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아나토미(그아) 시즌6.
지난해 11월20일 막을 내렸다.
내 일요일의 고갱이이자 종결자였다.
일요일 늦은 밤의, 월요일로 넘어가는 그 낙하하는 깊은 밤의, 낙(樂)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 때가, 절기상 '소설'이었다. 눈이 내렸고, 겨울이 왔다. 가을이 뚝하고 떨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그아 빠돌이'.
의학드라마로서도 그렇지만 사람의 이야기로서 그아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감초처럼 곳곳에서 숭숭 이어지고 어긋나는 사랑의 작대기 또한 흥미진진이고.
(뭐, 나도 동의하는데, 그아는 틈만 나면 크로스 액션 연애질하는, 사랑 이야기!)
시즌6, 다른 시즌보다 흥미나 재미에서 약간 떨어졌었는데,
피날레가 아주 폭풍이었다. 등장인물 누군가 죽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호러!
시즌7을 극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구성으로, 한방에 시즌6의 인상을 바꿨다. "모든 앎이 그렇지만, 의학이야말로 보편적인 앎이다. 생로병사에 관계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는 화폐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절대 화폐화될 수 없는 것이 의학이다. 내 병을 고쳐 주는 것을 어떻게 상품을 사고파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가늠할 수 있으랴.… 요컨대, 의료는 원칙적으로 '화폐의 외부지대'인 셈이다."(《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p.165)
나도 병원이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래서 의무(무상)의료를 지지한다만,
어쨌든 그아 시즌6에선,
화폐의 외부지대 아닌 자본주의 종속물로서의 병원의 고민도 보여줬다.
죽음 직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셰퍼드가 어떤 깨달음을 보여줄지도 궁금.
임신했다가 유산하고 만 메러디스는 심리적인 충격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크리스티나와 오웬의 트라우마 사랑과 그 사랑에 끼어든 테디는 어찌 될 것이며,
그밖에 렉시, 알렉스, 마크, 웨버, 베일리 등등에 새 인물은 어떠한 파장을 던질까.
현재 미국 abc 에선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7이 방영 중이다.
다운 받아 보지 않는 성향상, 이제나저제나 목 빼놓고 한국 방영을 대기중인데.
아, 저들의 웃는 모습을 보라. 저들의 웃음에 동참하고 싶구나.
그나마, 그아의 공백을 대타로 나와서 훌륭히 메우던, <시크릿 가든>도, 끝. 어쩌다, 지난 2년 전(<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어,
'이어 클로저(Year Closer)'가 됐던 현비니.
<만추>, 보고 싶다. 탕웨이도. 하악하악.;;
결론? 아, 그아도 시가도 없고, 으... 일요일 종결자가 필요하다! 일종, 당신을 원해요!! 훅~ 쪼옥~
아, 봄이다, 봄.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자기 살을 찢으며 꿈틀꿈틀 소생하느라 잔인함을 동반한다는 계절이지만, 싱그러움 또한 온전하게 봄의 캐릭터다. 온몸으로 봄 햇살을 흡수하면서 상큼한 노래로 귀를 간질인다면, 아, 꿈결 같은 세상. 그렇게, 지금 봄이 내린다. 좋아,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좋을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여기, 렌카(Lenka)! 누구냐고? 좋아. 이름은 처음 들어본 것 같아도 어쩌면 혹시나 들어보고 어깨를 들썩들썩해 봤을 법한 이 노래들. 미국드라마 <어글리 베티>에
삽입된 ‘The Show’. 이 노랜, 배우 고현정이
나온 고이 잠든 아기의 모습이 귀여운 모석유화학 CF에도 삽입돼 있다.
아니라면, 나의 완소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풍성하게 만든 ‘Trouble Is A Friend’ 혹은
‘Live Like You’re Dying’. 후욱, 입안에
절로 달콤한 침이 고이지 않아?
