터로 내려간 설정스님은 거친 눈보라를 만나고, 발을 헛디뎌 의식을 잃는다. 비극이 깃든다. 홀로 암자에 남은 길손. 스님을 기다리다 지쳐 관세음보살과 대화를 시작하고,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엄마를 애타게 찾던 아이는 마음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된 암자, 그래서 ‘오세암’은 탄생한다. 

<오세암>은 이렇듯 길손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았다. 굴곡도 별로 없고 클라이맥스의 극적인 구성도 없다. 다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감성을 자극하고 동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을 건드릴 뿐이다.

느린 구성과 듬성듬성 드러나는 어색한 신들은 관객의 감정폭을 극대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할 것을 권유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불교적 해탈이나 기적에 대해 쉽게 동화하기 어렵다. 길손의 바람이 이뤄졌다는 기쁨보다, 마무리가 느닷없이 빠르게 치달음으로써 관객들에게 감정의 파고를 조정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라는 <섬집아기>의 선율이 가슴속에 몽클하게 접근하고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같은 스크린 속 빛깔이 미덕이 될 순 있지만, 이것이 완성도를 보장해 주진 않는다. 한국형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지만, 일본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길을 돌리기엔 힘이 부친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일정 간격의 틈을 둔 <오세암>은, 다만 꽃(?)같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동심을 접하고 싶을 때, 미덕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발을 빼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이미 주변부로 내몰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패권주의가 피를 튀기고 사람을 살육한다. 국가의 이기심은 현대판 흑사병과 같은 사스(SARS)가 창궐하도록 방치한다. 되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국가의 시스템이자 체제다. 실체도 없는 국익논쟁은 또 어떤가. 거기에 개인은 없다. 인간은 없다.  

서로를 불신하고 피하게끔 만드는 세상의 이기는 점점 파괴력을 키운다. 자본은 교묘하고 이권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것들은 정감 있고 따스한 세상에 대한 기대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유도한다. 무력함을 심어주는 가장 극악한 방법. 주변에서 힘을 북돋아주기보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서 타인을 짓밟고 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더 많은 현실. 영화는 동심은 과연 탈출구가 될까.

정말, 마음을 다해 원하면 세상의 평화가 올까? 지금의 인류에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고 정채봉 작가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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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 안도현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관계》 중에서 -


우리, 관계 맺을까?
‘나’, 하나만 덜렁 있다면, 관계는 없다. 그래, ‘너’, 좋다. 나와 너가 합쳐서, 함께 하면 ‘우리’가 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기본. 즉, 관계 맺기는 원맨밴드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 사물, 그 누군가가 됐건, 무엇이 됐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가진 무언가들 사이, 관계가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연과 사람 등 모든 자연지물 사이에 나타나는 일종의 의식. 그것이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가슴 한 구석을 텅 비워야만 살 수 있는 이 역겹고 험한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관계 맺기 아닐까. 그럼에도 세상은 부인할 수 없이, 관계 맺기의 연속이다. 하다 못해 이글을 읽는 당신과 나도, 독자와 필자라는 ‘관계’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린 ‘관계인’이고.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이 어찌 그냥 두고 넘기겠는가 말이다.
 
생각해 봤다. 웃고 울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며, 홀가분하고 참담한, 사랑하고 무관심한, 세상 모든 감정과 우리가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일이 힘들기보다 인간 관계 때문이라지 않나. 아무렴.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알려줘야 할 것은, 국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관계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사랑, 우정, 미움 등의 모든 관계가 세분화될 수도 있겠다.


왕따에서 행복 전도사로 

그땐 좀 그런 게 어려웠다. 학교는 물론이요,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도 있고,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다. 직장에서 동료라곤 하지만, 이거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니, 어떤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조건 옳았다고 내세울 건 아니지만, 그 관계들, 참 어려웠다. 나를 비롯해 다들 지가 잘났다고 고집하는데, 스파크가 튀고 마찰이 생겼다. 여자친구와의 관계 역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맺기의 꼬임.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럴 때, 세상 속에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그 때,  아멜리를 만났다. 《아멜리에》. 와우, 보면서 놀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관계 맺기의 명수였다. 그것도 ‘행복 바이러스’를 세상에 별빛처럼 뿌리는 행복 전도사.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관계 맺기의 달인이었던 건 아니다. 아빠의 오해가 낳은 심장병 때문에, 그녀는 외롭게 자랐다. 관계 맺기가 심장에 줄 충격을 염려해, 제대로 관계 맺기를 못했다. 그런 아멜리가 변신하는 것은, 관계 맺기의 달인으로 바뀌는 것은 극적인 이야기를 품는 것으로 처리됐다.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상자의 구슬, 플라스틱 군인, 빛바랜 사진 따위가 아멜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와 닿지도 않고,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할 따름이다. 말과 글의 한계다.

하여튼, 낡은 상자는, 절망을 담았던 판도라의 상자와 다르다. 그 상자와의 만남은 행복을 나눠주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상자만 아니었다면 아멜리는 아마도, 흐지부지, 지리멸렬, 엄벙덤벙에 불과한 소녀이자 여자였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순간, 그녀는 그 어렵다는 관계와 무척 친해진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던 관계도 초강력 오공본드처럼 척척 그리고 단단하게 붙여줄 수도 있고, 관계를 행복하게 만든다. 혹시 그녀는 초강력 슈퍼접착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와중에서도 아멜리의 능력은 신통방통이다. 

