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다. <첨밀밀>이 그랬다. 처음으로 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는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다.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다.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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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알싸하게 차가운 날씨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까지 꼭 쓰고 싶은 책이 떠올랐다. 사랑.
매우 거대하고 넓고 깊은 주제라, 사실 난망한 것이 사실이나,
아는 만큼, 알고자 최대한 노력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혹한의 칼바람을 맞아서 화들짝 놀라서겠지. 그래도, 사랑.
너는 나고, 나는 너 자신이야, 우리는 한 사람이야.
온 삶을 걸거나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든가, 사랑.
참, 미칠듯이 매혹적인 주제다.
지금처럼 비루하고 천박하게 쓰일 단어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판타지라고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냉면
겨울의 맛은 역시 냉면.
오늘, 4대천황의 하나로 꼽히는 필동면옥이었는데,
장충동 평양면옥의 슴슴한 담백함에 비해선 아쉬운 감이 있다.
어쩌면, 누구와 함께였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평양면옥에선 사랑이 앞에 있었을 때니, 그 맛이라는 게 얼마나 감질났겠는가.
쩝, 그리 생각하자니 좀 슬프군.
계절의 맛보다, 더 진한 것이 사랑의 맛인가 보다.
아, 나는 맛칼럼 같은 건 쓰기 글렀다.


원 데이
어쩜 이리, 한 마음을 한 순간에 홀라당 빼앗는 영화포스터가 다 있는가.
포스터 하나 때문에 이 사랑을 만나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앤 헤서웨이! <브로크백 마운틴>때부터 알아봤다. 된장, 이토록 알흠답다니.
Twenty years, Two people... 내용이야 어쨌든 닥치고 관람.
혹시 실망하더라도, 포스터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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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유약했다. 눈빛에서도 그것은, 드러났다. 그러나 의외의 강단이 있었다. "오 캡틴, 마이 캡틴"(<죽은 시인의 사회>)을 외칠 때, 나는 완전 뒤집어졌다. 감동도 만빵 우적우적. 영화관에 책상이 있었다면, 냉큼 올라갔을 게다. 당시, 나는 '토드 앤더슨'이 되고 싶었다. 영화 속 토드처럼, 나도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소년은, 세상과 처음 그렇게 맞장을 떴다. 여리고 내성적이었던 소년의 흔적.
"...당시 에단 호크와 로버트 숀 레너드가 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라가 “마이 캡틴”을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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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솔직하고 개구진데다 능글능글했다. 기찻칸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눙치더니, 자신의 목적지에 여자를 내리게까지 만들었다. 그리곤 원나잇스탠드까지. 진정한 '꾼'의 자세닷!  '제시'는 오래 산 부부의 권태감을 얘기하고, 사랑과 로맨스를 때론 회의했다. 그러면서 사랑을 긍정하는 '셀린느'와 죽을 딱딱 맞췄다. 해 뜰 때까지 산책과 수다로 충만했던 그들. 당시, 나는 '제시'가 부러웠다.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하고 싶었다. 특히, 독일어를 쓰는 중년부부가 말다툼을 벌이는 칸에. 그리곤 기차에 그녀를 태워보내며, "9번 트랙, 6개월 후 6시"(<비포 선라이즈>)를 기약하고 싶었다. 영화 속 제시처럼, 나도 그때, 20대였다. 청년은, 로맨스와 그렇게 마주했다. 젊고 생기발랄한 청춘의 표상.
"...20대의 호크는 미래가 궁금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늘 살짝 열려 있는 민감한 입술,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일찌감치 파놓은 미간의 주름, 항상 눈부신 것을 보는 듯한 눈과 그와 대조를 이루는 사내다운 턱. 그는 여자로 하여금 “넌 언젠가 꼭 근사한 남자가 될 거야”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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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우수와 그리움이 깃들어있었다. 움푹 파인 눈가와 주름 자글자글한 미간. 찬란했던, 그러면서도 유약함을 품고 있던 미모는, 세월에 깎여 까끌까끌. '이토록 뜨거웠던 순간'을 관통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형의 모습이랄까.^^; 지리멸렬하고 섹스리스와 다름없는 윤기없는 생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9년 전과 달리 이제는 로맨스를 옹호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제시'처럼 파리를 거닐고 싶었다. 오래된 로맨스를 품고서. 그리곤, 어떤 노래를 들으며, "I know..."라는 말을 툭 던지고 싶었다. 영화 속 제시처럼, 나도 그때, 30대였다. 청년과 중년 사이에서, 현실은 촘촘히 생을 옥죄고 있었다. 그럼에도, 까르페 디엠(Carpe Diem)
"...혹시 지금 그는 7년의 결혼을 공유했던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비포 선셋>의 제시는 결혼을 가리켜 “한때 데이트했던 사람과 조그만 탁아소를 운영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 대사는 누가 쓴 것일까? 지금까지 에단 호크가 쓴 소설과 감독한 영화들은 매우 사적이다. 아직 딱지가 앉지 않은 본인의 체험을 예술로 옮겨놓는 행위에 따르는 위험을 호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 나 역시, 에단 호크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다. 10대 <죽은 시인의 사회>부터, 20대 <비포 선라이즈> 30대<비포 선셋>. 그리고 이후에 올 무언가. 특히나 <비포~> 연작은 내 20대와 30대의 감성과 로맨스를 지배하는 중요한 영화포인트. 내 생애 후일담이 가장 궁금했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9년 후 어쩌면 가장 세월을 현명하게 머금은 영화, <비포 선셋>은 그래서, 내겐 너무도 소중한 영화. 톰 크루즈과(科)는 아니지만, 에단 호크는 독특한 꽃미남이었다. 그 유약해뵈는 눈빛에선, 슬픔과 외로움이 늘 한켠에서 묻어있었다. 마냥, 세월을 먹은 것이 아님을 드러낸 눈빛의 진화. 세월의 농익음이, 현실의 고단함이, 시간의 잔인함이...