그래도
모르겠어? 좋아. 그렇다면 블로고스피어에 차고 넘치는 이런
상찬들. ‘찬란햇’은 ‘렌카, 솜사탕 같은 목소리’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딱 한번 들었을 뿐인데, 입가에서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중독성 짙은 리듬과 그녀 특유의 발랄한 보이스!··· 멍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뭔가 상큼한 자극이 절실하다면, 피곤에 지친 저녁 혹은 퇴근길, 유쾌한 기분전환을 원한다면! 렌카의 ‘Show’를 들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하늘여시’는
‘봄을 부르는 렌카의 음악’이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 ‘The Show’를 “정말 봄을 부르는 노래 같지 않나요?”라고 그 상큼함을 전달한다. 미국 미디어들의
다소 호들갑스런 상찬도 곁들이자면, “렌카의 음악은 밝고, 청명하고
흥이 난다. 친한 여자친구들끼리 모여 놀러 가는 밤에 들으면 딱 좋은 음악이다.”(저스틴) “렌카는 리스너들을 어떻게 하면 지겹지 않고 단번에 중독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오레거니언) “캐시미어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교한 편곡을 감싸 안는다. 직접 연주한 피아노, 퍼커션, 비브라폰, 철금종에서는 관현악 느낌이 가미됐던 60년대 초반의 팝 음악이 연상된다.”(스핀) 그리고
렌카(의 음악)를 만난다면,
저 상찬들에 당장,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찬성’표를 던지고 말 것이다. 내기 걸어도 좋다. 머리는 끄덕끄덕, 어깨는 들썩들썩,
입은 흥얼흥얼. 다소 오버하자면, 나는 렌카의
노래가 ‘봄날의 아기곰’ 같다. 봄날의 아기곰? 뭥미? 이런
거다.
“봄날의
들판을 내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내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 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봄날의 아기곰과 함께 뒹굴고 싶다면, 렌카의 음악을 지금 이 봄에 들어보는 것, 꽤 괜찮지. 말하자면, 슈거 팝(Sugar
Pop). 그렇다고 이가 썩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고. ‘과일향 츄잉팝 라즈베리 소녀’의 해피 바이러스가 당신과 나의 일상에도 잔잔히 묻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히피처럼
자유분방한 아우라가 온몸을 감싸고 있는(그건 아마도 히피였던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때문이리라), 어렸을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호주로 입양된
아이여서 한국을 아주 조금 알고 있는, 비빔밥을 아주 좋아한다는 렌카와 나눈 이야기 속으로, 고고씽. 그냥 ‘쇼’를 즐기는 렌카 그는 지금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첫
싱글 ‘The Show’로 단숨에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얻은 그.
그 노래에 나오는 이 구절, “Just enjoy the show(그냥 쇼를 즐기기만 하면
돼)”.자신에게 혹은 우리에게
건네는 듯한 그 말, 딱이다. 물론 바로
앞에 나오는 가사인, “I want my money back”과 결합하면 이건 좀 요즘의 상황을 은유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렌카 왈. “인생은 쇼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쇼를 조절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즐기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때론 정말 형편없는 공연을 보면 ‘내 돈 환불해줘’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 않은가. 인생도 살다 보면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데, 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크게 소리 한번 지르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꼬마전구’라는 블로거는 이런 말로 이 노래의 흥겨움을 표현한다. “극장에서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망설이다 도전한 신메뉴의
참담한 맛을 보고 나서, 그리고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에게 가서 귀에 바짝 달라붙어 불러대고 싶다. I want my money back.” 하나의
사례지만, 이런 반응들은 그가 이미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는 뜻이렷다.
라디오 에어플레이 3위권에 꾸준히 머무는 등 한국에서도 그는 이미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직비디오도 참 예쁘고, 재미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싱글은 뭘까. 역시나 흥미로운 뮤직비디오도 나올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Trouble Is A Friend’
(<그레이 아나토미> 삽입)가 될
확률이 높다. 아마 온 세상이 원하는 곳이 그 노래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웃음) 뮤직비디오도 계획하고 있다. 아마 곧 만들 것 같다. 작은 줄 인형을 이용한 내용으로 수정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들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다. 1년 전쯤에
‘viral video’ (인터넷상에서 공유를 통해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단편 동영상)가 있긴 한데, 이번에 더 많은 사진을 찍어서 제대로 된 비디오를
만들 예정이다.” 음악은 렌카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그러니까, 능력이다. 그는 어린 시절, 피어싱을 위해,
즉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접했다. 아버지가 재즈뮤지션이었지만, 그는 음악에 마음에 열지 않았다. 귀를 뚫기 위해 피아노와 트럼펫을
배우고 음악시험에서 B학점 이상을 받아야 했던 소녀.
그의
예능 기질은 되레 ‘연기’에서 발현됐다. 우연이었지만, 8살에 연기자로 데뷔했고, 명배우 ‘케이트 블란쳇’(<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임 낫 데어> 등)을 선생님으로 연기지도를 받았다. “케이트 선생님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영감이 넘치며 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제가 연기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고 처음으로 전문적인
직업을 갖게 해줬죠.”