신경과학자들이 그랬다. 인간의 마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천체물리학도, 뇌수술도 아닌,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견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곧, 관계 맺기의 핵심이 아닐까. 
아멜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아멜리, 이 깨물어주고 싶은 깜찍녀

변신에 이어 아멜리가 꾸미는 음모는, 앙증맞고 깜찍하다. 종횡무진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폐쇄적이 된 아빠를 위해, 친구에게 부탁해 세계 각지에 아빠의 인형 사진을 놓고 찍는다. 그렇게 아빠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아래층 아줌마를 위해 남편의 편지인양 가짜 편지를 보내고, 50년 전 추억의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담배 가게 아가씨와 그 주변을 맴도는 총각을 연결해주고, 착한 야채가게 청년을 구박하는 주인아저씨를 혼내주고... 굳이 정의를 위해 나서진 않더라도 상관 없다.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아멜리가 원더우먼이다.

아멜리의 관계 맺기는 환상적이다. 그녀가 맺는 관계 속에, 행복의 꽃이 가득 피어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바이러스를 팍팍 뿌려대는데, 왜 부메랑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니노와 눈 맞은 아멜리. 달콤한 미소를 지닌 정체불명의 그 남자, 니노. 행복은 이제 아멜리 차례다.

아멜리의 심장은 주책없이 방망이질을 해대고 사랑은 찬연한 불빛을 뿜어댄다. 모든 관계 속에서도 제일은 ‘사랑’ 아니겠는가. 아! 두근두근 콩콩!! 국보자매의 노래, '두근두근'이 아니라도, 심장이 뛴다. 독고진(<최고의 사랑>)이라도 그럴 것이다.  

행복 포자의 생명력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엉뚱한 행동이 결합된 아멜리의 행복 포자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가 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삶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수고롭고 짐진 자에게 행복을. 그것이 바로 아멜리식 관계 맺기의 정수가 아닐까?

아멜리는 자신을 위해 산다. 행복을 주는 것이 기쁘다. 단지 그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녀는 바이러스를 살포한다. 아멜리가 있어 모든 무생물들도 금방 숨 쉬고 뛰어다닐 것처럼 생명력을 가진다.

아, 내가 행복해야 하는 구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돌아볼 수도 있고,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할 수 있구나.

아멜리를 찾습니다, 혹은 내 자신이 아멜리?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을 통해 고래처럼 숨 쉰다. 아멜리가 꿰어 맞추는 관계의 앙상블은, 이 동정 없는 세상에는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가깝게 평택의 쌍용차도 그랬고, 지금 부산의 한진중공업이 그렇다. 그 속엔 관계라곤 찾아볼 수 없다. 특히나 있는 자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관계 맺기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세상.  

그래서였을까. 아멜리가 펼쳐놓는 판타지에 한없이 중독되고 싶다. 기실 동화적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그 도저한 선한의지의 전염성에는 마찰 계수를 계산하고 싶지 않다.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이 일갈한 자신의 삶에 대한 규정을 관계 속에서도 대입해보고픈 욕심이 생긴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덕분일까. “당신 없는 오늘의 삶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이라는 관계망의 형성에 나는 마음을 뺏기고야 만다. 헤어짐이 잦은 세대, 그냥 가벼운 눈웃음만으로 충분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했지만. 안도현 시인은, 이 세상 어른들은 ‘눈사람을 만들 줄 모르는, 단지 눈사람을 발로 찰 줄만 아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지만.

묻고 싶은 거지.
 
관계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관계 덕분에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아, 현실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딨니? 아멜리...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좋은 관계는 삶을 재밌고, 풍요로우며 흥미롭게 만든다. 뭣보다 살아갈 용기와 열정을 제공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좋은 관계란 그런 것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좋은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참, 직장에서의 관계 맺기는 어떻게 됐냐고? 아멜리가 돼서 직장의 화목한 웃음을 책임졌냐고? 아니. 그런 마찰적 관계 맺기에 내 마음을 더 이상 썩어 문드러지게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 나갔지. 내 진짜 마음을 감춘 채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건, 더 나쁘다는 걸 아멜리가 알려줬거든. 그러니, 안녕. 

다만, 함께 본 여자친구에겐 더 깊고 너른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됐었지. 그녀를 나는 '아멜리'로 불렀고, 그녀는 아멜리처럼 내게 행복포자가 됐다. 물론, 과거형이지만. ^^; 그래도 행복했다, 아멜리. 고맙다, 아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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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했다. 딱 하룻밤. 원나잇만 같이 보내자고. 격정적이고 격렬하며 가슴 뛸 일이니, 원나잇, 원나잇만!

뭐, 원나잇스탠드? 유후~ 앙큼하게 그런 상상을. *^.~* 최근 팡 터졌던 일화도 떠오른다. 한 어른이 중딩에게 물었다. 호텔에서 파는 게 뭘까요? 중딩 왈, "하룻밤이요." 아, 이 스스럼 없는 직설의 향연. 물론 그것은 원나잇스탠드 아닌 액면 그대로의 것일 게다. 나는 그 중딩의 답변을 전해듣곤 팡 터졌었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찌들만큼 찌든 수컷남자인 나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까? 도 궁금했다.

그런데, 원나잇을 간절히 원하는 이 남자의 애원은 아들을 향한 것이다. 최악의 아빠였으나, 이번만큼은 잘해보고 싶다는 아빠. 자신이 양육할 수 없는 아들, 부자 이모와 이모부가 양육권을 지닌 아들과 어쩌면 생애 최고로 짜릿한 원나잇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철덩어리 '아톰(ATOM)'과 함께.

<리얼 스틸>. 사과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전직복서 찰리 켄튼(휴 잭맨)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팔리기까지 한 아들 맥스 켄튼(다코다 고요)의 엎치락뒤치락 감동작렬 부자(父子)드라마! 라고 규정하고 싶진 않다. 