너에게, 에단 호크를 권한다. 물론, 소설보다는 영화. 나도 에단 형의 소설은 못봤으니까.^^;
에단 호크와 동년배라는 김혜리 씨네21기자의 맛깔스런 대화록. 찬찬히 에단 호크를 느껴보시라~

<이토록 뜨거운 순간>도 그래서, 기대!

그리고 또 언젠가, 좀더 에단호크에 대해 풀어볼께. 내가 간직하고 있는 에단 형에 대해.

근데, 뭐니뭐니해도,
입술이 뽀개질 정도의 이 강렬한 키스~
나도 기차역 플랫폼에서, 떠날 기차를 앞에 두고, 절절한 이 키스를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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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2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떠올리다...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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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뉴욕에 사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녀석은 늘 그랬듯, 바빴다며 투덜댔다. 우린 웃기게도 서로를 부러워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서로의 공간을. 나는 뉴욕을, 녀석은 한국을. 녀석은 이른바 '뉴욕 촌놈'이다. 뉴욕에 있을뿐, 그 속살을 모른다. 일에 치여사는 직딩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러면서 우리는, 1년 전을 꺼냈다. 1년 전 우리는 뉴욕을 함께 누볐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녀석 덕분에 뉴욕의 '사백팔분의 일'을 맛봤다. 녀석도 마찬가지. 나 덕분에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핑계를 찾은 셈이었다. 그때 내 손엔 <<안녕 뉴욕>>(백은하 지음)이 있었다. <<안녕 뉴욕>>은 영화 속 뉴욕을 거니는 책이다. 우린 그 책을 일부 따랐다. <세렌디피티> <인더컴퍼니> <섹스앤더시티> 등의 동선을 따라, 센트럴 파크의 스케이트장에서 백만년만에 스케이트를 탔고, NYU 앞의 커피숍(레지오) 등에서 커피향에 취했다. 가장 아쉬운 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징징거렸다. 뉴욕을 다시 거닐고 싶다고.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뉴욕을 맛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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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봄날의 늦은 오후, 몬탁의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좀더 넓었고, 모래사장은 좀더 작았다,고 했다. 그 바닷가, 쓸쓸했나보다. 이동진은 몬탁의 풍경을 그리 상세히 서술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바닷가는 그래야 어울린다. 이동진은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끄집어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 것없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맞다. 이동진은 그 사랑을, 긍정하고 있다. 기억은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기억하고, 몸은 끝끝내 그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동진은 또 말한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손을 흔들어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음을 미소로 확인해 줄 수 있기를."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기억한다. 'Delete'를 누른다고 지워질 수 있는게, 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우개로 지워도, 꾹꾹 눌러쓴 흔적은 남는 법. 사랑은, 늘 꾹꾹 눌러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내 사랑에게, 가끔 속삭인다. 마음 속으로. 고마웠다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너의 곁에 잠시 살아서, 그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줘서...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안에서 방을 전세냈던 그 사람들을. 방을 뺀다고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가 있나. 다른 방이 생기면서 축소되고 희석될망정, 그 기억은 어느순간 불현듯 냄새를 피우곤 한다.