그러니까, 당시 렌카는 음악보다는 연기였다. 물론 예능분야에 그만큼 재질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지만,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운명이라고 이름 붙여도 된다. 연기를 통해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2002년 <Somesault>라는 영화에 가수 역할과 함께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렌카. 영화음악에 참여한 호주의 유명 익스레피멘탈 록그룹인 ‘디코더 링’의 드러머 토마스 슛징거는 그에게 밴드 보컬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당시 호주의 거의 모든 영화음악상을 싹쓸이했다.
이 과정에서
렌카는 음악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기 싫어했던 소녀였건만, 음악이 다시 그에게로 왔다. 디코더 링과 한 장의 앨범을 더 만든
그는 솔로활동을 결심한다. 애초 밴드 보컬로 활동하기 전부터 품었던 열망이었고, 하고 싶은 음악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솔로활동의 새로운
둥지는 미국 LA. 그리고 2008년, 렌카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생애 첫 솔로앨범 <LENKA>를 세상에 내놨다.
브라운관에 병원이 차고 넘친다. 어쩌다 연초부터 세 드라마에 '꽂혔다'.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그레이 아나토미>. 공교롭게 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거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전의 <종합병원> <의가형제> 등의 일부 '메디컬 드라마'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갠적으로는 관심이 없어 제대로 보지도 않았더랬다. 더구나 병원만 가면 병원 특유의 우울함과 아픈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걸려 병원을 빨리 뛰쳐나오고 싶어하는 내가 어인 일로...
더구나 병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의사가 절대자로, 대부분의 환자는 그 절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절대 복종하는 신자가 돼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그렇게 절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꼭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환자 나름의 스타일이라구 해 두자). 난 이런 관계가 익숙지 않고 그닥 달갑지 않다. 그렇지 않은 의사도 간혹 있지만 대개의 의사들은 친절하다기보다 권위적이고, 환자를 향한 배려가 깊지 않다,고 느끼게 만든다.
어쨌든 그런 내가 브라운관을 통해 병원을 골똘히 보고 있다.요즘의 병원(을 무대로 한) 드라마는 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나 <하얀 거탑>이 그렇다. 어정쩡한 로맨스의 기운도, 의료사건을 중심으로 한 공방이 없다. '수술배틀'과 '선거배틀'의 긴장감도 그렇거니와, '굴욕정길'의 등장도 재밌다. 무엇보다 그곳엔 야망과 권력, 인간들의 적나라한 관계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병원은 그저 무대이자 장소일 뿐이다. 병원 아닌 다른 무대를 대입시켜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인간들이 사는 곳, 이른바 '문명화된' 인간들의 행태는 사실 엇비슷하다.
<하얀 거탑>의 무대가 되고 있는 병원은 한편으로 '사악한 존재'로 상징화된 뱀들의 소굴같다. 독성이 묻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표적이 노출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빨을 쩌억 벌리는 존재들. 뭐 권력과 야망을 향해 사정없이 덤벼드는 불나방에 비유해도 되겠다.
무엇보다 지난 주말의 이야기는 박진감 넘쳤다. 그동안 하얀 가운맨들에게 노골적인 음모와 암투가 횡행하게끔 만들었던 외과과장 투표가 있었다. 장준혁이 결국 이주완 과장의 견제를 뚫고, 노민국의 카리스마를 밀치고 과장이 됐다. 근데 그 자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 곧 물러날 과장은 왜 그렇게 자신이 미는 후임자 뽑기에 골몰하는지, 과장 안되면 개원해도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은 장준혁이 왜 그 자리에 연연하는지, 한자리 한다 싶은 의사들도 쪽 팔리는 거 무릅쓰고 앞뒤 안가리고 뇌물에, 돈봉투에, 회유와 협박을 밥 먹듯 하는 걸 보니 대단한 자리이다 싶기도 하구.