나는 마냥 부자의 이야기로만 보질 못했다. 둘은 그냥 한대의 고철로봇을 공유한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했으니까. 

찰리는 끝내 챔피언엔 오르지 못했으나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던 전직 복서다. 말하자면, 심심한 챔피언보다 버라이어티한 도전자. 지루한 챔피언 벨트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전을 했던 복서. 

뭐, 때로 인생은 그런 것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지루하게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다가 권태에 빠지느니, 반짝하는 순간을 지니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허나, 그 순간만 움켜쥐고선, "내가 왕년에~" "나도 해봐서 아는데~" 따위만 읊는 것도 참 비루하고 너절한 짓이다. 찰리는 그렇진 않으나 좀 궁색하긴 하다. 은퇴한 뒤 로봇복싱으로 근근히 먹고사는데, 신통치 않다. 시합은 번번이 지고, 돈은 없으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표현할 줄 모르는 먹통이다.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인생. 99%다.

파트너이자 아들인 맥스의 등장이 그를 달라지게 한다. 그렇다고, 없는 아들이 갑자기 생겼다고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이를 앙 다무는 건 아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건, 사소하고 작은 승리에서 비롯된다. 번번이 실패만 하던 그에게 이 사소한 성공은 다르다.

고철더미에서 건진 로봇, 아톰의 처지는 찰리와 다르지 않다. 폐기처분된 것이나 다름없던 아톰에게 파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건, 맥스다. 어리지만, 훌륭한 사업파트너. 로봇과 교감할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어찌 욕하리오. 그런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자라면. 

그리고 <리얼 스틸>은 익히 예정된 수순을 따른다. 고철 로봇파이터의 승승장구. 비루하고 궁색하던 찰리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는가. 맥스의 천진난만함과 우격다짐은 최강 로봇파이터 제우스와의 경기를 성사시킨다. 

생각해보라. 폐기직전의 고철과 세상 모든 첨단(돈)으로 무장한(쳐바른) 명품의 대결. 자, 누구 편을 들겠는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겠는가. 승패? 물론, 중요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만큼 99%의 우리를 옥죄는 것이 있으랴. 그런데도, <리얼 스틸>은 그것을 뛰어넘었던 <록키>를 뒤따른다. 모방한다.
 

따지고 보면, <리얼 스틸>은 인생 역전을 꿈꾸는 비루한 자들의 환상이다. 고철더미에서 꽃 피기, 개천에서 용 나기, 그로기 상태에서 카운터블로를 날려 역전하기. 인생 한 방을 바라는 99%의 통쾌한 역전극. 일종의 마약이다. 남들 못해도 너라면 (죽어라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살살 꼬드겨 불구덩이로 볏짚 짊어지고 뛰어들게 만드는.

심지어 이 영화, 보수적이다. 실패한 복서 찰리와 버려진 아들 맥스, 고철덩어리 아톰이 뭉친 오합지졸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최첨단 기술로 로봇복싱계를 주름잡는 제우스(와 기업체)를 상대로 '사실상' 승리한 이야기. 그러니, 번번이 실패하는 니들도 (우리가 던져주는) 희망을 가져!, 라고 말한다.  

뭣보다 거슬리는 건, 아시아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은연 중에 주입한다. 제우스(와 기업체) 뒤에 있는,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해 물리쳐야 할 상대(적)로 묘사한 인물들이 아시아계(인도, 일본)다. 과장된 몸짓과 서툰 영어를 구사하고, 악의 섞인 표정과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백인 부자의 기적을 위해 아시아인을 악인 비슷하게 상정한다. (맞아, 이 영화는 디즈니가 만들었지!)

그렇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나는 그 고철덩어리 아톰(과 찰리)에게 그만, 우리 99%의 모습을 투영하고야 말았다. 쓰러질 때마다 나는 "Wake up(일어나)"을 외쳤고, 레프트 라이트 어퍼컷, 외치는 프로모터가 됐다. 아톰이 다른 로봇을 제압하거나 제우스가 삐걱거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리얼 스틸>은 99%가 1%를 점령하는 내용의 영화다, 라고 하면 새빨간 거잣말이다. 이 영화를 그리 보는 건 오독이다. 그럼에도 왠지 오독하고 싶었다. 이 미친 시대를 정면돌파하기 위해선, 그런 오독의 낭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톰이 어퍼컷을 날릴 때, 찰리가 셰도우 복싱으로 복서의 본능을 되찾을 때, 속이 다 시원했다.

두 사업파트너의 짜릿한 원나잇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맥스는 수영장도 있고, 스파도 있는 안락한 부자 이모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찰리는 좀 더 의기양양해져서 인민의 챔피언(People's Champion) 아톰을 데리고 로봇복싱쇼를 전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민을 위해서!

(영화의 번역은, 'People's Champion'을 '시민의 챔피언'으로 하고 있었는데, 글쎄 좀 불만이다. people을 인민 혹은 민중으로 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흠...)  

허나, 그러면 어떤가. 그들에겐 그토록 짜릿한 원나잇이 있었는데. 그 한순간으로도 생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게 때론 인생이다. 혹은, 이런 것?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하기 위해 1200마일을 달려가는 것. 찰리가 베일리(에반젤린 릴리)에게 그랬다!!! 베일리가 물었다. 키스하려고 1200마일을 달려온 거야? 찰리 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쉬파, 이 오글거림 돋는 대사, 휴 잭맨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이 자가 하니까 오글거림 없이 그냥 깔맞춤이다. 잘 나고 볼 일이군, 된장. 센스, 그냥 돋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이인지 아닌지, 다소 헷갈렸던 두 사람의 관계. 이 짧은 장면과 대사로 내겐 모든 것이 정리됐다. 두 사람의 애정이 얼마나 단단한지 엿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 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할 법한 인생. (이정도 여자라면, 나도 그런다, 뭐!!!)