이동진은 내게, 이 말을 건넸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그건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을 기행하고 썼던 말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말을 좋아했다.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노욕과 노회함으로 점철된 모리배들의 것과는 다른. 이동진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나는 버티고 견디려고 발버둥친다. 이 세계를, 이 일상을.

그래서,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한다. 이동진은 겨울에 치바를 찾았다(같은 바다지만, <이터널 션사인>의 몬탁은 봄이었다). 겨울바다는 역시나 외로움이 뚝뚝 묻어난다. 겨울바다에 간 이동진에게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 외로움도 크기가 없다.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 그렇고, 외로움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외로움의 잔을 마땅히 들이켜야 한다. 1인분을 지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조제와 츠네오가 이별여행을 했던, 일본 치바현 규주큐리 해변을 거닌 이동진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워도, 부디 1인분의 삶을 흘리지 않을 수 있길. 함께 가는 이가 흘린 삶은 또다른 항해자에게 암초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동진은 이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글 속에서 이동진은 그렇게, 1인분의 술잔만 말없이 비웠다고 했다. 현실에 딱 밀착된 생을 표현한다면 저보다 좋은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1인분'.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라기보단 '감식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동진의 (영화)언어는, 대개의 평론가의 것과 다르다. 내 인상비평이지만. 물론, 평론가라고 다 똑같진 않다. 영화평이나 기행문에서, 이동진은 오버하는 감이 없다. 덤덤한 게 좋지 아니한가? "내 감정에 책임을 지자"는 영화평 작성의 원칙도 얘기했지만, 이동진은 영화 속에서 생의 어떤 부분을 길어내는 것 같다. '벅찬 느낌'에서 비롯되는 리뷰의 시작,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감정에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야하는 결벽증(?)도 한몫하겠지.

<<필름 속을 걷다>>에서, 나는 외로움을 봤다. 단지, 혼자 그곳을 거닐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1인분의 생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아픔이 있었다. 흔적을, 리얼리티를, 시간을 찾아 흘러갔던 이동진은, 어쩌면 극악하게 시니컬한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이동진의 글이 따뜻해서, 감성적이어서, 좋다고 했지만, 나의 느낌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이동진의 글은,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밥벌이 혹은 생의 공포와 끊임없이 싸우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동진이 말했듯, 여행이라는 아픈 상태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훑은 기행문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제거한, 각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 물론,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괜스리 오버하는 여행기도 때론 좋다. 그것이 내게 삘을 꽂았을 경우겠지만.  