물론 사실은 내가 병원을 몰라서도 있겠지만, 모든 병원의 과장 자리라구 다 그런 것도 아닐테고, 다른 직업 혹은 직장이라고 그런 이야기들이 없겠나. 외과과장은 하나의 상징적인 자리일 뿐이겠지. 더구나 최도영 같은 양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양심을 접고 출세와 영욕을 좇기보다는 품위를 지키며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고 사는 그런 양반. 물론 세상은 두 갈래 길에서 고민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끔 요구한다. 최도영이라고 왜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얀 거탑>에서 개인적으로 심하게 거슬리는 건 -나름의 이유나 타당함은 있겠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이 쫘아악 도열해서 과장을 중심으로 철저한 위계를 보여주는 회진행렬. 복도를 매운 채 한 사람을 거탑(!)으로 위엄과 권력의 도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 그림은 그저 하품나는 인간들의 병정놀이 같다. 물론 그들에겐 너무도 진지한 전쟁이겠지만.
어쩌면 지금-여기의 많은 병원 혹은 의사들에게 생명과 윤리, 환자와의 교감과 의학을 향한 열정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마냥 그저 박제된 유물일런지도 모르겠다. 의학계 뒷편에도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음모배틀'이 횡행하는 정치적 무대가 마련돼 있다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최도영에게 마음이 쏠린다. 무릇 의사라면 그래야한다는 명분이 아니라,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의사 세계의 율법을 거부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세계에서나 전통 혹은 관습이라는 이름의 율법이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 속한 개인이 율법을 깨뜨리기란 당최 어렵다. 율법은 어떤 식으로든 개인을 억압하기 마련이고 개인적 욕망은 율법의 덫에서 부유하곤 한다. 최도영은 그런 타자의 율법에 갇히기보다 스스로 '무능한'(의술과는 무관한) 의사를 택했다. 인간적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는. 물론 그 배틀이 난무하는 세계가 그를 온전히 놓아줄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봉달희>는 어제부로 러브 모드가 새삼 부각될 분위기이긴 한데, 것과 별개로 어제 내가 찡했던 건 '좋은 의사가 돼라'는 말 한마디였다. 뇌사환자를 싣고 가던 구급차가 낭떠러지서 떨어질 위험에 처해있을 때 뇌사환자의 남편은 울 봉선생을 차밖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봉선생은 엠브(수동호흡보조장치)를 붙잡고 환자를 돌보며 나가지 않는다. 사실 무서워서 나가지 못하는 거지만. 그러면서 나중에 아내를 보낸 그 남편은 우연히 봉선생을 만나 그런 말을 건넨다. '좋은' 의사가 되라고. '착한' 의사가 되라는 그 말. 지금까지 전개내용을 보면 봉달희는 그런(좋은 혹은 착한) 의사가 될 것이다.
며칠전, 내가 좋아라하는 선배로부터 받은 메일이 떠올랐다. 그 메일엔 최근 출간된 <느리게 가는 버스>(성우제)라는 책의 일부를 다뤘다. 요즘 떠들썩한 <시사저널> 기자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씨의 동생된다는 양반이 썼다는 그 책의 부제는 '캐나다에서 바라본 세상'이다.
선배는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간 저자의 청각장애 아들이 수술받고 청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잔잔하고 감동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의술이라면 한국의 수준이 캐나다에 뒤질 것이 없다.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장애인이나 환자와 같은 약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전문가들의 마음과 태도, 바로 이것을 느끼고 배우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환자 중심 의료 시스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일하는 방식인 것이, 글쓴이가 받은 감동의 거의 모든 게 무슨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아니라 의료진과 지원 인력의 협업, 그리고 이들과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받은 것이었으므로- 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읽어야 합니다. 감동적입니다..
선배는 이어서 저자가 한국에 있을 때 저자의 아들에게 청각장애 판정을 내린 의사를 얘기하는 대목을 전했다.
...1994년 6월,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의사는 며칠 전 청력검사를 받은, 채 두 살도 먹지 않은 시경이에게 청각장애라는 판정을 내렸다. 병원의 과장이라는 그분은 "자동차 경적 소리 정도나 들을까, 그 이상은 못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너무 놀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눈물을 뿌리며 쩔쩔맸다. 그는 "방법이 없다"며 "보청기를 끼면 조금은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의사의 무표정과 무뚝뚝함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은 놀랍게도 보청기업자였다...
청각장애 판정을 수없이 내리는 의사는 여타의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보청기 기술자나 특수교육의 세계는 자기네가 지닌 전문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수준이어서 알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낮은 수준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현재 기자를 하고 있는 선배는 끝을 이렇게 맺었다. 실제 선배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학습한다. 후배가 절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끔 한다.