그리고 떠올랐던 한 순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워싱턴 시애틀로 내달렸던 그때 그 순간... 그때의 나도 1200마일 정도는 내달린 건 아닐까.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툭 던졌다. 복싱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쎄, 마냥 자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이토록 가슴을 끓게 하는 복싱, 과거에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있으리라 믿고 싶어졌다. 슈거 레이 레너드가 이 영화의 복싱 슈퍼바이저를 했단다.

마지막으로 휴 잭맨, 이 남자.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믿고 말 이 남자의 얼굴. 멋지다, 이 남자. 울버린은 잊어도 좋다. 이 남자, 이젠 찰리 켄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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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의 근간은 폭력이다.

자, 스크린을 지켜보자. 주먹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자른다. 칼로 얼굴을 긋는다. 치과용 드릴로 입 안을 휘젓는다. 젓가락으로 귀를 쑤신다. 몸에 칼을 넣는다. 총을 쏜다. 좀 더 나가볼까?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길가의 기둥에 줄을 매달아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상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이보다 더한 폭력(의 기술)이 난무하니까.

악(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저건 조직폭력배(갱, 야쿠자)의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믿고 싶을 수도 있겠다. 지금-여기를 보라. 가카의 통치 아래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하냔 말이다. 뭔 일이 터지든, 가카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광화문에 산성을 쌓고, 용산에 불을 지르며, 쌍용차나 부산 영도(한진중공업)에 경찰폭력배들을 투입하는 일 따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 하실 일이 아니다.


강력한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있다. 조직폭력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군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어디든, 겉으론 그렇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 행위만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런 곳엔 '의리'가 있지 않냐고? 왜 이러시나. 그건 이미 박물관에 박제된 유적이다. 의리 대신 탐욕과 배신, 협박이 난무한다. 이권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악을 때론 혹은 수시로 추동한다.

김훈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이권'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아니, 지금은 이권 때문에 악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국가마저도 '국익'으로 포장한 '이권'에 몰두하는 세상.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놈들은 더 많은 이권을 삼키지 못해 안달이다.  

장담컨대, 지금 세상에 순수한 악이나 온전한 폭력은 거의 없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혹은 선언한다. 악의 순정한 결정체로서, 마초적 폭력의 완성체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여느 갱스터 영화와 다르다. 멋있게 죽는 법이 없다. 하나같이 동정 없이 죽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엔 냉혹함만 흐른다.


참, 많이도 죽는다.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임과 죽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건조하다. 더구나 죽임과 죽음 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협박을 밥 먹듯 하고 폭력은 몸에 배인 행위다. 배신은 일상다반사다. 이권을 향한 생존본능만 번뜩이는 수컷들 앞에 다른 명분이나 정서의 흔들림은 사치다. 

그 모든 것은 이권 때문이다. 서열 파괴, 의리 박멸, 양심 증발, 모두가 이권이 추동한다.
     

<아웃레이지>의 원제(일본)는 ‘全員惡人(전원악인)’이란다. 글쎄, 순정한 악인조차 될 수없는 이들에게 그런 타이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그저 장삼이사 아닌가?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서적으로 피폐한 건가?


모르겠다. 일상에서 나는 늘 폭력(물리적이진 않아도)을 목격하고, 협잡을 목도한다. 분칠한 협박은 표백제를 뒤집어 쓸 정도고, 악의 평범성은 이제 식상하다. 나라고 거기서 자유롭진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여전하면서도 더 촘촘하고 냉정한 유머를 발산한다.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권을 향한 대물림. 사람이 바뀔 뿐, 세상의 근간은 뿌리 깊다.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 우리는 이권과 폭력과 악을 패션처럼 입고 있다. 

<아웃레이지>의 폭력이 잔인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영화가 폭력을 전시했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잔인했다. 세상의 잔인함을 스크린을 통해 새삼 확인해서. 내가 너무, 이권에 예민하고 폭력이 일상화됐으며, 악을 내면화한 인간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글러먹었다. 된장. 조심해라. Outrage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해치진 않아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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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시작된다!

2001년이었다. 그 유명했던 해리 포터는 시작을 그렇게 알렸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땐 20대였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잉이었던듯도 싶다. 일도 그랬고, 술도 그랬으며, 사랑도 그랬다. 쿨한 척했으나, '척'이었다. (불완전연소가 되고 말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때.

해리 포터의 시작, 그녀와 함께였다.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녀였다. 지금은 없어진 정동 스타식스 였던 것 같다. 그녀와 나, 우리 한 쌍의 바퀴벌레 머글은 마법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서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가 가장 놀라웠다. 우리, 머글인 것이 안타까웠을정도? 

또한 심술궂은 이모 부부와 못된 사촌, 그 머글들에게 구박 받는 해리 포터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런 그에게 날아온 마법세계의 초대장. 더구나 그는 마법세계를 구원할 전설적인 영웅이라니. 응원했다. 해리, 널 응원해. 우리가!
 
꺄르르르르, 10년 전 그 사랑과 나는 그렇게 마법행 특급열차를 탔다. 마법의 세계에 몰래 훔쳐탄 머글들은 당최 앞을 내다볼 재간이 없다. 머글에겐 마법의 기운이 없으니까.