간접적으로 '필름 속을 걸'으면서, 홀로 걸었던 사람(이동진)의 길을 떠올렸다. <러브 액추얼리>의 런던, 모두가 쉬는 성탄절, 근위대 병사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속삭임을 들었다는 말에, 나는 부르르 떨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동진은 말했다. "떠들썩한 축일을 홀로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밀한 동료애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잠시 흘렀다." 나는 잠시, 그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동진은 또 말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든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종종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나는, <사랑해, 파리>의 백혈병 부인을 둔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나 역시, 필름 속을 계속 거닐고 싶다. 그런데 필름은 쌓이는데, 언제쯤 그 속을 거닐 수 있을까. 이 책에 나온 15개의 영화 가운데, 나는 이동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라는 <행잉록의 소풍>, <나니아 연대기>, <티벳에서의 7년>, <베니스에서 죽다>를 보지 못했다. 뭐, 영화를 보지 못해도 좋은데, 어쩐지 이들의 공간에는 한번쯤 발을 디디고 싶다. 그곳에서, 1인분을 말끔히 비우고 싶다. 다시 뉴욕도 가보고 싶다. 그 속의 필름들을 찾아. 아울러, <러브레터>의 오타루는 꼭 가야겠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당신이라면,
나는, 이 책을 권한다.

☞ 영화 읽어주는 남자 이동진을 만나다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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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담배를 빨았다. 그 시큼함이란.
'다정'도 병이라는 말. 그리움 혹은 사랑이 깊어지면 슬픔이 된다는 말.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믿었다.
브로크백에 문득 오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 그곳엔 어떤 사랑이 있겠지.

씨네큐브 스크린에 불이 꺼지고, 많은 이들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눈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고 하면 거짓이고.
다시 만난 잭과 에니스에게,
그들은 '다정'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으리라.

'띠리~'하면서 시작하는,
구스타보 산타올라야(Gustavo Santaolalla)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오프닝이 나올라치면,
심장박동이 뛰어버리는 사람들.

그랬다.
"어떨 땐...
 정말이지...
 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라던 잭의 다소곳한 고백에 나는, 사랑의 씁쓸한 행복을 곱씹어야 했고,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그 언젠가,
그녀를 향해 그리하였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리고, "난 널 20년동안 그리워했어"라는 잭의 절규엔 울컥했다.
그 사무친 그리움이 절절하게 와닿아서.
그것을 맛본 사람은 알 터이지.

무너져 내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 역시 한없이 허물어져야 했다.

한편으로 다시 그들을 만나면서,
새로이 발견했다. 로린 역시 잭을 많이 사랑했다는 것.
여자의 눈물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미신(?)도 있지만,
나는 로린의 눈가와 표정, 말투에서 그렇게 느꼈다.

브로크백은 그렇게,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I Sw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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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6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랑, 잭과 에니스를 추억하며...
2007/08/03 - [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브로크백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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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더라. 이쁜 상품에 눈이 어두웠다. 대답해줬다.
그런데 궁금하다. 감성스토리. 감성과 스토리텔링의 조화.
감성과 스토리텔링, 제대로 잘 풀어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감성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감성은 곧 사랑이다! 내 감성의 근원은 사랑이 아니면 안된다.
사람에 대한, 사물에 대한 사랑이 샘솟아나는 그 순간, 감성은 시작된다.

내 감성이 풍부해지는 순간은 '사랑'에 빠지는 사건과 일치한다.
그 어떤 사건보다 온전하게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스펙트럼이 곧 감성의 스펙트럼으로 직결된다.
감성을 흔든다? 그건 '사랑'의 어떤 흔들림 때문이다.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좌절도, 감성마저도 사랑이 조절하더라.

내가 감성을 이야기함은,
바로 사랑을 말함이요,
나는 그 사랑을, 감탄한다.
내 감성은 사랑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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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바이텐'이라는 사이트에서 <<SENSATION 센세이션展 : 세상을 뒤흔든 천재들>>이란 책을 놓고 이벤트를 하는데,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무엇인가요?"