...고민입니다. 제가 하는 일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게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현재 한 종합병원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녀석이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보건의로 가 있는 동안 결혼할 때 내 마음을 담아 보냈던 한 편지. 의학 세계를 엿보면서 다시 떠올린 영화 속의 한 의사. 양조위가 연기한 '유문'이라는 의사. 녀석을 오랜만에 조만간 한번 봐야할 것 같다. 장준혁, 최도영, 봉달희, 안중근... 과연 어떤 의사가 돼 있을지 궁금해졌다.
C에게
여름이 익어가는군. 며칠 남지 않은 결혼 준비는 거의 마무리단계에 돌입했겠지? 의사 시험 합격에 이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온 자네의 행보에 다소 놀라기도 했다네. 지금 객지에서 보건의 생활을 하고 있는 자네의 일상도 궁금하군.
자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실로 십 수 년만의 일인 듯 싶군. 글쎄 첫 인연줄을 당긴 이후 이십 몇 년동안 자네와 편지를 교환한 기억이 그닥 없네만 이십대 어느 시절, 자네에게 편지를 날렸던 머나먼 기억이 있군.
그 놀이터, 기억나는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놀이터. 그 어린 시절 자네와 나를 연결해주던 그 놀이터는 지금 잘 있는지 모르겠군. 그 조그맣던 아이가 훌쩍 커서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청년 의사가 돼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우리 곁을 관통했나보이. 서로 가는 길도 다르고 생각의 차이도 있지만 우리는 그 ‘놀이터의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게지...
언젠가 자네가 의학도로서 길을 걷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지. 어릴 때 자네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은 삭제돼 있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자네 모습이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나보이. 비록 어릴 적 의사 앞에선 늘 ‘선생님’을 붙이며 그 권위에 눌렸던 기억 앞에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 당시 의사 친구를 뒀다는 자부심도 은근히 있었던 것 같군.
의사라 의사... 그러고 보니 자네 입을 통해 ‘그 의사가 무엇인지’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지’ ‘자네가 지닌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직업관은 어떤지’ 들어보질 못했군.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모처럼 만나면 늘 술이나 퍼마신 탓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일상에서 접했던 의사들과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만났던 의사와는 늘 괴리감이 있었던 것 같군. 자네는 과연 어디에 속하게 될까. 세월이 흐른 뒤 자네가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을 때, 자넨 여느 일상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의사 ‘선생님’일까, 아님 빛을 통해 투사되거나 책에 나왔던, 세상에 빛과 열을 전파하는 ‘의사’ 선생님일까.
10년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듯 10년을 다시 흘려보낸 후 자네의 모습을 그리기도 여의치 않군. 솔직히 말하자면 환자를 긍휼(矜恤)히 여기고 온갖 친절과 성심을 다해 사람과 병을 다스리던 허준 의원의 이야기는 책이나 브라운관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어디 그게 천민자본주의가 창궐하는 이 땅에 가능키나 한 얘기겠는가.
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그냥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마냥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겉치레로 전락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보네. 세상은 굳이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생각하’게 해 주었거든. 물론 정서적 견해에 불과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일세.
아, 괜히 사설이 길었군. 자네에게 이렇게 글을 날리는 건, 전문의도 됐겠다, 결혼도 하겠다, 친구의 앞길을 축복하고 바른 항해를 바라는 충정에서지. 연달아 나온 자네의 기쁜 소식 앞에 문득 한 영화가 스쳐가서 말이야. 어쩌면 세상에 없을 법한, 혹은 세상에 있으면 좋을 법한 그런 의사의 이야기. 오래전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포스터도 사서 방에 붙이고 웃음 짓던 기억이 나는군. 물론 자네는 이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의사를 다룬 영화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게는 『유망의생』이 가장 좋았고 인상이 깊었지. 제목은 ‘떠돌이의사’라는 뜻의 사자성어라는데 정확한 건 알 수가 없군.
영화에서 홍콩배우 양조위가 분한 유문은 특이한 의사였다네. 다른 의사들처럼 명성을 바라거나 안정적으로 살지 않는 이단아. 한 창녀촌에 진료소를 차리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면서 기타를 치는 낭만파. 그리고 고독함을 코믹함으로 치환하고 사는 사람.
그 곳은 여느 빈민가들이 그러하듯 악다귀 혹은 지지리 궁상처럼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네. 한마디로 소외받는 이들의 집합소에서 유문은 사회의 ‘인정’이나 ‘명성’따위와 담을 쌓은 채 옛사랑을 추억하며 의술을 베풀며 살아가지.