그 마법세계는 해리 포터(와 그의 친구들인 헤르미온느와 론)에게 롤러코스터였을 뿐 아니라, 내게도 그랬다. 살짝 좌충우돌, 생은 다이내믹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작고 사소하게 성공하는 대부분 청춘의 시간에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청춘은 어쩌면 마법의 연속이니까. 

음울한 다락방을 빠져나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타고 마법의 세계에 도달한 해리 포터를 만나는 머글의 마술기행은 계속 됐다. 다만 함께 그것을 즐기는 상대가 바뀌거나 혼자였다. 

시리즈는 흘렀고, 지날수록 희한했다. 마법세계와 현실은 왜 그리 닮은 거야! 그러다 결국 소리쳤다. 이게 뭬야! 우리 사는 곳이 마법세계인 거야, 마법세계가 너무 현실화 된 거야?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것도 점차 풀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해리 포터가 친구들과 함께 마법세계를 지키기 위해 펼치는 모험과 분투는, 우리의 것을 닮았다.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 주변의 가족, 친구들과 소소하게 나누는 이야기와 작당. 마법세계는 머글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악은 번번이 이기고, 해리는 소심하게 헐떡거리며 똥침을 찌른다. 그래도 좋아!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7편 시리즈를 끝내는 10년의 내달림. 한마디로, 뭉클하고 멋지다. 뜨거운 안녕이었다. 거의 마지막 개봉 극장의 마지막 편에서 만난 해리 포터. 


볼드모트와 마지막 대전에 다다른 해리 포터의 결사항전은 스펙터클로 가득했고, 롤러코스터처럼 박진감이 넘쳤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장에 박힌 것은 스네이프였다. 해리 포터보다 더. 10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뺏아간 신 스틸러. 심장이 터질 뻔했다. 그 미친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스네이프의 아픈 과거와 사랑,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 압축은 10년을 모두 집어삼켰다. 재배열시켰다. 해리 엄마인 릴리에게서 파생된 해리와의 관계 또한.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겼다.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랑이 아프고 또 아팠다. 물론 스네이프는 그 아픈 사랑 때문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버텼을지도 모르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과 끝.

해리 포터의 영원한 선생님, 덤블도어도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금지된 숲속에서 만난 해리에게 이런 말을 던진 것, 아닐까.   

"해리, 죽은 자들을 비통하게 여기지 마라(Do not grieve to the dead, Harry). 산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렴(grieve to living). 그 중에서도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거라(And above all.. all those who live without love)."

이런 뜨거운 안녕이라니. 눈물은 주룩주룩, 심장은 벌렁벌렁. 아쉬운 점이라면, 이 마지막을 함께 한 여자는 그런 날 이해 못했다. <해리 포터>시리즈를 처음 봤는데, 그것이 하필 뜨거운 안녕을 고하는 마지막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녀의 10년에는 '해리 포터'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문득 궁금했다. 10년 전 나와 해리 포터의 처음을 보고 꺄르르르르했던 그녀는 마지막을 봤을까. 혹은 해리 포터의 성장 과정에 함께 한 다른 그녀들은? 

사랑이 지나가면, 훌쩍 중년의 어른이 된 해리가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 다시 나타난다. 지니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탈 요량이다. 론과 헤르미온느도 맺어졌는지, 그들의 아이도 함께다. 마법세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아이에까지 관심을 두기에 나라는 머글은 글러먹었다. 

장영엽 씨네21 기자의 말따마다, 가짜가 아닌 한 시절이 끝났으므로.  
"소년 마법사는 조앤 롤링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지만 영화 현장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세명의 소년소녀와 시리즈와 함께 ‘성장한’ 팬들은 가짜가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모두의 한 시절이다." 

한 시절을 끝낸 머글은, 이제 어떤 한 시절을 맞이할까. 아니 맞이하고 있구나.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만,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매조지한다.

마법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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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만난, 9.11(의 상처 혹은 트라우마)
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내 이름은 칸>이었다. 무슬림계 인도인 칸이 미국에서 겪어야 하는 생의 균열. 


"나는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칸이 그 말을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야 할 이유는 절실하고 절박하다. 무슬림을 향한 무조건적인 공격성과 배타성, 편견의 심화. 칸은 희생자다. 희생자를 만드는 이유는 하나다. 9.11. 미국인들의 심장에 박힌 테러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물론 그 테러는 무슬림과 상관이 없다. 편견이라고 했잖나.

9.11이 꾸준히 삶에 틈입한다. 그건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영화를 통해서도 9.11은 그 자장이 퍼진다. 직접적으로도 다루고(<화씨 911>,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내 이름은 칸>처럼 간접적으로도 다룬다.

간접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어줍잖은 분류다.
9.11의 자장에서 직간접적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9.11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더 참혹하다 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누구할 것 없이 이미 상처 입고, 고통에 짓눌리고 있다. 9.11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것을 잘 모르고 간과할 뿐이다.  

<레인 오버 미>는 쓸쓸했다.

2007년 9월, 9.11 6주기 즈음 개봉했던 이 영화를 본 곳은, 지금은 없어진, 당시 압구정의 스폰지하우스(구. 시어터 2.0)였다. 작은 극장에 관객은 많지 않았고, 홀로 찾아든 극장은 왠지 숙연했다. 9.11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미디 배우로만 각인된 애덤 샌들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9.11이 한 사람의 삶을, 한 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가슴을 서서히 파고든다.

찰리 파인먼(애덤 샌들러)에겐 단 하루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생의 균열은 대개의 경우 그러하듯, 순식간에 다가온다. 수많은 '만약'을 잉태하면서 말이다. 찰리에게도 다르지 않아서, 2001년 9월11일은 생의 모든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내와 세 딸을 잃은 남자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찰리에게 과거는 악몽이고, 그 기억은 그의 현재와 영혼을 잠식했다. 그 상흔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는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대학시절 룸메이트이자 치과의사 앨런(돈 치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찰리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닫고 살아가는 자폐증 환자나 다름없다. 생의 감각을 열었다간 그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신 앞에 닥친 슬픔은 감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이를 감당하나.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다.