물론 이 책은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고정관념에 딴지를 걸고 새로운 시각과 사고로 지각변동을 일으킨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책 소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책. 이 책에 소개된 예술가들은 예술적 관습을 뒤엎고 전통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낯설기 기법의 원조들이다."

이벤트 물음의 답변을 보자면, 신정아 사건이나 911테러 등을 들고 있는데,
나는 좀더 사적으로 접근했다. 뭐 동의하거나 말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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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에 빠지는 사건이 가장 센세이셔널하지 않을까. 그건 어떤 다른 사건보다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가질 수 있는 사건이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세계를 확장하게 되는 사건보다 센세이셔널한 것이 있겠는가. 사랑은 그렇게 다른 세계를 만나는 통로이다. 일생을 살면서 사랑은 한번이 올 수도, 몇번을 거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센세이션 그 자체다. 우리는 그 '사랑'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좌절도, 그 모든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말이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극심한 아픔도 겪는다.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이 담긴 사랑이야말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


당신이라면,
어떤 센세이셔널한 사건을 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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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연의 아픔이 온몸을 옥죄어오던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 몸도, 가슴도, 머리도. 실연은 그렇게 잿빛이다.

그래서 순전히 궤변이지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답변한다.

실연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실연을 현실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쉬고,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시절은 갔다. 실연은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품게끔 강요한다. 그 강요로 인해 나는 갈증에 시달리고, 길을 걷다 눈물에 젖고, 골방에 쳐박힌다. 세상 모든 슬픈 노래는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나는 실연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감당한다. 실연으로 인해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실연 이후의 나의 모든 행동과 의식 모두가 그 강요의 극복을 위한 것이다. 실연을 실연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극복은 이뤄질 수 있다. 믿지 못할,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내가 실연에 대처하는 자세.

한편으로 실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극복해야 하는가. 실연은 실연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다. 실연이 없었다면, 미처 경험하지 못할 행동과 감정이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실연은 우리 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실연을 소중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연 이전의 사랑을 생각하라. 사랑에 고마워해라. 나의 세계가 넓어졌음에. 또한 실연으로 나의 세계가 더 넓어졌음에.


웃긴다. 실연한 사람한테 이따위 말이 통할 리가 있어?ㅋ
그래도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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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네. 맞아.

언제 어느때, 내쳐질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영원할 것이란 믿음은 허상.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사랑도 미움도.

사랑 앞에 늘 비정규직이기에, 힘겨운 감정노동.

그래서 절대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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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부로 정의할 것이 못된다. 한 사람이라도 몇번이라도 바뀔 수 있다. 사랑의 대상에 따라 사랑의 정의는 문어발처럼 퍼진다. 사랑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넓다는 게지.

그럼에도 사랑 없는 사람살이는 끔찍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나 색깔을 가지건,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 소중하다. 나는 믿는다. 사랑이 이 삶이라는 치명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임을.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을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랑'을 다룬 영화를 좋아한다. 그 사랑은 때론 나를 달뜨게도 한다. 영화 속의 사랑에 나는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시키곤 한다. 물론 그 사랑이 내 가슴을 움직일 때만. 사랑 영화라고 모두 내 심장피를 뜨겁게 달구진 않는다.

이 영화가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 나는 이 사랑에 심장으로 울었다. 눈 밖으로 북받쳐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터뜨린 울음. 정말로 아렸다. 심장이 바짝바짝 쪼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나는 사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썰미의 둔함을 원망해야지..^^;;