잡다하게 얽힌 그 풍경 속에서 유문의 일상은 미소와 눈물을 뒤범벅한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네. 유문을 존경하고 따르는 신출내기 의사와 시한부인생을 사는 여자의 사랑, 한 창녀와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좌충우돌 경찰관 등이 코미디를 연출하는 한편 사랑의 아픔과 헤어짐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지.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형태의 삶 속에서 유문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간다네.
의사는 신이 아니고 단지 고장난 시계를 고치는 수리공이나 신발고치는 사람과 다름없다는 소박한 그의 말.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는 몸뿐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까지 치료하고 위로하는 역할이 바로 의사란 것을 말해주는 듯 하더군.
영화 속 유문의 행보는 이를 뚜렷하게 각인시켜주지. 그는 대학시절 촉망받는 의학도였으나 우연한 의료사고를 자신이 덮어쓰는 통에 의사 자격증을 따지 못해 사창가에서 보건증이나 갱신해주는 ‘돌팔이’(?)가 되지. 반면 다른 한 친구는 전문의로 명성을 떨치고 돈을 긁어모으는 이 운명의 아이러니.
사실 이런 구도는 너무 뻔하지 않나. ‘착한’ 돌팔이 의사와 ‘나쁜’ 전도유망 의사. 어떤 과정을 겪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도 빤하지 않은가 말일세. 명성을 포기하는 대신 진정한 의술을 택한 유문과 의사로서의 재능보다 더 큰 명성을 잡기에 혈안이 된 직업인 의사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 손을 들겠는가.
그런데도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바로 인간미와 선의였다네. 선의만으로 똘똘 뭉친 듯 착하기 그지없는, 낭만이 넘치고 사랑으로 엮이는,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재미있는 것 중의 전도유망 의사는 친구의 재능을 이용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유문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도도 없었고 유문 역시 친구의 그런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네. 또한 둘 사이의 애증관계도 묘하게 얽혀있고 말일세. 유문의 사랑하는 여자가 전도유망 의사에게 시집갔고 결국은 암으로 저 멀리 떠나보내고 말았더군.
두 사람 어쩌면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네. 재능을 가진 천재와 그를 질투하고 명성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된 모략가. 그럼에도 골치 아픈 갈등구조없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이야기의 흐름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네.
한편으로는 어쩌면 영화다운 것이지. 어딜 가나 위선과 허위가 판치고 선의는 이내 씹히고 마는 것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땅덩어리,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불만이랄 것도 없지. 세상이 이미 그렇게 설계가 돼 있었는 걸 어떡하겠는가. 다만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아, 저런 것도 있구나’ 혹은 ‘저 어딘가엔 저런 모습도 있겠지’하는 희망의 빛깔을 심어주면 그만인 것을...
어쨌든 두 사람은 신경전을 계속 벌이지만 그 황야의 결투 따위 일상의 곁가지로 치부하고 유유자적하게 자신만의 스텝을 밟는 유문을 보는 건 유쾌했다네. 그 깃털같은 가벼움 속에서 자신의 철학과 선의를 전하는 그 자연스러움. 어떤 사연이 얽히고 설켰든, “의사는 살릴 수 있는 병자는 끝까지 치료해야지. 나는 자네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도우려 애썼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자 문제가 뭐지?”라는 유문의 이야기. 난 어쩌면 돌팔이에게서 ‘의사’선생님을 봤다는 생각이 들더군.
친구로서 소망한다네. 누군가 얘기했듯 환자 앞에 절대 친절하고 인간미를 보여줬음 좋겠군. 의사는 환자 앞에 서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라네. 반면 환자는 병의 상태를 떠나 절대적 불안 상태에 있기 마련이고. 자네는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만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심히 대하지 않기를...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하네.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의사되길 바라네. 극중 이런 말이 나오더군. “Be a doctor and not a medical broker.” 나 역시 이 말을 자네에게 전해주고 싶네.
2003년 6월 19일 그 놀이터를 떠올리며 친구, OO가...
나 역시 이 견고한 현실 세계의 율법과 전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타자에 의해 강요된 율법이 아닌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삶에 충실할 수 있을지. 내가 꿈꾸는 세계를 온전히 꾸려나가고, 이 격변하는 세상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작은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최도영과 봉달희를 통해 대리만족을 꾀하고자 하는 목적에 그들에게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