일상이 늘 슬픔에 잠겨있지 않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슬픔 앞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한없이 침잠한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불쑥 미워져서 세상에 한 대 아구를 날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아프고 슬픈데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 무언가.

그런데 한 쪽에서는 네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게 뭐지?

네가 왜 이렇게 아프고 슬픈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아니? 그렇게도 묻는다.  

<레인 오버 미>의 찰리가 자신을 철저하게 닫았다면, 
앨런은 타인의 시선에 포박된 삶을 살았던 경우다. 이른바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것 없고, 버젓한 삶이었는지 몰라도, 그건 순전히 타인의 시선에 복무하는 삶이었다. 그가 갑갑함을 느끼고, 진짜 자유를 맛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 그래서 당연하다. 

그런 앨런에게 자기 탐구의 길을 열어주는 존재가 찰리다. 
세상에 문을 닫은 찰리에게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존재가 앨런이다.
 


세상엔 같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해도, 서로를 할퀴거나 튕겨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내를 잃은 찰리와 딸을 잃은 장인·장모가 그렇다. 상처의 골이 한없이 깊어서일까. 함께 보듬고 안아도 부족할 마당에 각자의 상처를 후벼파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그것이 한길 마음속 알 수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보듬는 게 얼마나 힘든가. 더구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슬픔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때, 대단한 리액션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찰리와 앨런이 서로에게 건네는 것은 눈물겨운 위로나 포옹이 아니다. 일상을 함께 호흡하면서 견디고 버티자고 건네는, 고요한 사투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을까. 
누구나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참혹한 세상에서. 그래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찰리와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나를 지배해달라'는 액면가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아마, 내 곁에 있어 줘, 정도가 좋겠다.
앨런이 찰리를 감싸고 도움을 주는 것 같은 관계는 액면이나, 오독이다.
앨런과 찰리는 서로에게 삼투한다. 충돌과 마찰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곁에 머문다. 앨런은 고요한 사투를 통해 찰리의 슬픔에 비로소 접근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포박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되찾는다. 그가 일방적인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슬픔앞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지금이 그렇다. 과거의 슬픔(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슬픔의 폭과 깊이가 같지도 않고, 겪어도 겪어도 그건 익숙해지지 않는 무엇이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보다 자아탐구가 필요하구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리 말했단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룸메이트였던 찰리나 앨런이 다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소울에이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융의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성장했을 것이다. 슬픔을 한 순간에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딱지가 생기기 마련 아닐까.

모두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9.11이 알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10주기가 된 9.11. 얼마나 많은 일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라.
9.11은 그런 당신의 10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가위면서도 9.11이 겹치는 시간. 묘한 순간이다.

레인 오버 미. 지금 내게 필요한 자아탐구의 시간이다. 당신도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다. Reign ov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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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딱 그 꼴이다. 2004년 대통령 탄핵안을 들고 나왔던 패거리들의 동어반복. 숫자만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국회의 패거리주의는, 몰래하고 싶었으나 뽀록난 동료 사랑이다. 공공연하게 성희롱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강)용석이를 국회의원에서 잘라내자는 안건이 부결됐다. 국회에서!

눈물 나는 동료사랑이다. 재적 의원 297명 중 198명의 찬성표만 얻으면 용석이의 주리를 틀 수 있었다. 제명이 됐어요~ 이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찬성은 111표였다. 반대는 무려 134표. 미친 게지. 이놈들, 더 이율배반적인 건, 앞서의 행동이 결국 가식이었음을 드러낸 거다. 그 주둥이 서식지인 한나라당은 이미 용석이가 당원조차 될 수 없다며 출당을 결의했고, 국회 윤리위원회는 제명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애틋한(?) 동료 사랑이다.


그러니 세간에 떠도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
"강용석은 여대생을 성희롱하고 국회는 국민을 성추행했다."

띠바, 졸지에 성추행 당한 거다. '용석이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용사모)'에 의해.
이런 식으로 또 당하게 될지 몰랐다. 134명의 패거리에 의한 집단 성추행이라니.

민의 운운할 수가 없다. 용석이의 나불댐이 결국 나의 일인양, 덮어주고 감싸안는 폼이라니.
'침묵하고 있는 다수 혹은 소수의 목소리'임을 자임하는 (김)형오의 내리사랑에 그저, 저놈들의 주둥이는 희롱을 일삼지 않으면 가시가 돋나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애정남(<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매한 것을 해주는 자)에게 물어보자.
패거리들, 언제 제명하면 될까?
애정남이 정리합니다잉~
2012년 4월! (총선이다잉~)
좀 남았긴 해도, 이때 싹 쓸어버립니다잉~ 제명해버립니다잉~

예전 2004년의 193부대원들,
정리해 놓고 역시 똑같은 엇비슷한 놈들이 들어선 기억이 있긴 해도,
정리할 거, 쓸어버릴 거, 제명해 버려야할 것들,
김영희씨 말처럼 "제명이 됐어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안)철수 사용도 잘 하고, (박)원순 활용도 잘 해서,
이젠 성추행 그만 당하고 싶으다. 똥꼬가 다 아프다. 된장.

2011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패거리주의의 창궐은,
2004년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은 터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 패거리들도 믿지 마세요.