에니스는 잭의 죽음이후, 잭이 살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잭의 옷장에서 겹쳐진 셔츠를 발견한다. 잭과 자신의 셔츠다. 잭의 파란색 셔츠가 에니스의 격자무늬 셔츠를 감싸고 있었다. 이후 거의 마지막 장면, 에니스가 그 겹쳐진 셔츠를 자신의 방에서 바라볼 때. 잭의 파란색 셔츠는 에니스의 셔츠 안에 있다. I swear... 라고 읊조리는 에니스는 잭을 그렇게 품은 것이다. 아, 이런 것을 놓치다니. 알면 더 감질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나는 사랑이 고플 때, 사랑이 힘겨울 때, 사랑이 그리울 때, 아주 가끔 이 영화를 보거나 떠올린다. 에니스와 잭을 다시 보고, 그들의 사랑을 곱씹는다. 아~ 살앙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당시 개봉되기 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고 긁적였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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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브로크백마운틴>. 제목부터 왠지 끌렸다. 이안 감독 작품이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어떤 "사랑"을 만났다.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의 사랑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 사랑이 지독하게 쓸쓸하고 아팠다. 시큼거리는 눈시울만큼이나 내 가슴에도 징한 대못이 박혔다.

사랑은 쓸쓸하고 아프려고 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희열이고 기쁨이지만 때론 아픔을 동반한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이다. 열정을 부정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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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의 충동이었는지, 고립된 산속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동성애 성향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그리고 그것을 어느 특정한 이유를 들이대며 설명하는 것도 우습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어느 한가지로 규정할 수 있던가). 그닥 알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그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른바 "허락 받지" 못한 사랑이다. 이성애가 아닌 사랑을 "금기"로 여기는 주류의 이기심. 그들 또한 그 사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어쩌다 한번 만나 아무도 모르게(브로크백마운틴만이 알 수 있는) 탐닉하고 열정을 불사르는 수밖에. 특히나 "남성성"을 더욱 강요당하는 카우보이들에겐 더욱 힘들 것 같은 사랑.

사랑에 관한 한 어느 사랑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동성애가 됐든 뭐든간에. 하지만 동성애에 대해 여전히 관대하지 않은 세상의 시선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더 로맨틱하고 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쓸쓸했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으스러진 그들의 감정. 그 감정을 억누른채 살아가야 했던 에니스의 머뭇거림. 합일하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해 부유할 수밖에 없었던 잭의 열정. 무엇보다 나즈막하게 에니스에게 "어떤 때 니가 보고 싶어 견딜수가 없어"라던 말을 건네던 잭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은 못내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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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만큼이나 쓸쓸했던 또 다른 두 사람. 에니스의 아내, 알마와 잭의 아내, 로린. 남편의 비밀을 알고서도 못내 그것을 안으로안으로 곰삭여야 했던 알마의 쓸쓸함. 계산기 앞에 몰두하는 로린 역시 점점 멀어지는 남편에게 받은 절망감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에니스와 잭의 사랑 뒤에 가려진 그들의 쓸쓸함.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맞다. 그거였다.


"동성애"를 여전히 "희귀종"으로 생각하고 배격하는 쪽에 가까운 한국에서 정서적으로 몰입하기가 쉽지 않을 법 하지만 그저 "사랑"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나는 그 사랑이 그저 가슴 아팠고 쓸쓸했다. 그래서 안구 밖으로 터져나오는 눈물보다 더 징한 가슴으로 울먹이게 만든 영화였다. 나에겐 그랬다.

"살앙"을 아는 당신이라면, 그 아픔과 쓸쓸함을 경험해본 당신이라면, 그들의 "살앙"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사족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일행이 아닌 옆에 계신 여성분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못해서였는지, 감정의 파고가 높아진 후반부부터 연신 눈물을 훌쩍이셨다. 다시 내게 사랑이 온다면 나는 그런 감성을 지닌 여성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정도 감성이라면 나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ㅎㅎㅎ

또한 뱀발이지만... 세상엔 너무도 큰 슬픔을 가슴에 담고서도 태연자약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이들을 봤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정작 감당하기 힘든 슬픔은 겉으로 폭발할듯 표현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에니스를 연기한 히스레저는 그런 면에서 증말 탁월했다. 그의 무표정이 얼마나 가슴을 후벼파던지...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 쓸쓸함이 잔상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어쨌든 결론은... 쉽다. 내겐 너무도 좋은 영화였고 다시 보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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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수 없는, 버려져선 안되는 생의 사랑 by 필감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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