지랄을 벗 삼고 있는 193부대원들

시절이 하수상타. 시국이 시국이고 정국이 정국이다. 평소에도 전혀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고 지 멋대로들 의회권력을 휘두르던 작자들이 개차반과도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일명 ‘193부대원들’. ‘대통령 목 따러 왔시다’를 외치는 이 작자들은 ‘(국민)실망도’ 훈련만 잔뜩 받은 주제에 ‘하야해라’를 외치고 다닌다(실망도에서 훈련이 너무 잘 된 탓일까).

그런데 만행을 저지르고 보니 시민들의 역습이 만만치 않다. 딴에는 ‘국민 나부랭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의외로 반발이 거센 것이다. ‘여론 조작’이니 ‘편파 보도’니 (자신들이 보기에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수세(!)를 설명하기 위해 치졸한 이유를 갖다대고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다.

저잣거리의 모리배들도 쓰기 민망할 수준의 정치적 행위를 국회에서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 그들의 광분을 설명할 길은 당최 없다. 쪽수 많다고 밀어붙이면 당연히 될 거라는 단세포적인 발상을 그대로 밀어붙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치적인 태생의 근본이 서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두 정당이 짝짜꿍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정치꾼들의 모략이야 어느 나라 정치판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건 전 세계의 웃음꺼리로까지 전락하면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데에야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나. 시민사회의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런 대대적인 대국민 이벤트를 만들어주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그들의 광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때다. 한마디로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쳤어야 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사기를 쳐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국회로 들여보내기엔 미숙아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판명됐다. 딴나라의 정당 같은 거대야당의 대변인으로 잽싸게 변신한 한 비열한 비유나 독설의 대명사, 또라이 한 여성 대변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에 넣어 배양을 더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자고로 정치인들은 사기를 제대로 쳐야만 한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4년 생명을 연장시키고 말고를 결정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에 맞는 표정 연기부터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어휘 구사와 의사 전달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구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진심 같은 게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김하늘이 가르쳐주는 ‘사기술’의 핵심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거대 사기를 꿈꾸는 193명의 모리배들이 벤치 마크할 대상은 바로 영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에 아무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봤다면 그런 무지몽매한 작당모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뻔뻔하고 새디스틱한 드라마에 국민들을 빠져들게 만들려면 그 정도로 해선 안 된다.


막 출옥한 사기꾼 구라걸, 그녀(주영주)가 구가한 ‘술수’는 가히 물이 올라있다. 관객들은 그녀의 사기를 빤히 알면서도 제목처럼 속아 넘어가주는 ‘관용’을 베푼다. 희철(강동원)이 제 아무리 집안 식구들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부르짖어도 희철은 파렴치한이나 망나니로 몰릴 뿐이다. 그만큼 그녀의 사기술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지금 그 ‘반국민’ 기치를 든 그들의 작태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기죄’로 복역 중인 영주는 언니 결혼을 맞아 절묘한 능청 연기로 가석방을 받을 정도로 ‘구라’의 귀재다. ‘지랄을 벗 삼고 있는’ 동료들의 연기를 지도하면서 그녀는 구라가 ‘천부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193부대원들의 귀감이다. 국민들을 상대로 ‘지랄을 벗 삼는’ 연기로는 당최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실망도’에서 빠져나와 사기계에서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희철처럼 국민이 순박하지만은 않다. 국민들이 청양고추를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집어넣는 ‘고추 청년’일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다. 그 사실은 국회의원들에겐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영주와 같은 천부적인 사기꾼도 한 동네는 홀라당 구라로 장악했지만 국민들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 풍선만 잔뜩 불고 있는 193부대원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구라’를 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짓말로 범벅된 그녀의 이야기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희철을 향한 그 숱한 학대와 갈굼에도 불구, 영주는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193부대원들의 이야기는 그리 만만치 않다. 국회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 만들어 놓고 놀 줄만 알았지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니 영주처럼 사랑마저 획득하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193부대원들도 열라 “우리의 충정을 믿어 달라”고 짖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기저기서 누수 현상만 드러날 뿐 역시 명분도 근거도 없는 아우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기광풍’은 분명 응징을 받아야 마땅할 뿐 아니라 언젠가 193부대원들의 공갈·협박을 그린 ‘사기의 추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국민들은 3월12일 국회에서 행한 193부대원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을 가장한 의회의 권력 남용 쿠데타는 그렇지 않아도 그 동네의 오욕에 지겨워하던 국민들에게 “짜증 다양하게 밀려오네!”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애정빙자사기극’이었던 영주의 좌충우돌은 다소 무리가 있어도 애정을 획득하게끔 마무리됐다. 그러나 ‘국민빙자사기극’을 감당하기에 193부대원의 허접함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던 희철의 몸부림은 “그녀를 사랑합니다”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를 믿어주세요”라던 193부대원들의 공허한 메아리는 “너희들을 탄핵하리라”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문명비판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디 인간사에 ‘낙원’(樂園)이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더구나 193부대원들이 활용하는 것은 악랄한 이분법 구도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 등 이분법이 유용한 때가 있으나, 193부대원들은 그것을 분할과 배제의 장치이자 선악과 우열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고 있다. 바로 친노와 반노라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구도를 들어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상대다. 21세기에도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가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낙원까지 바라는 국민은 없다. 다만 응징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국민 인식과 “우리 아니면 안 된다”라는 헛된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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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는 강용석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딴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다(내 나라는 아녔음 하는 바람도 있음!). 작년에 학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낑겨서 모이를 주워먹다가 주둥이를 나불댔나보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학생에게,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 지랄입방정을 떤 것이다. 으응? 줘? 대체 뭘 줘?

(강)용석이는 구케으원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하긴 그 지랄맞게 달콤한 그 자릴 왜 스스로 마다해? 떡하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버텼다. 그래도 가시방석이었을텐데, 똥꼬 아프지 않았는지나 모르겠다. 


짜잔, 이런 와중에 8월31일 더 웃긴 쇼가 펼쳐졌다. 용석이 제명안을 놓고 국회에서 표 대결이 펼쳐졌다. 명색이 공인인데, 주둥이 잘못 놀린 죄로 당연 처단될 줄 알았다. 어라? 재석의원 259명 중, 용석이 자르자 111표, 용석이 그냥 두자 134표, 용석이? 난 몰러! 8표로, 용석이 안 잘렸다. 씨뱅 미친 거 아냐?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나으리께서는 한 마디 더 지껄여주신다. "우리 용석이는 지성 교양 예의 갖춘 정의롭고 호감가는 반듯한 후배"란다. 참, 좋은 후배 두셨다, 그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컷들의 소아병적인 연대다.

더 좆 같은 건, 한 신문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반응이었다. "두렵다"고 했다. "사회가, 정치가 이럴 줄 정말 몰랐다.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강 의원)이 했는데, 그런 잘못이 국회에서 용인된다면 그게 정의이고 공정사회인가? 곧 사회에 나가는 우리가 거꾸로 불이익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아마, 그녀에겐 세상이 공포로 채색됐을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것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사회라니.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벌건 여름에 펼쳐지는 공포잔혹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건, 혁명이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시저의 단호한 얼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뺏아 탄 시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껌뻑 죽었다. 그것은 김혜리 기자(씨네21)의 말처럼, '지성적 위엄'이었다. 시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 우두머리였고, 나는 그의 손짓과 몸짓에 전율했다. 나는 그를 따르고 싶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그것도 할리우드의 것에서 혁명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토록 짜릿한 순간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떤 혁명이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공장이니, 그게 신기할 건 없다만, 이 영화가 주는 혁명적 쾌감의 일부는 시저의 표정과 몸짓에 빚지고 있다.


맞다. 나는 시저에 반했다. 이런 혁명적 우두머리의 등장이 그만큼 필요한 시대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과 지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시저라는 혁명적 별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대수로울 게 없다. 걸작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그러고 보니, '68'이라는 제작연도가 의미심장해 뵌다!)의 프리퀄로 기획됐다는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시저의 표정과 지성적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으로, <킹콩>에선 킹콩으로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선보인 앤디 서키스에 온전히 빚지고 있다. 다른 실제 배우들은 시저의 뛰어난 표정과 몸짓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시저 찬양 도우미라고나 할까.



시저라고 처음엔 다른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애완동물이었다. 실험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이 여느 동물원 침팬지와는 다른 지점이었고, 지성의 진화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 정도. 덕분에 시저는 점점 자라면서 지성과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수화로 얘기하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묻고 태생을 고민하는 순간의 그 눈빛부터 나는 흔들렸다. 아, 혁명은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그도 허나 야생의 힘과 본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로드만의 아버지이자 시저를 사랑해준 사람이 타인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유인원 보호감호소(우리)에 갇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의실종된 상태로 줄곧 빨간 셔츠만 입고 다니던 시저가 혁명적 단초를 찾게 된 장소다. 앞서 자신은 다른 줄 알았다. 인간과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그런 유인원으로.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부속물로서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무엇이 자신들의 적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번 깨어난다. 지성이 또 한 번 점프를 하면서 그는 현실을 깨닫는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눈빛, 나는 또 흔들렸다.

압권은 이후였다. 수화만 가능했던 시저가 우리에서 가해지는 핍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No~"라고 외친다. 그리고 일어선다. 언어와 직립보행을 획득하는 순간. 아, 자유를 만나는 순간이다. 노예임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혁명적 기운이 스크린을 감싼다. 나도 함께 외치고 싶었다. No. 어떤 영화나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No"를 만난 적이 없다. 지성과 자유가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 혁명적 쾌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급적 본능에 의해 그들의 봉기에 이입했다. 레알 혁명이 돋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시저와 그 투사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 "No"라고 말하고 일어서기. 그들은 전진한다. 우리를 뚫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의 활엽 가로수를 타고 이동하고 마침내 금문교에 도달한다. 약간 과장해서 이 금문교 장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의 2011년 여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 유인원들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전진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금문교 교각을 긴 팔로 이동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진경은 아까도 언급했던, 시저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광포하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시저가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등 리더의 다섯가지 덕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저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미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 이토록 풍부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하게 한 기술에 대한 탄성도 탄성이거니와,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연기에 아카데미건 어디건,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용석 병'을 겪은 2011년의 한국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이다. 청년이고 장노년이고 없다. 청년들은 청년대로, 장노년들은 장노년대로 절망을 품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른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어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우두머리 다운 우두머리 없이 오합지졸들만 창궐하는 시대. 나는 시저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추천한다. 지구탈출을 권하는 바다. 혁명의 시작은 시저를 옹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터다. 나는 시저를 따르겠다. 인간보다는 시저다. 일단 영화부터 보고 더 이야기하자.


아 참, 뭣보다 시저처럼 제대로 분노(분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분노하라》, p.26) 


용석이나 형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 그런 동물들에게 눌리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살아있다면 시저처럼, "No"라고 외치고, 직립보행을 해야 한다. 노예 아닌 주인의, 핍박이 아닌 자유를 찾는 길이다. 침팬지보다 못한 용석·형오 개새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레알(REAL) 혁명 돋아야 할 사소하고 소소한 이유다. 그 동물들이 우리에게 도덕적 수치심을 안겨줬으니까! 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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